어떻게 하면 보살의 원력을 이룰 수 있습니까?

2016-05-24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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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문은 『대방광불화엄경』 「입법계품」의 세 번째 선지식인 해운 비구의 법문을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첫 번째로 찾아간 선지식은 문수보살이었고, 두 번째 찾아간 선지식은 덕운 비구이지요. 덕운 비구는 선재 동자에게 부처님을 일념으로 생각하는 21가지 염불문을 가르쳐주고서는, 이렇게 말하며 해운 비구를 찾아가보라고 했습니다.

| 언제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선남자야, 해운 비구는 너로 하여금 광대한 조도의 지위에 들어가게 한다. 너에게 크고 광대한 아주 좋은 선근이 나게 하며, 보리심을 발할 수 있는 씨앗을 설해줄 것이다. 여러 가지 수행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며, 광대한 자비의 힘이 생기게 할 것이다.”

이때 조도助道는 ‘도 닦는 일을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스님의 역할도 바로 조도입니다. 잘 모르는 것을 알게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먼저 절에 간 사람이 뒤에 온 사람을 도와주는 일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수행과 기도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절까지는 스님이 함께 가지만 기도는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행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도, 행함은 여러분이 직접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재 동자는 덕운 비구에게 많은 가르침을 듣고 나서 세 번째 선지식 해운 비구를 만나러 남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해운 비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덕운 비구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내려갔습니다.

출가수행자들이 아침·저녁으로 경전을 읽고 또 읽는 이유는 잠시라도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경전의 가르침이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불자들은 『천수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그래서 누구나 여러 경전을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이간질을 하게 되고, 때로는 화를 내고, 나쁜 마음을 내게 됩니다. 절에 와 있을 때는 항상 마음이 올곧더라도 일주문만 나서면 세속의 근심걱정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일 것이에요. 그래서 출가수행자들은 아침·저녁으로 부처님 전에 가서 다짐하고, 다시 한 번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 나를 추스르는 것입니다. 재가 수행자들도 끊임없이 삼독에 물들려는 자기 자신을 다잡아야 합니다.

이 마음과 몸은 나의 불성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마음과 몸은 나태하고 게으르고 편안함과 쾌락을 찾으려 해요. 그런 것을 스스로 제어하고 바르게 하려면 언제나 몸과 마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늘 부처님 가르침을 생각하고 내 행동이 바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깨어있음을 지켜주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계율입니다. 우리가 5계 10계를 받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선재 동자도 배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다음 선지식을 찾아가면서 내내 가르침을 되새겼습니다. 이런 점은 배워야 합니다. 스님의 법문을 한번 그냥 듣고 흘려버리지 마시고 듣고 또 들으시기 바랍니다. 

| 대비심을 발하여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라
선재 동자는 해운 비구를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세속에 사는 보살들이 어떻게 해서 아집을 버리고 여래의 삶을 사는지요. 어떻게 해서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서 부처의 지혜에 들어왔는지요. 어떻게 범부의 경지를 떠나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지요. 어떻게 죽고 사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요. 어떻게 원력보살로 살 수 있는지요. 어떻게 마구니를 벗어나 부처의 경계에 들 수 있는지요. 어떻게 애욕의 바다에서 나와 자비의 바다로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악의 문을 나와 열반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요. 어떻게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삼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지혜의 도량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요.”

하나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은 모두 물어봅니다. 그 질문이 그 질문 같은데도, 해운 비구는 질문 하나하나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그래, 네가 보리심을 발했으니 내가 일러주마.” 하면서 장구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때 해운 비구가 설한 가르침이 ‘보안普眼 법문’입니다. 보안이란 두루 넓게 보는 눈을 갖추어 모든 여래의 경계를 보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중생이 선근을 심지 않으면 위없는 보리심을 낼 수 없으니 넓게 선근 광명을 얻어야 한다. 크게 인자한 마음을 내어 모든 세간을 다 같이 복되게 해야 한다. 안락한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주어야 한다. 이롭게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이 나쁜 업에서 떠나게 해야 한다. 불쌍한 마음을 내어 두려워하는 이들을 모두 지켜주어야 한다. 걸림 없는 마음을 내어 온갖 장애를 떠나게 하고 끝없는 마음을 내어 허공처럼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해야 한다. 너그러운 마음을 내어 모든 여래를 다 친견하고, 청정심을 내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법의 지혜가 어김없어야 한다. 지혜의 마음을 내어 온갖 지혜에 두루 들어가야 한다.”
물은 것도 많지만 대답도 많습니다.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는지는 그 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보살행을 닦는 방법도 한두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선재 동자가 한 여러 가지 물음에 대해서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운 비구 법문의 핵심은 ‘대비심을 발하여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라.’입니다. 대비심은 자비심을 말합니다. ‘자慈’는 어머니의 사랑이고, ‘비悲’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잘되건 못되건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고, 아버지는 속으로 눈물 흘리지만 회초리를 들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비심은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 같은 마음을 둘 다 내어 중생을 보살피고 제도하고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고통, 쓰라림을 어떻게라도 소멸하게 해주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발보리심의 마음입니다.

| 중생은 업으로 살지만 보살은 원력으로 산다
앞서 선재 동자가 해운 비구에게 한 질문 중에 이런 물음이 있었지요.
“어떻게 하면 생사, 즉 죽고 사는 굴레를 벗어나 보살의 원력을 이룰 수 있습니까?” 

중생은 업으로 살지만 보살은 원력으로 산다고 합니다. 즉 원력으로 사는 사람은 보살이고, 업에 끄달려 사는 사람은 중생입니다. 자기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업 타령만 하는 사람과, 자기 원력으로 삶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삶의 자세가 달라요. ‘나는 업을 많이 지어서….’ ‘나는 업대로 살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건 패배주의적 삶입니다. 내 업이 모질고, 내 업이 나를 쓰러트리더라도 강한 원력을 세워서 이겨나가는 것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중생이 바로 부처라 했습니다. 중생이 수행하여 부처도 되는데 왜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인가요? 큰 원력을 가지고 살면 그것이 보살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뜻으로 선재 동자는 질문한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운 비구가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로 답하지 않고 가르침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대비심을 발하여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굳건한 원력을 세우셔야 합니다. 원력이 없는 기도는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53기도 도량 순례도, 법회도, 나왔다 안 나왔다 하며 흔들리는 사람들은 원력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력이 굳건하면 기도도 절로 됩니다. 여러분 굳은 원력을 갖고 보살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혜자 스님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 서울 도안사 주지. 1967년 도선사에서 청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76년 법주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청담학원 이사장, 혜명복지원 이사장,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공동대표, 불교환경연대회의 공동대표, 도선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2015년 10월, 9년에 걸친 ‘108산사순례 기도회’를 회향, 2016년 2월 ‘53기도도량 순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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