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에 길을 묻다] 분노는 유죄인가?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

2016-04-11     법인 스님

『중론』 「관염염자품」을 펼치니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신 리영희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뇌리를 스칩니다. 불교경전을 공부하면서 ‘삼독’三毒이라는 용어에 가장 절실하게 공감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탐욕·분노·무지, 이 세 가지 번뇌가 인간의 고통과 세상의 모습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삼독이 발생하면 인간은 서로 다투고 그로 인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열반이 무엇이냐는 동료 수행자의 물음에 아난 존자는 “삼독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정의합니다. 「관염염자품」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에 대한 고찰입니다. 『중론』의 모든 품은 주체와 대상과 작용이 본래부터 고정불변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말미암아 임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 품도 탐욕을 행하는 자와 탐욕의 관계성을 고찰하면서 탐욕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자유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관염염자품」은 먼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번뇌는 중생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여기서 중생이란 ‘물든 놈(染者)’이고 탐욕은 ‘물들이는 법(染法)’이다. ‘물든 놈-주체’과 ‘물들이는 법-대상’이 있으므로 탐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머지 분노와 어리석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화’가 있기에 ‘화난 놈’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기에 ‘어리석은 놈’이 있는 것이다.
 
위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일정한 오염원을 대하면서 탐내고 분노하고 잘못된 판단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온갖 번뇌와 행위를 발생시키고 마침내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를 경전에서는 삼계고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진단은 세간에서도 통용되는 상식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탐욕, 분노, 무지에 대해 현상적인 분석만이 있고 철학적으로 해소할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품에서는 삼독 중에서 ‘탐욕’을 예로 들면서 삼독을 행하는 자와 삼독이라는 행위와 현상이, 어떤 원인과 조건 없이 일정한 모습으로 미리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역시 삼독으로 인한 속박과 고통의 근원적 해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 품에서 나가르주나는 탐욕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삼독 중에서 ‘분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굳이 분석하자면 분노가 삼독의 정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과 인간의 실상을 잘못 이해시키는 무지는 고통의 씨앗이고 뿌리입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의 도움과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관계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기적인 탐욕에 집착합니다. 이기적 행위는 독점과 독식의 사회를 만듭니다. 어느 누군가 독점하고 독식하면 많은 사람들이 소외당하고 좌절합니다. 소외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은 불안하고 억울해서 분노합니다. 또 독식하는 사람 역시 가진 것을 빼앗기거나 남보다 덜 가질 것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승자는 원한을 낳고 패배자는 괴로워한다.”고 말합니다. 공존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삶은 결국 모두가 피해자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식과 소외의 얼굴을 가진 탐욕은 불안과 분노의 원인이 됩니다. 무지와 탐욕에서 비롯된 불안과 분노는 승자와 패자 모두를 불안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우리는 대개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과 집단에 대해 일방적으로 나쁘다고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분노의 감정은 거친 말이나 폭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행사하는 행위는 분명 타인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하지만 분노를 행사하는 당사자의 마음 또한 원한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도 역시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분노는 온전히 ‘내 탓’일까요? 마음공부가 덜 되어서 분노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불교는 모든 것이 본래부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중아함』 「도경」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모든 사람의 모습과 행위는 어느 전능한 신이 만든 것이라거나, 어떤 숙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든가, 아무런 원인 없이 그저 우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처님은 진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의 법칙, 즉 연기법을 적용하여 분노의 정체를 분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면, ‘분노’가 있으므로 ‘분노를 행하는 자’가 성립합니다. 다시 분노를 행하는 자를 성립시키는 분노는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요? 
 
이런 예를 적용해 볼까요? 본사와 대리점의 경우, 흔히들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이 아주 심한 불공정 계약과 행위를 행사합니다. 생계가 걸린 을은 참고 또 참지만 마침내 몰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참을 수 없어 항의합니다. 그 항의가 일방적으로 무시되면 마침내 을은 폭발합니다. ‘불공정한 행위’라는 원인으로 인해 ‘분노’와 ‘분노하는 자’가 동시에 성립합니다. 또 갑의 불공정한 행위 역시 본래부터 그런 행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촘촘하고 교묘한 자본주의의 그물망에 기인한 것입니다.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입니다. 지상에서의 윤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연기법을 입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 법칙에서 ‘이것’을 일방적으로 고정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산적과 해적이 있으므로 민심이 흉흉하고 나라가 불안하다.”의 경우, 왜 산적과 해적이 들끓게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리석고 포악한 군주가 폭정을 일삼는 경우 대다수의 민중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도둑이 됩니다. 소말리아 해적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일반 민중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환경입니다. 그래서 그 부작용으로 해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인간의 탐욕 때문에 산적과 해적이 생기고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일방적으로 규정하면 모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것’이 발생하게 되는 ‘이것’을 달리 규정해야 합니다. 즉 위정자 등 소수의 기득권층이 ‘이것’(제일 원인)이 되고 어쩔 수 없이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려 해적이 된 민중이 ‘저것’(결과)이 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의식이 먼저인가 제도가 먼저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각성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경우를 이렇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법과 제도가 잘못되어 개인의 의식과 사회의 문화가 잘못된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사회’라는 사회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승자독식으로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개인은 좌절하고, 심성이 황폐화되고, 마침내 분노하고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탐욕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권리가 차단되어 안전한게 살 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삼독의 번뇌를 사회적 맥락에서 고찰해보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이 품의 게송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삼독을 해소하는 사회적 대안을 찾아보겠습니다.
 
 
법인 스님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다. 2000년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오늘날 템플스테이에 해당하는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불교계 최초로 열었다. 2009년부터 4년간 조계종 교육부장을 맡아 ‘백 년만의 변화’라는 승가교육개혁을 이끌었다. 현재 일지암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