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윤회와 아뜨만과 공

불일불이不一不異

2016-04-11     김사업

 

사바세계에 얽힌 이야기
김사업
중생은 세상이 자신의 욕망대로 되지 않기에 괴로움 속에 살아간다. 중생이 사는 이런 세상을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사바娑婆’라는 말은 인도말 ‘사하sahā’의 발음을 소리 그대로 한자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옛날 인도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종류는 크게 산스끄리뜨와 쁘라끄리뜨라는 두 범주로 나뉜다. 산스끄리뜨는 세련된 문어文語인 반면, 쁘라끄리뜨는 속어이며 구어口語이다. 인도에서 불교는 이 두 범주에 속하는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중국과 티베트에는 주로 산스끄리뜨로 기록된 경(불타가 설한 가르침)ㆍ율(불교교단의 규정)ㆍ론(경과 율에 대한 주석서)이 전래되어 그때그때 한문과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모아 놓은 것이 한역대장경과 티베트대장경이다. 쁘라끄리뜨에 해당하는 언어에는 여럿이 있는데, 불교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빨리어이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불교의 경ㆍ율ㆍ론 삼장은 빨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한자 불교 용어를 대할 때 주의할 점은 원어의 뜻을 번역한 의역意譯뿐만 아니라 원어의 발음만 그대로 표기한 음역音譯이 있다는 것이다. 영어의 ‘book’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의역하면 ‘책’이고, ‘북’이라 하면 음역이다.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의역한 경우에는 그것만으로도 뜻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음역된 불교 용어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무관세음보살’이라 할 때의 ‘나무(南無)’이다. 나무는 ‘남녁 남南’과 ‘없을 무無’의 합성어이므로 얼른 생각하면 ‘남쪽에 없다’를 의미하게 되고, 따라서 ‘나무관세음보살’은 ‘남쪽에는 관세음보살이 없다’를 뜻하게 된다. 이런 이상한 뜻이 되는 탓에 불교에 갓 입문한 분들 중에 ‘나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무’는 산스끄리뜨 ‘나모namo(기본형은 namas)’를 음역한 말이다. 음역된 한자 불교 용어는 음역되기 전의 인도 원어와 그 뜻을 알아야 의미가 밝혀진다. ‘나무’의 원어인 산스끄리뜨 ‘나모’는 ‘귀의한다.’, ‘공경하여 예를 표한다.’는 뜻의 명사이다. 따라서 나무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불교 용어에는 음역한 말이 많다. 반야ㆍ승가ㆍ열반ㆍ선(禪那) 등도 음역어이며, ‘옴 마니 반메 훔’과 같은 진언이나 다라니는 모두 음역으로만 되어 있다.
 
사바세계의 ‘사바’도 산스끄리뜨 ‘사하’의 음역어이다. ‘사하’는 ‘참음’, ‘인내’를 뜻한다. 사바세계를 의역한 말이 ‘참을 인忍’ 자를 사용한 ‘인토忍土’이다. 따라서 사바세계는 ‘참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은 괴로움 속에서 이를 참고 살아가야 하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사바세계,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이 퍼렇게 멍들어 있다. 간절히 원하나 이루어지지 않기에 멍들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기에 또 멍들고, 신세 한탄과 증오와 울분이 치밀 때마다 멍든다. 늙음과 병이 주는 설움에 멍은 그 깊이를 더해 간다. 
불교는 멍을 부여안고 계속 괴로움 속에 살자는 종교가 아니다. 하루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안의 세계에 살자는 것이 불교다. 영원한 평안의 세계가 열반의 세계이며 불국토佛國土이다. 어떻게 하면 피안의 저 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업과 윤회의 문제부터 우선 살펴보자.
 
 
| 아뜨만과 윤회
어떤 사람이 “불은 어딘가에 미리부터 있다가 나무에 옮겨 붙어 그것을 태우고, 다 태우고 난 뒤에는 그 불 그대로 또 어딘가로 사라진다.”고 주장한다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해 버릴 것이다. 연료나 마찰 등, 불이 붙을 만한 조건(인연)이 갖추어졌을 때 불은 생겨나 순간순간 그 모양과 열기 등이 변해 가다가 조건이 다하면 꺼질 뿐이다. 붙기 전부터 불이 있은 것도 아니고 꺼지고 난 뒤에 그 불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위의 사람이 주장하는 바대로 붙기 전과 꺼진 후에도 불이 그대로 있다면 그 불은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자성自性이 된다. 그런 불은 없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 ‘불은 공空하다.’이다.
 
‘불은 공하다.’에 대해서는 흔쾌히 인정하는 사람도 윤회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 모른다. 즉 전생에서부터 고정불변의 내(영혼)가 있었고 이것이 이생에 태어나 살다가 다시 내생으로 원래 그대로인 채 옮겨 간다고.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닌 바라문교의 사고방식이다.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에서는 윤회를 그와 같이 생각했다. 아뜨만(ātman, 我)이라는 ‘고정불변의 나(영혼)’가 있고, 이것이 윤회의 주체라고 본 것이다. 
 
바라문교는 오늘날의 힌두교의 모태가 된 종교로 불교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석가모니에 의한 불교의 출현은 기원전 5~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00년을 중심으로 전후 합쳐 수백 년에 걸쳐 바라문교에서는 『우빠니샤드라』고 불리는 문헌들이 편찬되었다. 세속적 삶을 버리고 선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고자 한 수행자들의 체험이 반영된 문헌들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우빠니샤드』 문헌에서 비로소 업ㆍ윤회ㆍ해탈에 대한 개념이 명확한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을 남기고 이 힘은 존속된다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 ‘업(karman, 業)’이라는 용어는 주로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 이 힘을 지칭한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이 업에 의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와중에서 다음 생에 어떤 몸을 받을까도 이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통찰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윤회는 고통이며, 이 속박에서의 해방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빠니샤드』에서 정립된 ‘업에 의한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통찰은 이후의 불교나 자이나교, 힌두교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업에 의해 어떤 원리로 윤회와 그 해탈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각 종교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업에 의한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대전제는 공유하고 있었다.
 
‘업에 의한 윤회’ 또는 ‘업과 그 과보’ 문제가 타당성을 확보하려면 업을 행한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가 동일인이든가 아니면 밀접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 물건은 이 사람이 훔쳤는데 벌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면 업에 의한 윤회는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다. 『우빠니샤드』에서 언급되는 아뜨만은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준다. 일반적으로 아뜨만은 개개인의 본질을 이루는 영혼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하는 석가모니 출현 이전에 편찬된 초기 『우빠니샤드』에서 언급되는 아뜨만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사후에 육체는 소멸하지만 심장의 내부에 있는 나의 아뜨만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아뜨만은 초연하고 말이 없다. 아뜨만은 포착되지도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는다. 속박됨도 없고 동요도 없다. 
 
누가 선행을 했다고 하자. 그 선행은 그것에 합당한 과보를 가져올 힘, 즉 업을 남긴다. 이 업은 어떻게 존속될까? 그 업은 그 사람의 아뜨만에 부착되어 아뜨만과 함께한다. 임종이 다가왔을 때 업을 부착한 아뜨만은 현재의 몸을 빠져나와 그 업에 맞는 새로운 몸을 취해 윤회한다. 마치 수를 놓는 여인이 다 놓아진 수를 풀어 새로운 모양의 수를 놓듯이, 아뜨만은 업에 따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모습의 몸을 취한다. 이 새 몸의 업이 다하면 아뜨만은 다시 그 몸을 빠져나와 직전까지 쌓은 업에 합당한 몸을 새로이 취한다. 이런 식으로 윤회는 지속된다.
 
윤회의 종식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뜨만을 직관하여 최고실재인 브라흐만(brahman, 梵) 그 자체가 되면 된다. 원래부터 브라흐만(梵)과 아뜨만(我)은 동일한 것이었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버리고 명상에 의해 정신을 통일하여 아뜨만의 본질에 전념하는 자는 진실한 아뜨만을 직관한다.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같다는 범아일여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그는 몸을 빠져나와 브라흐만 그 자체가 된다. 그 몸은 마치 개밋둑 위에 버려진 뱀의 허물처럼 생명 없이 눕혀지고, 이때의 몸을 갖지 않는 불사不死의 아뜨만이 바로 브라흐만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며, 이제 다시 윤회하는 일은 없다. 『우빠니샤드』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이 해탈에 있었다.
 
이상이 초기 『우빠니샤드』에 설해진 업ㆍ윤회ㆍ해탈ㆍ아뜨만에 관한 내용들이다. 나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아뜨만은 늘 있으며 변하지 않는다. 내가 나임은 이러한 변치 않는 나의 아뜨만이 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0년 전과 지금, 전생과 이생을 통하여 나의 신체와 생각ㆍ감정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본질인 아뜨만은 언제나 변치 않고 그대로이며, 행위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를 일치시키는 동일체이기 때문이라고 『우빠니샤드』는 말한다. 행위를 한 자도 나의 아뜨만이요, 그 과보를 받는 자도 동일한 나의 아뜨만이다. 행위의 주체이며 윤회의 주체인 이 아뜨만이 있으므로 나는 동일한 나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빠니샤드의 윤회설에 따른다면 자업자득의 인과응보는 명쾌히 설명된다. 행위를 한 사람과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그러한 아뜨만이 실제로 있는가에 있다.
 
 
| 무아와 윤회
불교는 영원불멸의 아뜨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란 아뜨만은 없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또한 아뜨만은 자성自性에 해당하므로 무자성의 공空에 의해서도 부정된다.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는 무아와 공이 기본인 불교에서 윤회와 인과응보는 어떻게 설명될까?
 
무아와 ‘업에 의한 윤회’를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라문교에 속하는 여러 학파는 불교와의 논쟁에서 윤회의 주체 문제를 들고 나와 무아론을 공격했다. 
 
인도에서 공사상을 선양해 간 중관학파의 시조 용수는 그의 저작 「인연심론석」에서 윤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윤회란 이 생의 오온(정신과 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 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과 같이 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용수는 여러 비유를 든다. 그중의 하나가 경전 복창의 비유이다. 경전을 가르칠 때 스승이 먼저 경전 한 구절을 독송하면 제자는 그것을 듣고 복창한다. 이때 스승의 말이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입으로 그대로 옮겨 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의 복창은 스승의 말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다.
 
용수는 이 등불에서 저 등불로 불이 옮겨 붙는 것도 윤회의 비유로 들고 있다. 이 비유에 근거하여 무아이면서 윤회와 인과응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필자의 안목을 포함시켜 설명해 보겠다.
 
갑이라는 양초의 심지에 불이 타고 있다. 이 불을 양초 을의 심지에 댕겨 불을 붙였다. 갑과 을의 두 불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우선,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두 불의 모양ㆍ열의 세기ㆍ연료 등 어느 것 하나 동일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갑의 불을 원인으로 해서 을의 불이 생겨났다는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자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어야 하므로 을의 불은 갑의 불 없이 붙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런 원인도 없이 불붙었다고 억지 강변하는 것이고 사실에 어긋난다.
 
따라서 갑의 불과 을의 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에 있다. 만약 두 불이 동일하다면 그 불은 자성이 되어 버린다. 두 불이 다르다고 한다면 을의 불은 아무런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 되고 만다. 어느 것이나 오류가 있다.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 진실이다.
 
어떤 것들이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양자는 공空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 논지는 중관학파의 시조 용수(150-250경)에서부터 후기의 거장 샨따라끄시따Śāntaraks.ita(725-788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불일不一, 즉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공의 무자성적 측면을 나타낸다. 한편 불이不異, 즉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공의 유작용有作用적 측면, 다시 말해 공은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작용이 일어나 세상만사가 성립하게 되는 근거임을 잘 나타낸다. 
 
윤회는 갑에서 을로 불이 붙듯이 일어난다고 용수는 설명한다.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그대로 옮겨 가는 아뜨만과 같은 뭔가는 아무것도 없다. 이전 생의 정신과 육체가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새로운 정신과 육체가 생겨나는 것,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윤회인 것이다. 이 생에서 행한 악행의 과보를 다음 생에서 받은 경우, 그 악행을 행한 정신과 육체의 총체적인 업의 결과로 생겨난 다음 생의 새로운 정신과 육체가 그 과보를 받은 것이라고 불교는 본다. 아뜨만은 없으며 두 생에 걸친 정신과 육체는 전혀 동일하지 않으면서 밀접한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아이면서도 윤회는 있는 것이다.
 
위의 언급에서 ‘이 생(또는 이전 생)’과 ‘다음 생’ 대신에 ‘이(이전) 찰나’와 ‘다음 찰나’를 대입해도 참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인과응보 일반에 대한 설명도 가능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호에서 다루겠다.
 
 
| 공과 아뜨만
『대반야경』에 “일체는 모두 공空을 그 자성自性으로 하고, …  무자성을 그 자성으로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일체는 변함없이 항상 무자성이며 공이다.’를 의미하지, ‘공이라는 어떤 자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체는 철저히 공이며 무자성임을 강조한 말이다.
 
‘공은 변함없다.’와 ‘아뜨만은 변함없다.’는 두 문장이 의미하는 전체적인 뜻은 정반대다. 전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후자는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를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다.’는 말에 현혹되어 공을 아뜨만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핵심 용어의 정확한 의미 파악도 중요하고, 그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이 보여주고자 하는 말 너머의 저것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공의 진리 그대로 사는 도인은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된다. 산이 되었을 때 산만 있지 도인은 없다. 산에 대한 분별이 없기에 비교 대상이 없는 산은 이미 산이 아니다. 일이 있으면 그냥 일하고 졸리면 푹 잔다.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는 철저히 죽는다. 집착이 없어 순간순간 눈앞의 그것과 하나가 되지만 그것에 물들거나 머물지 않으며, 불변의 나(我)와 사물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중생인 나에게서 너란 항상 내 안경을 통해서 들어온 너이다. 너를 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본다는 것이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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