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명상인가? 자비행인가?

2016-04-11     유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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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회에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의 주제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비”의 뜻에 대해 강조하고자 합니다. 스님들이 지난 동안거 석 달간 공부한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일까요? 깨닫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닫는 것입니다. 
 
|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지혜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만대장경에 수록되어 있고, 팔만대장경에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 펼쳐져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잘 사유음미하고 성찰하고 설법을 들어서 정확하게 잘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었습니다. 불자님들이 가정과 이 사회의 행복을 소망하는 뜻도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잘 구현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무엇이며, 자비는 무엇일까요? ‘지혜’와 ‘자비’라고 할 때 자비라는 것은 이웃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쉽게 이해되는데,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지 금방 떠올리지 못합니다. 저는 “지혜는 자유다.”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우리 중생의 삶을 옥죄는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바로 지혜라고 말합니다. 존재의 무상, 무아, 공함을 알아서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 탐진치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속성, 정신은 ‘자유’입니다.
 
우리의 다함없는 욕심은 탐진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탐내는, 미워하여 성내는, 어리석은 마음과 행위를 탐진치라고 하지요. 이 탐진치를 하나로 줄이면 ‘목마른 탐욕(갈애)’입니다. 성내거나 어리석은 것도 탐욕 때문에 눈이 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108번뇌로부터의 해탈이요, 자유이며, 지혜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탐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경우에 맞는 욕심이 있습니다.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마음까지 탐욕이라고 해서 물리치면 되겠습니까? 바람직한 원력, 선한 욕망들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버리고 해탈하고자 하는 탐욕이란, 경우에 맞지 않는 탐욕, 도리에 맞지 않는 욕심을 말합니다. 즉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탈해야만 번뇌, 불행, 갈등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는 이기적이면서 도리에 맞지 않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고 자유로워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갈애는 모든 괴로움과 불행의 원천입니다. 탐욕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롭고, 분수를 지키며, 자족하는 마음이 들 때 모든 괴로움과 불행, 각종 갈등을 넘어서서 진정한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에 대한 설명입니다.
 
 
| 자유롭게 해탈해야 진정한 자비실천 가능
그렇다면 자비는 무엇일까요? 지혜가 밝음이라면 자비는 따뜻함입니다. 지혜가 따뜻함으로 나아간 것이 자비입니다. 즉 자비는 세상의 현실 속에서 자유, 즉 지혜가 가장 잘 구현된 것입니다. 지혜를 삶 속에서 구체화시키고 현실화하는 것이 자비라는 말입니다.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비를 가장 잘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를 잘 행하지 못하고 남을 잘 돕지 못하며 배려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스스로의 욕망이나 탐욕, 자기의 에고로부터 완전하게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배려할 수 있는 스스로의 판단과 마음가짐이 덜 준비되었기 때문에 자비행을 알아도 선뜻 행해지지 않고, 행하더라도 부족합니다.
 
결국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비를 잘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해탈해야 진정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밝고 따뜻한 마음으로 가정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갈애와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실질적인 자비행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자비행을 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괴로움과 불행을 넘어선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바로 자비입니다. 어려운 이웃이 누구인가? 나의 자녀들이 어려운 이웃입니다. 젖먹이일 때는 내가 거두지 않으면 스스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도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또한 배우자는 부부이지만 어려운 이웃입니다. 옆집에 사는 주민들, 사회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이 되겠지요. 이웃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바로 어려운 이웃이 될 것입니다.
 
자비는 단순히 혼자서 자선사업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힘을 합쳐서 협동하며 행복한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비는 사회적인 개념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입장에서 행하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조금 더 절제하고 양보해서, 이웃을 배려하고 돕는 일은 결국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모두의 이익으로 환원될 것입니다. 서로 함께 돕는, 배려하는 사회가 될 때 그 사회는 살기 좋은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국이 지옥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세계적으로 매우 낮다고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 불교도들이 책임의식을 느끼면서 보다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 깨달음은 자비의 삶으로 나타나야 
누군가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라고 물으면, “불교란 마음을 밝히는 가르침”, “깨달음의 종교” 등으로 이야기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그 깨달음은 자비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최종적 목표가 아니라 자비로운 삶을 살아서 자비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입니다. 깨달음, 즉 지혜는 자비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며, 자비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는 수상쩍은 깨달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비란 탐욕을 줄이고 절제해서, 세상의 현실적인 불행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보살계는 이웃과 힘든 사람을 도우라는 것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남을 돕지 않으면 계를 어기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고 중생의 현실적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바로 보살계이며 자비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와 자비명상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자비명상으로 자비행을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돕는 뿌듯한 일을 하면 우리 뇌에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발생해 행복감을 느낀답니다. 하지만 자비행을 하지 않고 자비명상을 통해서도 ‘세로토닌’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뇌 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실제 자비행을 하지 않고 자비명상으로만 그치면서 ‘세로토닌’만 탐하여 행복감을 느낀다면 얌체이며 윤리적으로도 옳지 못할 것입니다. 알약 하나로 음식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모든 내장 등 장기 기능이 위축되어 우리 몸이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듯이, 자비를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불교를 행하는 몸이 점점 조그만 해질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불교도들이 자비를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깨달음’, ‘기도’, ‘수행’, ‘가피’ 라는 말들은 무성한데, 자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도 인색합니다. 실제의 자비행도 불자들의 높은 신심에 비해보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자비의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이 무색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간곡하게 기도했던 ‘가정과 이웃의 행복’이라는 화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유, 평화, 행복이라는 화두와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비심을 가지고 자비행을 하는 불자가 되자고 말씀드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유(지혜)와 자족의 마음으로 자비롭게 살기를 당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불보살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유윤정
사진. 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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