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밝히는 등불들] 하산 박충일 거사

연꽃동산에 인쇄문화 꽃피우는 하산 박충일 거사

2007-06-26     이윤수

 "스님, 원고만 주세요. 제가 책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평소 하신 법문들 만으로도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어요. 저는 불법을 설법하지 못하는 대신 스님의 높으신 법문을 책으로 만들어 많은 불자들에게 전하겠습니다. 거저 해드리지요."

 월간 <불광>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둥국대 재단에서 직영하던 구내 인쇄사 일을 하던 무렵, 박충일 거사는 그때만 해도 삼십대의 열혈청년 같은 광덕스님을 만난다. 동산 스님 추모집을 인쇄 제작할 무렵이었다.

 불교에의 인연을 도탑게 할 수 있게 된것도 다 이 시절의 일이다.

 제일한강교 하나밖에 없던 때에, 부인 대륜성 보살과 함께 스님 계시던 봉은사로 법문 들으러 나룻배를 타고 오갔고, 대각사에서 불광법회여실 무렵엔 스님의 오른팔이 되어 일했다.

 금싸라기 같은 법문에 귀기울이면서 그이가 언제나 가슴 설레인 건 저토록 귀한 말씀을 두루두루 전할 순 없는 일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시작했다. 주간이며, 편집장, 기자에 교정일까지 겸하면서 서문에서 편집후기까지 일체의 원고를 광덕 스님 홀로 쓰시고, 조판에서부터 인쇄.제판.제본까지 모든 제작은 박충일 거사가 도맡았다. 두해 동안 무보수로 말이다.

 그 귀로 자릴 잡아 곧잘 나오던 불광지가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한건 70년대 말엽이다.

 그이는 또다시 불광사로 달려간다. 우리 불교 홍보해야 한다. 절대 중단해선 안 된다. 중얼중얼 염불하듯 이런 시념을 안고 광덕 큰스님을 찾아가 뵈었다. 자신이 운영해보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적자더미 속에서도 꼭 붙들어 쥐고 있었다. 그이를 아는 주위사람들이 모두들 황당하게 여긴 일이었다.

이때 그이는 차 뒤트렁크에 불광지를 가득싣고 이 나라 구석구석을 주빈다. 전국의 서점을 연결해 불광지사를 뒀다.

 "나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불교잡지나 불교단행본이 안 팔리는 거란 걸 몰랐겠어요? 지방엘 가보면 후미진 곳에 불서들이 처박혀 있더라구요. 조그만 선물이라도 마련해가주면 서점 진열대에 진열되곤 했지요. 일단 우리 회사밖으로 책이 나간 이상 누구라도 읽으리라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이웃에 사구게 하나라도 전하라고 간곡하게 이르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을 따름이란다. 그러나 그 기저에 불광만큼은 그 맥이 끊겨서는 결코 안된다고 하는 말뚝신심이 버티고 있었던 게고 그 억지스러움이야말로 불광지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애당초 사업성이 없는 일을, 처음이나 중간이나 변함없이 끌어안고 버티어준 박충일 거사가 없었더라면 월간 <불광>이 어찌 통권 2백호가 넘도록 쉼없이 출판될수 있었으랴.

 서문부터 후기까지 그 많은 원고를 쓰시면서도 신바람 나 하시던 광덕 큰스님, 자신은 포교사와 진배없음을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 옛일들을 생각하면 그이의 얼굴에는 지금도 가득 웃음이 번진다. 그런 연유로 지금에 이르도록 그이의 불교출판문화에 거는 기대는 사뭇 절박하다.

 삼십사년생. 육십고개를 바라봄직한 박충일거사는 신흥인쇄주식회사 대표이사라는 직함말고도 대한 인쇄문화협회 회장, 동국대 정보산업대학원 동창회장 등의 굵직굵직한 감투가 따라 다닌다. 그리고 1981년 과 1989년에는 인쇄문화진흥을 통하여 정부와 대통령으로부터 철탑 산업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이가 살아온 궤적을 더듬어 보면 그는 보통 사람의 대열에서 저만큼 벗어나 있는 인물임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빈손으로 어려운 인쇄계를 헤쳐나와 자수성가한 그의 이력이 그러하거니와, 사업사는 이가 이속에 밝지 못하고 베풀고 나누는 일을 즐겨한다던가, 전법에의 원력으로 불교일만큼은 자신의 일처럼 해왔다는 점도 그렇다.

 뿐만 아니다. 역사 깊고 큰 인쇄소들이 문을 닫는 마당에 제일로 듬직한 인쇄소 안팎에서 숨 돌릴 새 없이 달음박질로 살아온 생활에 숨표를 찍곤 법문 듣고 공부하는 일로 회향할 서원을 남모르게 간직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인 예사롭지 않은 사장님이다.

 풍채나 외모로는 다소 '깐깐'하게 여겨질 사장이지만 마주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웃는 모습이 소탈해서일까, 마치 법회 시작 전 방석들을 주욱-  깔아놓고 입정에 드는, 그런 불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친근감과 신뢰감이 가득 전해져 온다.

 거창 출신의 경상도 사나이. 불교집안에서 자라 동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사법서사이던 부친이 그이가 동대고시촌인 법우대에서 밤낮을 잊고 고시공부에 몰입할즈음, 급작스레 세상과의 인연을 마친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은 그는 일자리를 찾아 학교를 쉬었다.

 때마침 동대시보 편집기자로 활동했던 지라 주가이던 장용 박사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교수들의 사려깊은 배려로 그이는 법우대앞에 자리한 구내 인쇄사에 근로장학생으로 취업을 한다.

 당시 동국대 인쇄시설은 국내에서 최고의 수준이었다. 신문방송학과를 만들기 위해 백성욱총장이 독일에서 들여온 최신식 시설이었다.

 이곳에서 그이는 문선, 식자, 정판, 옵셋, 사진제판 과정 등을 한 달씩 견습했고, 관리능력을 인정받아 육 개월만에 공장장 자리에 앉는다.

 난데없이 나타난 20대 후반의 공장장. 수 십년 인쇄를 해온 기술자들의 반발이 드세지는 건 당연한 일. 백 여명의 기술자들이 새파랗게 젊은 공장장과 일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그가 '인쇄쟁이'가 돼보기로 작정하고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지니게 된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뚝심 하나로 밀어붙여 마침내 그이는 여덟 해동안 적자속의 동대 구내 인쇄사를 흑자로 키워내기에 이른다.

 신문방송학과가 생겨날 가망이 없자 인쇄사는 처분되었다. 홍원 인쇄사의 인쇄일을 거들다가 육십오년도에 신흥인쇄공사의 문을 열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의 발견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을 가진 나라. 최초의 금속 활자인 직지심체요절도 세계최최.

 따지고 보면 이 나라가 세계 최초로 인쇄문화의 막을 올린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낙후한 인쇄문화의 현주소. 이제 더 이상 어깨너머로 배운 주먹구구식의 기술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엊그제 문화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목청높여 한국인쇄과학연구소의 필요성을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산학을 연계해서 이론과 실기를 병행할 인쇄 연구소를 만드는 게 소원입니다. 종이와 잉크의 질 문제며 세계첨단 산업과 인쇄산업의 연계, 인쇄가 국민건강에 미치는 영향까지 연구하고 싶습니다."

 박충일 거사의 서랍속엔 '한국 인쇄과학 연구소'라고 그이가 명명한 계획안이 그이의 부푼꿈과 더불어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

 머지않아 남북인쇄문화의 교류가 성사될 거라고 믿고 있는 그는 그래서 더더욱 '인쇄쟁이'로 살아온 삶이, 제대로 선택한 길이라는 생각이다. 요즘들어 부쩍 대한인쇄문화협회 일에 관심 갖고 챙기다 보니 밤이면 파김치가 다 돼 정기적으로 절에 가는 일은 엄두도 못낼 형편이다. 그의 말마따나 사업과 협회일에 '휘말려' 버렸기 때문이다.

 앞뒷집에 살다 스물넷의 동갑으로 혼인한 그의 아내는 혼인 생활의 대부분을 인쇄일에 빼앗겼다고 툴툴거리지만 도리어 그가 봐선 아내가 더 바빠보인다.

 대각사에서의 불광사 시절엔 재무간사의 요직을 맡아 일했으며 잠실 불광사에선 강남 서초구법등의 명등보살로 바빳든 아내 대륜성 보살.

 광덕 스님이 주신 연꽃동산이란 의미의 하산이란 법명답게 살고, 우리집 보살 불심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고 엄살이지만, 박충일 거사의 불교에 대한 애정을 아는 이들은 다 안다.

 석주 스님이 총무원장하시던 시절. 정부의 신문 발행제한 법령이 발표되고, 공무국을 설치하지 못한 신문사들이 줄을 이어 자진 폐간에 들어갔다. 불교신문도 도리없이 폐간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인 또 단걸음에 자신의 신흥인쇄 간판을 내리고 불교신문사 공무국 간판으로 바꿔달았다.

 그동안 해오던 정부관련 인쇄물의 입찰이 끊겼던 두해 동안의 막대한 손해가 얼마였는지 알길 없지만, 이렇듯 박충일 거사는 불교 출판.인쇄분야의 눈물겨운 뒷일들을 살뜰하게 거두고 도맡아 해왔다.

 어디 그 뿐인가. 최재구 씨가 전국불교신도회 회장직을 맡았던 때에는 이건호 씨와 더불어 신도회 일을 자신의 일처럼 했고, 불광사가 잠실에 건립될 당시에는 의정부에 있는 신상균 불사소에서 조성하여 광덕큰스님과 함께 개안식을한 부처님을 불광사 대웅전에 모시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이는 '신심이 돈독치 못해 부끄러울 따름'이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인쇄업계와 인쇄사업에 집착하다보니 부처님 법문 말씀을 듣고 수행하는 일을 멀리하게 되었고, 하루라도 빨리 사업을 마무리짓고 스님곁으로 가서 불교공부를 하겠다던 광덕 큰스님과의 약속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큰스님의 건강이 자꾸 약해져서 자신의 남은 인생의 희망도 사라져 가는 것같아 가슴이 메어진다고 말한다.

 게다가 병마에 시달려 허약해진 법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기쁘게 자신을 맞이해주시는 광덕 큰스님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어찌 신심있는 불자라고 말하겠느냐며, 다만 광덕 큰스님의 쾌차를 빌고 있다고.....

  글: 이윤수 /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