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일상성

2016-03-03     불광출판사

 작년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쏘아올린 ‘깨달음 논쟁’이 근 몇 개월 동안 진행 중이다. 선원수좌회의 반론과 다수 불교학자들의 찬반론,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이 의견을 내놓으면서, 몇몇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논쟁의 공개성을 고려할 때, 또 일간지 보도를 볼 때 논쟁은 이제 제법 타오를 법한데 왠지 타다 만 불씨가 된 듯하다. 까닭이 뭘까? 많은 찬반론에서 볼 수 있듯 쟁론의 방향과 결이 너무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부처님께서 당신이 깨달으신 것을 가장 대중의 언어로 설명했고, 이를 들은 제자들이 어렵지 않게 아라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깨달음 논쟁은 대중의 언어로 좀 더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 적지 않은 불교철학의 지식이 없다면 이 논쟁을 쫓아갈 수 없다.

 

● 만약 깨달음 논쟁이 불교 지성인들의 논쟁이라면, 불교 지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개념이 서로 다르기에 이 다름을 이야기하는 데 많은 지면을 소비한다. ‘선정’이란 단어의 사용설명서가 각각 다르다. 깨달음이란 단어를 이해하려면 별도의 사전이 필요할 정도이다. 논쟁이 복잡해진 이유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서로 다른 이해와 개념으로 논쟁하면 어떻게 될까? 다툼이 된다. 십여 명의 불교 지성인들이 깨달음 논쟁에 참여해도 논쟁의 맥락이 명료하지 않은 까닭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불교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 불필요한 감정의 언어가 덧붙여진다면 그야말로 논쟁의 곁가지는 더욱 잘게 뻗어갈 것이다.
 
 깨달음 논쟁이 복잡해진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선禪이 보여준 현실 때문이다. 현응 스님이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불교에서 평생 선을 해도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란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 물음은 부처님은 깨달음을 어떻게 얻었는지, 간화선은 어떻게 깨달음을 보는지,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은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이를 위해 오늘의 불교인은 어떤 방법으로 노력해야 하는지 등의 자문자답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에 지금의 한국 선불교는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90년대부터 선불교를 뒤로 하고, 수많은 수행자들이 남방불교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 그러하다. 이제는 선원에서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보기 어려운 현상도 이를 말해 준다. 
 
 깨달음 논쟁에서 자주 언급된 것이 경전에 그렇게 나와 있다, 또는 경전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또는 큰스님이 그렇게 봤다 등등이다. 그동안 우리 한국불교 지성인들이 논쟁에 익숙하지 않았던 경험을 고려할 때 이런 언급은 바람직한 논쟁의 답을 끌어낼 가능성이 낮다. 논쟁이 깊어지기보다 서로의 인식만 확인하고 멈출 확률이 높다. 물론 논쟁의 경험치가 지속적으로 쌓이면, 좀 더 업그레이드된 논쟁으로 이어지겠지만. 때문에 깨달음 논쟁이 이어지려면 경전의 문제를 넘어,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포개서 논쟁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당위적이며, 구체성 없는 선언적 독백에 그칠 가능성이 있지만, 논쟁의 방향은 깨달음, 불자의 삶, 한국불교 현실이라는 눈앞의 그물코를 꿰면서 이어가야 한다.
 
 불법은 세간법이다. 세간에 갇히지 않고 세간에 있는 것이 불법이다. 이 분명한 명제는 우리에게 깨달음 논쟁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깨달음 논쟁은 불자의 삶과 세간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선언적인 전망이 휘발되지 않으려면 깨달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실참의 현장에서 어떻게 얽혀 있고, 또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보다 풍부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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