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에 길을 묻다] 온갖 감정에서 자유로운 길

관오음품

2016-03-03     법인 스님

지난해 말, 서울극장에서 특별 상영된 ‘나쁜 나라’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영화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였습니다. 상영 내내 삼백여 명의 시민들은 숨을 죽이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시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힙니다, 어린 생명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는 데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린 중학생들도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그리고 화가 나요.” 모두가 한결 같이 물었습니다.
 
“이것이 국가인가?” 그런데 조금은 연로한 한 시민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구호 과정과 진상 규명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도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잘못이 아닙니다. 국가는 결코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묘하게 은폐하고 방해하는 그들을 원망해야지 국가를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저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중론』 전편에 흐르고 있는 논리적 맥락을 떠올렸습니다.
 
『중론』은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것들의 접속과 결합 없이 결코 그 어떤 것도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단독적인 실체는 없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국가’는 어떤 것들 없이 홀로 국가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국가는 각종 법령과 제도 아래 행정부를 비롯하여 입법과 사법 등의 기구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있어야 국가는 기구로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잘못이 없고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은 모순입니다. 그런 논리는 어떤 모순이 있는지 집과 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붕에 이상이 생겨 물이 새고, 지반이 가라앉아 기둥이 뒤틀어지고, 불량 재료를 사용하여 벽이 금이 가는데도, 집은 이상이 없고 다만 지붕과 기둥과 벽이 문제라고 말한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또 손발이 저리고 신장과 간 기능에 이상이 생겨 몸이 고통스러운데,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손발과 신장과 간이 아픈 것이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고 그에 파생되어 소속된 부수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전체주의를 낳는 기저가 됩니다. 고대의 중동과 극동, 헬레니즘과 유럽의 문명, 콜럼버스 이전의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널리 퍼진, 이른바 ‘왕의 권력은 신에게 부여 받았다’는 왕권신수설도 이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러시아의 스탈린이 “당은 오류가 없다.”고 말한 것이나 중세 교회의 ‘교황 무오류설’ 등도 실체적 사고에 근거하여 절대적 신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여러 조건들이 모여 비로소 ‘그 무엇’이라는 모습과 명칭이 탄생합니다. 그러므로 존재 일반은, 그러니까 어떤 ‘그것’은 ‘그것’의 ‘그것들’과 불가분의 유기체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이 ‘그것’을 아我라고 하고 ‘그것들’을 아소我所라고 말합니다. 아가 없으니 아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집이 없으니 주춧돌과 기둥과 서까래가 있을 수 없고, 몸이 없으니 눈, 귀, 코, 입, 피부가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관오음품觀五陰品」 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짚어 보겠습니다.  오음은 오온이라고 불립니다. 오온은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집합체입니다. 다섯 요소는 몸色, 감수작용受, 관념과 개념을 만들어 내는 작용相, 무엇을 표출하는 작용行, 인지하고 판단하는 작용識들을 말합니다.
 
이 오온의 개념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감각기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개인의 마음 작용입니다. 『중론』의 「관오음품」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한마디로 ‘그것’은 ‘그것들’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색色의 인因’을 떠난다면 색은 얻을 수 없다. 만을 색色을 떠난다면 ‘색의 인’은 얻을 수 없다.  「관오음품觀五陰品」           
     
먼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몸에 대해서 원인 없이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몸이라는 결과와 몸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존재 성립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여러 요소들이 모여 몸을 만든다는 단순한 상식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결과와 원인은, 본래 어떤 결과가 미리 있고 원인이 미리 있어 이 둘이 결합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와 원인은 동시적으로 성립하고 있으며, 그 ‘무엇’이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우리들의 사고를 해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둥과 지붕이 없으면 집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집’이라는 어떤 고정 불변적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 집이 없이 그저 놓인 잘 깎인 나무를 우리는 ‘기둥’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기둥이라는 어떤 고정 불변적 실체가 없음도 알게 됩니다.
 
이제 물질적 몸을 떠나서 정신에 대해서도 이런 맥락으로 짚어볼까요. 여기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좋은 느낌’은 좋은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들에 의존하여 만들어집니다.
 
오늘 아침 한 가정의 아빠가 생일을 맞았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가 정성이 듬뿍 담긴 긴 사연의 손 편지와 많은 종이학을 만들어 아빠에게 환하게 웃으며 드립니다. 아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습니다. 이때 ‘좋은 느낌’이 발생합니다.  아빠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담긴 편지와 종이학은 좋은 느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아빠가 벼랑 끝에 내몰린 어떤 사건이 있어 마음이 극심하게 불안하여 아이의 선물을 시선과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좋은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고마워’라고 말하고 생각은 당면한 사건에 머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편지와 종이학은 ‘좋은 느낌’의 원인 될 수가 없습니다.
 
또 반대로 ‘화’라고 하는 감정이나 행위들도 어떤 원인과 동시적으로 성립합니다. 결코 ‘화’라고 하는 불변의 실체가 미리 있어 여러 형태로 화를 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게 하는 조건 없이 ‘화’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한 ‘화’를 발생하지 않으면 ‘화’를 만드는 조건이라는 것도 ‘화의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이가 나를 소홀히 하는 시선과 태도에도 불쾌한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심한 비난과 모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이런 태도에 담대하고 무심하게 대하는 훈련을 통하여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무시와 비난과 모함은 ‘화의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사실의 가치와 판단의 가치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중론』 전반에서는 연기적 관계를 말하여 존재가 공空임을 말하고, 공하기 때문에 감정과 이성, 인식과 행위들의 허구적인 모습들을 해체하여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온갖 감정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우리는 특히 「관오음품」에서 희망을 얻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무엇이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합니까?                                
 
 
 
 
법인 스님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을 지냈다. 2000년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오늘날 템플스테이에 해당하는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불교계 최초로 열었다. 2009년부터 4년간 조계종 교육부장을 맡아 ‘백 년만의 변화’라는 승가교육개혁을 이끌었다. 현재 일지암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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