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철스님 : 노동자와 약자가 있는 곳이 나의 수행처

조계종 노동위원 도철 스님 : 노동자와 약자가 있는 곳이 나의 수행처

2016-01-13     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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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말 잘 못합니다.”
조계종 노동위원 도철 스님께 전화를 드리니 잠깐의 틈을 두고 들려온 목소리다. 이 짧은 말도 느렸다. 말을 잘 못해서 인터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답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그러하지만, 도철 스님은 더욱 그러했다. 작년 여름 광화문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32일간의 단식을 할 때에도 스님은 말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손가락으로 “왜 여기에 중이 나서냐?” 힐난하기도 한다. 응답하지 않는다. 세월호 아이들만 생각했다. 그뿐이다.

| 선방 수좌에서 노동위원으로
 
몇 번의 거절과 통화로 어렵게 경북 경산의 불광사로 찾아갔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작은 마당과 탑, 법당과 요사채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게 다였다. 가난한 절. 도철 스님이 주지로 있는 곳이다. 초하루 법회에 신도 10여 명이 찾는다. “절이 소박하다.”고 하자, 그냥 웃는다. 절의 실제 운영 규모가 알고 싶었다. 이럴 때는 대개 초파일에 절을 찾는 신도 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은 웃으며 “50명 정도요.” 했다. 지방에서 이 정도 규모면 겨우 절 살림을 할 수 있는 정도다. 거사 한 명과 스님. 두 명이 거주한다. 최저생계비 수준이다.

- 절 살림이 쉽지 않겠습니다.
“입에 풀칠만 합니다.(웃음)”
 
- 노동위원 활동하시면 회의나 집회 참석 때문에 절에 잘 머물지 못하겠습니다.
“작년에는 한 달 중 초하루 외에는 잘 오지 못했습니다. 여기는 잠자러 들어오는 것 같았죠.”(웃음)
 
- 신도님들이 불평하지 않나요? 스님이 절에 없다고.
“저 없을 때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 앞에서는 안 합니다.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다 부처님일인데요. 이번 조계사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피신 때에도 그러더군요. 스님, 서울 조계사가 시끄러운데 왜 티비에 안 나와요?(웃음)”
 
- 신도님들이 이제 익숙해졌군요. 한상균 위원장과 함께 있었나요?
“예. 조계사 관음전에서 함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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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철 스님은 조계종 노동위원이다. 지난 2012년 8월 27일 조계종 노동위원회 출범 때부터 맡았다. 그때 스님은 ‘법주사 수좌’였다. 교계에서는 노동위원 명단을 보고, 자못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수좌가 노동위원이라니. 그 때 스님은 계룡산 갑사 대자암 무문관에서 정진 중이었다. 마침 무문관 정진을 마치고 대자암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조계종에서 새로 출범하는 노동위원회 위원을 찾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스님에게 연락이 닿았다. 왜 스님일까? 더구나 수좌였다. 수좌는 세속 일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 것이 관례적이었다.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종단에서 노동위원회를 만든다고 해서요.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죠.”

- 왜 스님이었죠?

“아마도 제가 출가 전에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노동운동이요?
“아, 예, 이렇게 말하면 헌신적으로 노동운동하신 분들에게는 예의가 아니네요. 그냥 ‘잠시’ 했죠.”

스님은 90년부터 97년 출가 전까지 ‘잠시’ 철도청 노조활동 등 노동운동을 했다. 출가는 법주사로 했다. 출가 인연은 별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육식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절에 가면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청년 시절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막연히 절을 동경했다. 산을 좋아했다. 특별히 불교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97년 가을, 산에 올랐다. 문득 출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이 올라왔다. 그 길로 산을 내려와 곧바로 공중전화로 직장인 철도청에 전화했다. “나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 길로 바로 법주사로 갔다. 서른여섯이다.
 
- 왜 노동위원이 되셨죠?

“특별한 것은 없어요.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종단에서 일하는 분이 과거 노동운동 시절 인연으로 저를 추천했어요. 전화 받고 그러마, 했습니다.”

- 출가 전에 노동운동을 보는 것과 출가수행자로 노동운동을 보는 것이 차이가 있나요?

“음…. 많이 달라졌죠. 관점 자체가. 시각이 좀 더 깊어졌다고 할까요. 노동운동이 시대에 맞게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대로 있는 것 같아서 좀 아쉽죠. 90년대의 정서가 그대로 현재에 나타나기도 하고요. 노동 현실도 그대로죠.”
 

| 세월호와 32일간의 단식
- 출가 수행자가 세속 일에 너무 나서지 않느냐?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음…. 그럼,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것이 수행자인가요? 제가 하는 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일)이 보살행이라고까지 말하지는 못하지만, 수행하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수행자는 타인을 위해 마음을 적극 내야 합니다. 온 생명에 대해 마음을 내야죠. 최소한 가족 울타리 밖으로 마음을 내야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죠. 이것밖에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죠. 더 많은 생명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요.”
 
- 공부 제대로 하고 세속 일에 관여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부한 만큼 바라밀행을 해야 합니다. 저는 공부가 덜 돼서 사실 부끄러울 정도만 합니다. 우리 스님들이 공부한 만큼 바라밀행을 했으면 합니다.”
 
- 그것은 신도들도 마찬가지겠죠.
“그것은 스님들이 반성할 문제죠. 신도들 문제가 아닙니다. 음…. 스님들이 노동이나 빈곤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 왜 관심이 없죠?
“노동문제든, 빈곤문제든 그분들과 이야기하고 그분들의 생활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라요. 그러니까 대화가 안 되죠. 음… 심각해요.”
 
- 관심을 가질 만한 계기가 없는 것 아닐까요?
“스님들이 출가 이후에 많이 변하더군요.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한번 바뀌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신도, 내 절을 생각하니까요. 한번 목마른 사람이 갈증이 해소 안 되니까 계속 물을 찾는 것처럼요.”
 
- 왜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까요?
“발심이 문제죠. 불교는 발심에서 시작하니까요. 저는 그렇게 봐요. 지금 저의 행동은 발심하는 과정으로 보시면 됩니다. 아직 발심의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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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스님은 서울 광화문에서 32일간 단식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가 한창 논란으로 떠오를 때였다. 세상은 약자에게 가혹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은 수많은 약자들이 닦아줬다. 정부는 보상금을 이야기했다. 세월호 유족들이 할 수 있는 항의는 단식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의 가장 근본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이를 스스로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이다. 보상금 운운하는 것은 이 존엄을 훼손하는 일. 세월호 유족들은 존엄을 위해 단식에 들어갔다. 도철 스님에게 전화가 왔다. 조계종 노동위원회 양한웅 집행위원장 전화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유가족들이 단식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였다. “스님,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단식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러마, 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에서 바로 단식에 들어갔다. 가족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단식을 하는 유가족의 마음에 100분의 1, 1000분의 1이라도 의지가 되고, 최소한의 정신적 힘을 보태자는 마음이었다. 32일간의 단식을 풀었지만, 세월호 유가족 유영호 씨는 계속 단식했다. 스님이 단식을 마친 날, 유영호 씨는 스님께 감사의 합장을 올렸다. 그 합장이 아팠다. 미안했다.

“단식하는데 광화문 광장에서 가수 김장훈이 ‘거위의 꿈’을 부르고 있었어요. 어린 학생들이 꿈을 채 펴보기도 전에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왜 이렇게 감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국민적인 관심을 멀어지게 하려고 하고요. 보상금이 얼마니 하는 것만 알리고….”

- 노동위원이 왜 세월호 문제에 동참하시는지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노동문제는 약자의 문제고, 사회 문제죠. 세월호도 그렇습니다. 노동의 의미를 넓게 봐야합니다.”

- 스님 32일 동안 단식하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보다 좀 더 수행과 법납이 높은 분이 노동자와 세월호 분들과 같이 단식했다면 더 불교계에 영향을 주었을 텐데요. 저야 함께 하자고 하니까 했죠. 옳은 길이니까요.”
 

| 조계사, 그리고 한상균

지난 11월 16일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로 피신했다. 조계종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조계종 노동위원 도철 스님께도 연락이 왔다. 서울로 올라와 조계사 관음전에서 한상균 위원장을 만났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그가 몸을 의탁한 방은 조계사의 배려로 조계종 노동위원 도철 스님에게 내준 바로 그 방이다. 도철 스님은 한 위원장 옆방에 머물렀다.

- 조계사에서 한상균 위원장이 떠나는 전날 함께 계셨죠.

“예. 그렇죠.”

-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는 약자를 보호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지난 12월 10일 오전 한 위원장이 조계사 관음전을 나오는 시간에 도철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전날까지 함께 있었고,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함께 보이지 않은 것이 의문이었다.

- 한상균 위원장이 나오는 날 스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

- 어디에 계셨죠?

“그냥 관음전에 있었습니다.”

- 왜죠?

“나가는 것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죠. 노동자들이 분노와 울분에 차 있었는데, 그것을 알면서, 조계사 나가는 것에 함께할 수 없었어요.”

- 한상균 위원장은 심경은 어떠했나요?

“조계사에서 자진 출두하는 것은 혼자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함께 논의해야 했죠. 한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출두 전날 밤에 이미 개인적으로 결정한 것 같아요.
 
- 스님께서는 어떤 심경이었나요?
 
“언론에서 한상균 위원장을 한 개인으로 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한 위원장이 조계사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혼자가 아니라, 민주노총장의 자격으로 들어왔으니까요. 또 불자인 한 위원장을 한 명의 신도로 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조계사와 신도회도 이해됐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각도 있을 수 있죠. 전체를 다 봤으면 하는 바람이죠.”
 
- 화쟁위원회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인가요?
 
“화쟁위원회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봅니다. 아쉬운 점은 예를 들면 평화시위를 해야 한다, 화쟁위원회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문제로 볼 때는 평화시위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노동개악의 문제와 노동자의 고통, 백남기 농부의 문제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함께 풀어갔으면 좋았겠지만, 안되었죠.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노동위원으로서 또 개인적으로도 안타까웠습니다.”
 
- 어떤 안타까움이었죠.
 
“우리 종단에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처럼, 나를 밟고 가라. 이런 분이 있었으면 합니다.”
조계사 관음전 안에는 한상균 위원장 옆에 민주노총 실무국장이 함께 있었는데, 이 분도 불자였다. 도철 스님은 이 실무국장이 한 말이 가장 아팠다. “스님, 저는 조계사를 나가더라도 스님들과 함께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신부님과 같이 나가겠습니다.” 감정이 차오른 상태의 발언이었지만, 아팠다. 도철 스님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스님은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이야기를 했다. 몇 번 같은 주제를 다르게 질문해야 겨우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부끄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착하고, 노력하면서 살았는데, 나는 왜 해고됐고, 왜 이렇게 삶이 고달픈가? 이런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이렇게 답합니다. 전생의 업 때문이다. 이렇게 할 이야기가 아니죠.”
 
- 앞으로 불교계가 어떻게 노동 문제를 접근하면 좋을까요?
 
“교계에 사회적 약자에 대해 공감하고, 함께 하고 쉴 수 있는 공간, 이런 것이 거의 없습니다. 스님들도 이것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감상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불교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또 사회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해집니다.”
 
글. 김성동 / 사진. 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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