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들을 살아있는 ‘불꽃’으로 마음에 품고 산 20년

빛을 더하는 사람들

2007-06-26     천미희

1987년 1월 대공분실 509호. 어두운 복도 끝 작은 방에서 고문 끝에 숨진 고(故) 박종철 열사. 그의 아버지 박정기(78세) 씨를 만났다. 아들을 잃은 지 20년을 맞이한 올해, ‘박종철 20주기’ 추모재며 기념식에 참석하느라 그는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들의 49재로 인연이 돼 20년째 추모재를 지내고 있는 통도사 성전암(주지 백우)에서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만났다.

슬픔을 거름 삼아 키워온 삶의 희망

덜컥 겁부터 났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를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부터 자식을 보낸 ‘늙은’ 아버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 아버지는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버린 열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추억하고 기리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다.

그뿐 아니라 아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따라 한발 한발 걸어오며 ‘투사’로 거듭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마음은 그저 ‘죽은 아들’을 둔 슬픈 아버지의 상처를 다시 들추어야 하는 가슴 무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아버지는 담담하게 아들 얘기를 했다. 슬퍼 보이기보다는 조금 피곤해보였다. 얼마 전 성전암에 다녀간 후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그렇게 독한 감기는 처음”이라며 웃는 아버지를 보며, 20주기를 맞아 어느 때보다 먼저 간 아들에 대한 기억을 자주 떠올려야 했던 아버지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졌다.

“종철이의 죽음이 화려하게 위로받거나 알려지는, 그런 것들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생이 아닌 저생에서라도 행복한 종철이의 삶을 축원하고 바라는 일을 20년째 해왔을 뿐입니다.” 크고 거창한 구호 아래 민주화를 외쳐온 이들은 박종철 열사를 운동권으로 기억하겠지만, 아버지에게 아들 박종철은 착하고 말 잘 듣는 아들이었고,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던 따뜻한 아들이었다. 지금도 아들의 책상 위에는 중3 때 계명암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아들의 사진이 올려져 있다. 23살의 나이로 성장을 멈춘 아들은 아버지 가슴 속에서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
“지금 살았으면 43살이네요. 30~40년이 흘러서 서로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볼 때면 저들이 조금만 가혹하지 않았다면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텐데,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가족에게 위로가 되고, 하고자 했던 일을 어느 정도 정리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너 왜 그러냐’는 말을 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착했던 아들의 죽음이 못내 안타깝다. 아들이 죽은 이후 민주화실천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20년 동안 이끌면서, 혹은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죽을힘을 다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한생각으로 버텨왔다.

유가협 쉼터를 만들고,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는 아들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고 자신과 같은 슬픈 유가족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아버지는 살아있음의 ‘힘’과 ‘희망’을, 아들의 죽음과 그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슬픔을 거름 삼아 키워왔다.

“처음엔 너무 너무 힘들었어요. 표현으로나 양으로나 당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러나 일을 당하면 못할 일이 없어요.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그때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인내를 가져야 하잖아요. 세월이 흐르면 착한 것은 착한 대로, 착하지 못한 것은 못한 것대로 가다듬어진다는 인과의 도리로 정리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되찾은 미소

아들을 잃고 비통함에 빠져있던 아버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성전암 백우 스님의 위로였다. 부산불교거사림회가 매월 열었던 법회를 6~7년째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정도로 신심이 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그리울 때면 아들의 49재를 지낸 성전암을 찾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했다.

“직접 내 앞에 문제가 닥치니 심정이 달래지지가 않았고 무작정 스님의 좋은 말씀에 매달렸지요. 스님의 귀한 법문을 새기고 보니 나고 죽고 병드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만 영생은 있다는 겁니다. 한 생명체만의 영생이 아니라 생명체에서 생명체로 이어지는 영생이죠. 종철이라는 한 존재의 형태가 오래 오래 있다는 것의 영생이 아니라, 그의 뜻이 귀착돼 있으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살면서 실천해 내면 그 생명이 영원을 누리는 것이지요. 난 민주화가 되나 안 되나 하는 감시자의 입장이 아니라, 아들이 행복한 영생을 누리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을 뿐입니다.”

착한 막내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요즘 부쩍 염불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독경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에 조금 더 근접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비친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던 백우 스님은 “내 말이 무슨 위로가 되었겠느냐”며 “다만 마음 가운데 자리한 불심이 있어 어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도 닦을 마음을 낸 것이고, 그 어려운 시절을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넘겨온 것”이라고 했다. 특히 스님은 “종철이의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자기 일신도 감당 못하는 이들도 많은데 종철이는 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해지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이 시절이 있게 된 것이니 고맙고 미안할 뿐”이라며 살아남은 이들의 몫을 강조했다.

“부처님 앞에 조아리는 불자들의 생활은 부처님 등불 아래 빛을 수호하면서 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이 되겠다는 발원이 담겨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웃을 돌아보고, 이웃의 어려움을 내 몸의 어려움처럼 느끼고 물질뿐 아니라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양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들려준 불제자의 길은 피폐한 농촌의 실상을 마음 아파했던 아들, 책이 없는 후배의 책을 선뜻 사주고 구속된 후배에게 한 벌뿐인 겨울 외투를 벗어주는 등 늘 남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해서 ‘운동권의 자선가’로 통했던 아들이 살고 싶어 했던 삶이었다. 또한 아들을 가슴에 묻고 아버지가 걸어온 길도 부처님의 등불을 지키는 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의 길이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20년 전 아들의 유골을 강에 뿌리며 말을 잃었던, 그 아버지가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있다. 그 말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막내아들을 대신해 살아야 할 그의 또 다른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어둡고 추웠던 시절을 녹이는 뜨거운 불씨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뜨거운 가슴을 우리가 안고 살아야 하기에….

오월의 햇살 아래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따뜻하게 안아보지도 못하고 돌아서는데 사방에 터져 나온 새순이 눈에 시렸다.

취재정리·사진 |천미희(1000gongs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