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

2015-12-10     박상준

특집 :  참회 ! 나를 사랑하고 넘어가라

1. 보현행원품 참회분   / 광덕 스님
2.
지리산 홍서원 정봉 스님 인터뷰 : 진실한 참회는 타협할 수 없다  / 하정혜
3. 혜룡 스님의 반야참회 수행모임 : 반야참회, 사유하고 참회하라   /  조혜영
4.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   /  박상준

 

『화엄경』 「보현행원품」 ‘참회분’에는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과거 무시겁중에 탐진치로 인해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모든 악업이 한량없고 끝도 없으니, 만약 이런 악업이 모양이 있다면 허공도 그것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라며 참회의 한량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본래 마음이 자성청정하다는 것을 경전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회가 자기를 책망하는 죄책감이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밝고 청정한 본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참회를 통해 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나조차 넘어갈 수 있도록 자비심을 높이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살게 됩니다.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문」은 우리 불자들에게 이러한 대승의 지혜와 자비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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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依法界始遊行者 於四威儀無一唐遊
법계에 의지해서 처음으로 수행의 
유람에 나선 사람은 행주좌와 사위의에서 
한 가지도 허투루 유람해서는 안 됩니다. 
 
念諸佛不思議德 常思實相朽銷業障
항상 제불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사념하고 
늘 실상을 생각하면서 업장을 
녹여 없애야 합니다. 
 
普爲六道無邊衆生 歸命十方無量諸佛
두루두루 육도의 가이없는 중생을 위하여 
시방의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 
귀명해야 합니다. 
 
諸佛不異而亦非一 一卽一切一切卽一
모든 부처님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습니다. 
한 분이 모든 분이기도 하고 모든 분이 
한 분이기도 합니다. 
 
雖無所住而無不住 雖無所爲而無不爲
머무는 곳도 없지만 머물지 않는 곳도 없으며, 
하는 일도 없지만 하지 않는 일도 없습니다. 
 
一一相好一一毛孔 遍無邊界盡未來際
하나하나의 상호와 하나하나의 모공이 
무변법계에 두루해 있으며 미래의 즈음이 
다하도록 
 
無障無礙無有差別 敎化衆生無有休息
걸림도 없고 차별도 없이 중생을 교화하시면서 
휴식을 취함이 없습니다. 
 
所以者何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十方三世一塵一念 生死涅槃無二無別  
시방삼세가 한 티끌이고 한 찰나이며, 
생사와 열반이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大悲般若不取不捨 以得不共法相應故
그러므로 대비와 반야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불공법과 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今於此處蓮花藏界  盧舍那佛坐蓮花臺
지금 이곳 연화장 세계에 노사나 부처님이 
연화대에 좌정하시어 
 
放無邊光  集無量衆生  轉無所轉大乘法輪
가이없는 광명을 뿜어내면서 한량없는 중생을 
모아놓고 굴릴 것 없는 대승의 법륜을 굴리고 
계시며 
 
菩薩大衆遍滿虛空  受無所受大乘法樂 
보살 대중들은 허공을 가득 메우고 받을 것 없는 대승의 법락을 받고 있습니다. 
 
而今我等同在於此  一實三寶無過之處
그런데 우리들은 똑같이 일실삼보의 
허물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도
 
不見不聞如聾如盲  無有佛性  何爲如是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이 
귀머거리와 같고 맹인과 같습니다. 불성이 없어져버린 것이 무엇 때문에 이와 같단 말입니까. 
 
無明顚倒妄作外塵 執我我所造種種業 
自以覆弊不得見聞
왜냐하면 무명 때문에 전도되어 허망하게 
외부 대상경계를 만들어 놓고 아我와 아소我所에 
집착하여 가지가지 업을 지으면서 제 스스로 
뒤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猶如餓鬼臨河見火
비유하면 마치 아귀가 강가에 다다라도 불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故今佛前深生慙愧  發菩提心誠心懺悔
그러므로 지금 부처님 앞에서 깊이 
참괴심을 내고 보리심을 일으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참회해야 합니다. 
 
我及衆生無始以來無明所醉  作罪無量 
저와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무명에 취하는 
바람에 한량없는 죄를 지어서 
 
五逆十惡無所不造 自作敎他見作隨喜 
오역죄와 십악죄를 짓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자신이 직접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짓기도 하고, 죄짓는 것을 보고 
좋아하기도 하였습니다.
 
如是衆罪不可稱數  諸佛賢聖之所證知 
이와 같은 뭇 죄는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불현성께서 증명해서 알아주십시오. 
 
已作之罪深生慙愧  所未作者更不敢作
이미 지은 죄는 깊이 참괴심을 내고 아직 
짓지 않은 죄는 감히 다시는 짓지 않겠습니다. 
 
此諸罪實無所有 衆緣和合假名爲業
이 모든 죄는 실은 있는 것이 아니니,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해있는 것을 임시로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卽緣無業離緣亦無 非內非外不在中間
인연 자체에도 업은 없고 인연을 떠나서도 
업은 없습니다.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있지도 않습니다. 
 
過去已滅 未來未生現在無住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물러주지 않습니다.
 
故所作以其無住故亦無生 
그러므로 죄는 머무는 것도 아니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先有非生先無誰生
애초에 있었다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애초에 
없었다면 무엇이 생겨나겠습니까. 
 
若言本無及與今有 二義和合名爲生者 
만약 본래는 없었는데 지금 있는 것이라면 
두 가지 의미를 합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當本無時卽無今有 當今有時非有本無 
본래 없는 것이라면 지금 있을 수 없고, 
지금 있다면 본래 없는 것이 아닙니다. 
 
先後不及有無不合 二義無合何處有生
따라서 먼저다 나중이다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고, 있다 없다 하는 개념으로 
합치시킬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합치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 
생겨나겠습니까.
 
合義旣壞散亦不成 不合不散非有非無 
합치되는 의미가 무너져버리면 흩어진다는 
의미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합해지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無時無有對何爲無 有時無無待誰爲有
없을 때에는 있다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상대해서 없다고 하겠으며, 있을 때에는 없다는 것 없는데 무엇을 상대해서 있다고 하겠습니까. 
 
先後有無皆不得成 當知業性本來無生 
선후先後와 유무有無가 모두 성립될 수 없으니, 
업의 성품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從本以來不得有生 當於何處得有無生
그러나 종본이래로 생겨남이 없는데 어느 곳에 
‘생겨남이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有生無生俱不可得 言不可得亦不可得
생겨남이 있느니 생겨남이 없느니 하는 것 
모두가 파악될 수 없으며, 파악될 수 없다는 
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業性如是諸佛亦爾
업의 성품도 이와 같고 모든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如經說言
경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譬如衆生造作諸業 若善若惡 非內非外
“비유하면 중생이 모든 업을 짓는 것과 같은데 
선업이거나 악업이거나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如是業性非有非無 亦復如是 本無今有非無因生
이와 같은 업의 성품도 마찬가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본래 없었는데 
지금 있다면 원인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無作無受 時節和合故得果報
지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지만, 시절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것이다.”
 
行者若能數數思惟如是實相 而懺悔者
수행자가 만약에 이와 같은 실상을 자주자주 
사유하면서 참회할 수 있다면 
 
四重五逆無所能爲 猶如虛空不爲火燒
사바라이죄와 오역죄도 그를 어찌해볼 수 
없으니, 허공이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如其放逸無慙無愧 不能思惟業實相者 
그러나 만약 방일하면서 참괴심을 내지도 않고 
업의 실상을 사유하지 않으면 
 
雖無罪性將入泥梨 猶如幻虎還呑幻師
죄의 성품이 없다 해도 장차 니리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마치 허깨비 호랑이가 도리어 
마술사를 잡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是故當於十方佛前 深生慙愧而作懺悔
이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 앞에 깊이 
참괴심을 내어 참회해야 합니다. 
 
作是悔時莫以爲作 卽應思惟懺悔實相
이렇게 참회할 때는 조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참회의 실상을 사유해야 합니다. 
 
所悔之罪旣無所有 云何得有能懺悔者 
참회의 대상인 죄가 이미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참회하는 주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能悔所悔皆不可得 當於何處得有悔法
참회하는 주체와 참회의 대상을 얻을 수 없는데 
어느 곳에서 참회하는 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於諸業障作是悔已 亦應懺悔六情放逸 
모든 업장에 대해서 이와 같이 참회하고 나서 
육정이 방일한 것에 대해서도 참회해야 합니다. 
 
我及衆生無始已來 不解諸法本來無生
저와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제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妄想顚倒計我我所 內立六情依而生識 
外作六塵執爲實有 
허망한 생각으로 전도되어 아와 아소를 
헤아리면서 안으로 육정을 세우고 여기에 
의지해서 식을 일으켜 외부에 육진경계를 만들어놓고 실재로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였습니다. 
 
不知皆是自心所作 如幻如夢永無所有 
이 모두가 제 마음이 조작한 것이므로 
허깨비 같고 꿈같은 것이어서 아예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於中橫計男女等相 起諸煩惱 自以纏縛
이 가운데서 남녀 등의 차별상을 
어지럽게 헤아리면서 모든 번뇌를 일으켜 
제 스스로를 꽁꽁 얽어맸습니다. 
 
長沒苦海不求出要 靜慮之時甚可怪哉 
그리하여 고해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빠져나가는 중요 포인트를 찾지 않고 있습니다. 
고요히 생각해 볼 때 심히 괴이한 일입니다. 
 
猶如眠時睡蓋覆心 妄見己身大水所漂  
비유하면 잠을 잘 때 잠이 마음을 덮어버리는 
바람에 허망하게 자기 몸이 큰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不知但是夢心所作 謂實流溺生大怖懅
꿈속의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임을 알지 못하고 
진짜로 흘러가다가 빠진다고 여겨서 
크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未覺之時 更作異夢 謂我所見 是夢非實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 다시 다른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가 보는 것은 
꿈이지 실재로 있는 일이 아닙니다. 
 
心性聰故夢內之夢 卽於其溺不生其懅
심성이 총명한 사람은 꿈속에서 꿈꾸는 것인 줄
알아차리고 물에 빠질 때 거기에 대해서 
겁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而未能知身臥床上 動頭搖手勤求永覺
그러나 몸이 침상위에 누워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를 뒤흔들고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합니다. 
 
永覺之時追緣前夢 水與流身皆無所有 
唯見本來靜臥於床
완전히 깨어나서 앞에서 꾼 꿈을 반추해보면 
큰물과 떠내려가던 몸이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 침상에 고요하게 누워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長夢亦爾
생사윤회의 긴 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無明覆心妄作六道 流轉八苦
무명 때문에 허망하게 육도를 만들어놓고 팔고의 세계에 떠내려가고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內因諸佛不思議薰 外依諸佛大悲願力 髣髴信解
그러므로 안으로는 제불의 불가사의한 훈습의 
힘을 의지하고 밖으로 제불의 대비원력을 
의지해야만 믿어지고 실감나게 이해하게 됩니다. 
 
我及衆生 唯寢長夢妄計爲實 違順六塵男女二相 
나와 중생들이 침상에서 긴 꿈에 들어가 
허망하게 실재로 있는 것이라고 헤아리면서 
육진경계를 따르기도 하고 거스르기도 하며 
남녀의 두 가지 상을 내고 있는 것이 
 
並是我夢 永無實事 何所憂喜何所貪瞋
모두 내가 꿈을 꾸는 것이어서 실재로 있는 일은 아예 없으니 무엇을 근심하고 기뻐하겠으며 
무엇을 탐하고 무엇에 성내겠습니까. 
 
數數思惟 如是夢觀 漸漸修得如夢三昧
이와 같은 ‘꿈 바라보기’를 자주자주 사유하면 
점차적으로 여몽삼매를 닦아서 얻게 됩니다. 
 
由此三昧得無生忍 從於長夢豁然而覺
이 삼매를 의지해서 무생법인을 얻으면 
긴 꿈에서 활연히 깨어나 
 
卽知本來永無流轉 但是一心臥一如床
생사에 유전함이 본래 없고 단지 일심이 일여一如의 침상에 누워있을 뿐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若離能如是 數數思惟 雖緣六塵不以爲實 
煩惱羞愧不能自逸 
만약 이와 같이 벗어나서 자주자주 
사유할 수 있다면 육진경계를 반연하더라도 
실재로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제 스스로 방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是名大乘六情懺悔
이것을 ‘대승육정참회’라고 합니다.                    
 
 
박상준
동국대학교 역경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실장이다. 고전 연구와 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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