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공空(9) 공과 화두

2015-12-10     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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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론, 번뇌의 근본 원인
‘나와 남’ 이외에도 우리는 무수한 이원대립의 틀을 가지고 있다. ‘유有와 무無’ ‘생과 멸’ ‘좋음과 싫음’ ‘선과 악’ ‘동지와 적’ ‘득과 실’ ‘부와 빈’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원대립의 틀에 의해 세상은 무수하게 갈라져 고착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갈라진 어느 한 쪽에 서기를 강요받기도 하고, 본인 스스로도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되어 간다.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어떠하며, 이렇게 갈라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세상이 본래부터 갈라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인연(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갈라지지만 갈라진 흔적이 남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연못의 물을 막대기로 선을 그어 둘로 갈라놓는다고 해도 물은 갈라짐이 없는 것과 같다. 갈라짐이 없이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에 따라 가를 수는 있지만 갈라진 것에 집착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갈라도 갈라진 것은 없기 때문에.
 
세상을 ‘길다와 짧다’의 이원대립으로 볼 경우 사람들은 분필을 ‘짧다’의 영역에 배속시킬 것이다. 분필 자체가 짧은 것이기 때문에 짧은 것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짧은 쪽에 계속 고정시킬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하지만 지난 11월호에서 살펴본 대로 분필 자체는 길지도 짧지도 않다(=공). 불교에서는 길지도 짧지도 않다고 해서 분필에 대해 침묵만 지켜야 된다고는 하지 않는다. 분필이 호박씨와 비교될 때는 “길다”라고 하고, 대나무와 비교될 때는 “짧다”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연기). 이렇게 분필을 ‘길다’라고도 ‘짧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분필 자체가 길지도 짧지도 않기 때문이다(연기=공). 만약 분필이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분필은 결코 긴 것이 됨과 동시에 짧은 것이 될 수 없다.
 
분필은 어느 쪽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길다고 해도 ‘길지 않은 길다’이며 짧다고 해도 ‘짧지 않은 짧다’이다. 분필을 길다거나 짧다고 아무리 갈라도 분필은 갈라진 바가 없다. 관건은 분필을 바라보는 나 자신에게 있다. 길거나 짧다고 말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얼마나 그것에 집착함이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여기서 용수의 『중론』 제18장 「관법품」 제5송의 내용에 귀를 기울여 보자.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分別에서 생겨나고, 분별은 희론戱論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희론은 공空에서 소멸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과정을 ‘혹惑→업業→고苦’의 세 단계로 설명한다. 혹惑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고, 업은 우리들이 하는 신체적 행동ㆍ말ㆍ생각을 가리킨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로 업을 일으키면, 이 업에 의해 중생들은 윤회하면서 온갖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뇌와 업은 왜 생겨나고 어떻게 해야 소멸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이 위에 인용한 『중론』 게송에 그대로 나와 있다. 즉 희론에 의해 분별이 생기고, 이 분별 때문에 업과 번뇌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업과 번뇌로 인해 모든 괴로움이 생겨나니 결국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희론이다. 희론이 소멸되면 분별이 소멸하고, 그때 업과 번뇌도 소멸하여 모든 괴로움이 종식을 고하는 해탈이 있다. 그런데 이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먼저 번뇌와 고의 근본 원인인 희론에 대해 알아보자. 희론(戱論, prapañca)이란 ‘말(언어)에 의한 대상의 개념화와 그에 대한 집착’ 또는 ‘그러한 오류를 야기하는 말이나 개념 그 자체’를 가리킨다. 지난 11월호에서 언어 이전의 세계는 아무런 구분이 없으며,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은 다른 것과 구분되어 존재하게 된다고 했다. 말은 곧 개념이다.
 
말에 의해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존재는 하지만, 그것은 말의 작용일 뿐 진실은 그것과 관계가 없다. 요강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것은 요강이 된다. 요강이라 불려 요강의 작용을 하면서 요강으로 존재하지만 그것 자체가 원래 요강인 것은 아니다. 그것에 양념을 넣으면 그것은 요강이 아니라 양념 단지다. 흙을 넣고 난초를 키우면 화분이고, 맑은 물을 붓고 금붕어를 살게 하면 어항이다.(2015년 9월호 참조) 그것은 어느 무엇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 즉 공空이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어떤 것이라 불려서 그것(色)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말이나 개념에 의해 그렇게 성립되어 있을 뿐이라고 보지 않고, 말 그대로 개념 그대로 실제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집착한다. ‘요강’이라 불려서 요강이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요강이기 때문에 ‘요강’이라 불린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중생인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와 같이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이미 이름 그대로 확고부동하게 있던 ‘진실’로 탈바꿈되고 만다. 다시 말해 이름이 자성으로 오인되고 만다.
 
이와 같이 말이 의미하는 그대로의 존재가 실제로 있다는 오인을 동반한 개념화 작용 또는 그런 오인을 야기하는 말이나 개념을 희론이라 한다. 무엇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는 눈앞의 저것을 ‘요강’이라고 불러서 부동의 요강으로 집착하거나, 그런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요강’이라는 말이 곧 희론이다. 
 
따라서 희론은 말이 보여 주는 그대로 실제로 그러하다고 착각하는 ‘말(개념)에 의한 허구화’라고도 할 수 있고, 말에 끌려 다니는 ‘말에 속박 당함’ 또는 ‘말에 대한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그런 허구화와 속박을 야기하는 말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세상이 ‘나와 남’ 등으로 갈라진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나와 남이라는 별개의 독특한 본질을 가진 고정불변의 존재, 즉 나라는 자성을 가진 존재와 남이라는 자성을 가진 존재가 있어서 갈라진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나와 남이라는 언제나 둘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념(=말)과 남이라는 개념의 차이에 의해 갈라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두 개념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관계에 있다. 나라는 개념이 없으면 남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서두에서 언급한 ‘나와 남’ ‘유와 무’ ‘동지와 적’ 등의 이원대립에 대한 생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원대립은 두 개의 서로 배타적인 요소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고정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 요소의 진실한 모습은 서로 배타적인 실재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개념이므로 ‘이원대립’은 ‘상호의존적인 두 개념의 임시적 설정’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후자가 희론의 작용에 의해 전자인 이원대립으로 착각되고 만 것이다. 
 
희론에 의해 말(=개념)은 우리의 생각과 생활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요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는 용변만 보아야지 양념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라 불리는 직책의 사람에게는 특정의 대우를 해 주기를 요구 받는다. 또한 말에 의해 세상은 ‘동양과 서양’ ‘관찰자와 대상’ ‘선과 악’ 등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어 세계는 질서를 잡아 간다. 우리는 말에 의해 질서화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말(개념)에 의한 것이지 세계가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말의 허구(희론)를 초월한 불멸의 부처를 말로써 허구화하는 그들 모두는 말의 허구에 손상 받아 여래를 보지 못한다(『중론』 제22장 제15송, DE JONG 교수의 교정본에 의거)”라는 게송이 시사하듯이, 말이 주인 행세를 하면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말의 속박인 희론에서 자유롭게 될 때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해탈이 있다.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 오랜 언어습관을 통하여 말이 가리키는 사물에 말이 의미하는 그대로 고정불변의 무엇, 즉 자성이 있다고 보는 습성을 부지불식간에 지니고 말았다. ‘요강’이라 불리는 것은 원래부터 요강이며 영원토록 요강이라고 보는 습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습성이 곧 희론이다. 원래부터도 요강이고 영원토록 요강인 요강, 즉 자성으로서의 요강이란 없으며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공이다. 공은 말이 의미하는 바대로 세계와 사물이 실제로 그렇다고 보면 큰 착각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따라서 희론이 공에서 소멸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분별(分別, vikalpa)은 희론에 근거한 사고와 판단을 말한다. 사물을 말로 나누어서(=分) 나누어진 그대로 사물이 별개로 있다고 보는(=別) 집착 하에서 일어나는 사고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 색즉시공과 무자 화두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은 곧 공이다’에서 색의 자리에는 다른 어떤 것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 ‘나는 곧 공이다’ ‘너는 곧 공이다’ ‘좋다는 곧 공이다’ ‘싫다는 곧 공이다’ 등. 깨달은 사람에게 ‘색은 곧 공이다’는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나고 너는 절대로 너다’라든가 ‘좋은 것은 절대로 좋은 것이고 싫은 것은 절대로 싫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희론과 분별에 붙들려 있는 우리에게 ‘색은 곧 공이다’는 말은 ‘나는 나가 아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색은 곧 공이다’는 기존에 알고 있던 바대로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다. 이것은 곧 기존의 나가 죽는 것이요, 기존의 너가 죽는 것이다. 희론에 물든 ‘나’라는 말이 발붙일 곳을 상실하는 것이요, ‘너’라는 말이 발붙일 곳을 상실하는 것이다. 모든 이원대립은 흔적도 없이 해체되어 버린다. ‘색은 곧 공이다’에서 우리는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모든 얻은 바가 없어져 고요하고 말의 허구(희론)가 흔적도 없어 길상하네.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부처는 어떤 법도 설하고 계시지 않다”는 『중론』 제25장 제24송(DE JONG 교수의 교정본에 의거)의 내용은 ‘색은 곧 공이다’의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중생인 우리가 ‘색은 곧 공이다’를 체득해 가는 과정이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이다. 유명한 무자無字 화두를 예로 들어 보자.
 
한 승이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무無.”
 
조주 선사가 말한 이 무無에 대해 오조 법연(五祖法演, ?-1104) 선사는 법상에서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군들! 그대들은 평소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는 평소 무자無字를 들 뿐, 그것으로 끝이다. 그대들이 이 무無 한 자를 뚫을 수 있다면 천하의 누구도 그대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대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무無를 뚫을 것인가? 뚫은 자가 있는가?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 
 
나는 그대들이 이 무無에 대해 유有라고 대답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무無라고 대답하는 것도 바라지 않으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만 마치겠다. 듣느라고 수고 많았다.
 
조주 선사가 말한 무無에는 ‘유有’도 ‘무無’도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도 발붙일 곳이 없다. 조주 선사의 무는 희론의 테두리에 갇힌, 유有와 무無를 비롯한 기존의 어떤 말로도 뚫을 수 없다. 유와 무의 이원대립으로는 더더구나 어림도 없다. 
 
이 무자 화두를 드는 중에 기존의 유도 죽고 무도 죽는다. 공에서 희론이 소멸하듯이 화두 삼매 속에서 희론은 소멸한다. 화두 참구를 통해 공은 내 몸이 되어 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허구와 집착의 때가 묻은 말(이때의 말은 세계와 같은 뜻이다)에서 해방되어 ‘색은 곧 공이다’의 세계, 곧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세상은 말에 의해 움직이고 말에 의해 질서화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의 허구(희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이 현실을 완전히 떠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현실에서 말의 허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그곳에서는 죽었던 유와 무가 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진리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풍광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하지만 우리 중생에게는 ‘색즉시공’이 없이는 ‘공즉시색’도 없다. 공즉시색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이야기하겠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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