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통신] 깨달음은 현실 사회의 고苦를 해결할 수 있는가

2015-11-06     김성동

● 고故 조영래 변호사(1947~1990)는 룸비니회와 서울대 법대 불교학생회 출신이다.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이 영민한 청년은 70~80년대 격렬한 사회참여로 투옥과 수배와 도피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불교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중생이 병들었기에 내가 병들었다는 유마힐 거사를 떠올렸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청규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서울대 법대 선배였던 휴암 스님(1941~1997)을 찾아왔다. 휴암 스님은 당시 수좌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던 선승이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오랫동안 고민했던 조영래는 불교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랐다.

● 그런 그가 형님으로 모셨던 휴암 스님을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형님, 개인의 수행과 전체 사회를 개혁하는 길을 동시에 겸비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많은 고뇌가 응축된 물음이었다. 그의 고된 행적을 알고 있었기에 휴암 스님은 어떤 대답을 쉽게 해줄 수 없었다. 스님의 답은 “활동하면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적인 범부인간의 위상이다.”(『장군죽비』, 1994)는 것이다. 이 말을 심성 맑은 그에게 해줄 수 없었다. 조영래는 사회변화의 전위에 서 있었고, 깨달음은 그에게 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영래 변호사가 44세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휴암 스님은 “그가 내게 던졌던 물음이 나의 가슴을 한없이 저리게 함을 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에 대한 논쟁이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 등으로 전개된 것은 중요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쉽다. 그 글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깨달음으로 어떻게 역사에 개입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는 다른 차원의 영역임을 말했다. 요컨대 연기緣起를 잘 이해한다고 그것이 곧바로 현실 역사의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해야 하는가? 다른 차원의 영역이지만 하나의 삶에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판단이다.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며,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는 만나야 하며, 역사는 깨달음의 연장선에서 도달하는 깨달음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고 했다. 차원이 다른 두 영역이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하며, 그 길이 바로 보살(보디사트바)인 것이다.

● 조영래 변호사의 물음에 현응 스님이라면 어떻게 답변했을까? 그날 발제 이후 전체 토론 시간에 현응 스님은 홍창성 교수의 “현응 스님이 만약 대통령인데, 공과 연기를 깨달았다면 사회복지 제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불교는 역시 깨달음이 먼저고, 깨달음의 내용을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자비(사트바)라는 파이프라인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예컨대 금리 인상을 얼마로 할 것인가에는 경제 현실을 생각해서 판단할 문제다. 깨달음과 관계없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기타 연주를 할 수는 없다. 경제에 대한 좋은 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 깨달음으로부터 좋은 작곡과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사트바의 문제는 사트바의 내용으로 풀어야 한다. 깨달음과 무관하다. 고봉정상에 앉아 있어도 깨달음이 더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시내 한복판에 있어도 깨달음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먼저라는 것이다. 불교의 문제는 삶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깨달음을 하는 것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인가? 없다. 그것은 사회적 노력을 해서 할 일이다. 그렇다고 깨달음의 필요성이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연기적 상상력은 우리 삶에 위안과 자유로움을 준다.”

조영래 변호사 물음, 휴암 스님의 답변, 그리고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인식은 향후 한국불교가 무겁게 짊어질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