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명법문] 누가 너를 구속하고 있느냐

2015-11-06     수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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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을 하러 오는 길에 좋은 자동차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좋은 차가 있으면 어떨까요. 나쁜 차가 있으면 또 어떨까요. 가지고 있는 차가 좋은 차인가 나쁜 차인가보다, 그 차를 타고 어디를 갔느냐가 우리의 몫인 것 같습니다. 차가 좋다고 경치까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차가 좋다고 그 안에서 싸우지 않는 것도 아니지요. 여러분들에게는 최고의 지도가 주어져있습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이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지도가 주어져있어요.
 
 
왜 세상이 날 힘들게 할까
우리는 좋은 차와 좋은 지도를 가지고 있고,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지금 불행하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내 탓입니까, 세상 탓입니까. 잘 되면 내 덕이요, 못되면 남 탓이라고들 하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본다면 본래 근심걱정, 번뇌망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내 안에서 일어난 헛된 분별로 근심걱정, 번뇌망상이 생겨났을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불성이 내재돼있다.’가 아니라 ‘너는 완전하다.’ ‘본래부터 부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완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만듭니다. 자녀가 공부를 못해서, 남편이 늦게 들어와서, 집에 돈이 없어서라고 고통의 핑계를 댑니다. 내가 만든 고통 안에서 허덕이고 있는 거예요.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행복을 창조하지 않고 고통을 창조할까요. 
 
‘왜 세상이 날 힘들게 할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한 사람씩 붙잡고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세상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세상 누구도 내게 관심가지는 사람 없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나를 구속하거나 나를 얽매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스스로가 내 안의 거짓된 자아의식을 비워내지 못하면, 끊임없는 분별 속에서 고통만 만들어내게 됩니다. 세상 탓할 것 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헛된 생각을 지워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조 승찬 조사의 ‘수박여誰縛汝’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한 스님이 승찬 조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 세상이 너무도 고통스럽고 저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승찬 조사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너를 구속하고 있느냐.” 구속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허상에 매여 스스로 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구속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이기적 독점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관계도, 부모자식관계도, 세상도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나를 구속하는 것이에요. 내가 세상의 무게를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 무게를 다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한없이 독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까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탓을 합니다.
 
 
|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는 길
그래서 우리가 불행에서 행복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나아가려면 첫째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하라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참선하라고 하면 신도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아이고 스님, 저는 못 앉아있겠어요. 앉아만 있으면 왜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참선을 하면 뭐라도 하나 깨우쳐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참선은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거예요. ‘아, 나한테 이렇게 많은 번뇌 망상이 들끓고 있구나.’ 하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성찰입니다. 그게 참선인 거예요.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습니다. 참선을 해보면 ‘아, 내 안에 자아의식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고 그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찰하면 저절로 맑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찰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내 안에 나를 비우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세상을 향해 두 손을 뻗을 줄 알아야 해요.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관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제게 눈물로 상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님, 평생을 나쁜 짓 한 번 안하고 살아왔는데, 왜 저는 이렇게 삶이 힘듭니까?” 
 
삶의 관계가 개선되고, 내가 바라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지止持만이 아니라 작지作持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계, 십계 등의 계율로 ‘~하지마라’의 지지를 배웠습니다. 거기에 나누고 함께하는 선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즉 작지하지 않으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따뜻하게 잡아주는 사랑의 손길이 있는 것이에요. 그 손길과 손길이 마주치면 그 세계는 결국 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천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데 너무도 낯설어 해요. 이제는 두 손 두 발 걷어 젖히고 사랑을 실천해야할 때입니다. 『어린 왕자』의 한 구절 중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기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때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기적인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나요. 세상이 나를 사랑하면 더 이상 근심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불자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 관세음보살님처럼 사랑하라
사랑의 대명사는 관세음보살님이시죠. 언제 어디서나 모든 중생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합니다. 부부도 함께 살다보면 닮아간다는데 그 분을 하염없이 부르면서 우리는 왜 닮아가지 않을까요. 관세음보살님을 염할 때 내 안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부르면 수십 년을 불러도 관세음보살님을 닮아갈 수가 없습니다.
 
삶속에서 언제나 관세음보살님을 수지受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지에는 심수지心受持와 신수지身受持가 있어요. 마음으로 지극히 염불하며 수지해 내 안의 거짓 자아의식들을 무너트리고, 몸으로 관세음보살님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보릿고개를 넘고 시집살이 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이 어떠한 일이 생길 때마다 입에 달고 살았던 이야기가 뭔지 아시나요. “아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반사적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염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칼질을 할 때도, 익숙하지 않을 땐 손이 베일까, 똑바로 안 썰어질까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익숙해지고 힘을 얻으면 능숙히 잘 썰 수 있게 되지요. 그런 것처럼 정진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럼 그 다음부터는 정진이 절로 됩니다. 옛 어르신들처럼, ‘관세음보살 해야지.’ 하고 마음먹기 전에 관세음보살이 나오고 있어요. 그게 내 공부의 척도입니다. 
 
내 공부가 얼마만큼 됐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관세음보살님만 붙잡고 서원한다고 되겠습니까. 습관의 힘을 거스르려면 노력의 힘이 필요하지요. 힘을 얻어 장애의 허물을 무너트리는 순간을 염원하면서 염불하세요. 자나 깨나 관세음보살을 염원하면 악업 습관의 벽을 무너트리는 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악업의 씨앗이 자랄 틈이 없고 나쁜 습관이 길들여질 일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앉아서 구두선만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관계적 존재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법문만 듣지 말고 봉사하고 사랑을 나누세요. 관세음보살님이 수행하시며 부처님만 찾았겠습니까. 관세음보살님은 정수리에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이웃으로 손길을 향했습니다. 마음으로 몸으로 관세음보살을 수지해, 베풀고 인내하고 노력했을 때 관세음보살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좋은 내비게이션이 있고 명품 자동차가 있더라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부처님 경전이 최고의 법문이라 할지라도 실천하지 않는 제자들만 있다면 박물관 전시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 관계가 개선이 되고 내 한계를 극복해서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 번뇌 망상이 끊어진 존재로 거듭나 언제나 여여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수암 스님
1986년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 원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89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조계종 총무국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 덕숭총림 수덕사 교무국장, 화계사 총무국장, 부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며 화계사 주지로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사회봉사 활동 등으로 화계사를 수행과 교육, 국제포교의 중심사찰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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