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禪] 조형예술은 무엇인가?

2015-11-06     윤양호

예술가들에게 선은 친숙하다. 현대미술에서 선을 체험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간 예술가들은 수없이 많다. 동, 서양의 구분 없이 현재에도 선은 예술가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 되어 가고 있다. 수행자들이 자발적으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듯이, 예술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삶의 가치 추구와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선이었다
선은 살아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선은 삶의 최고의 가치를 찾아 가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는 안내자이며, 지혜로써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마법과도 같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선은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를 궁구하던 많은 예술가들은 자연이나 대상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 가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즉 다양한 방법처럼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개별적 특수성이 존중되면서 가능하게 된 일이다.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절 백남준이라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하며 국제 심포지엄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청중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는데 한 학생이 이러한 질문을 했다. “현대미술은 이미 선배예술가들이 모두 해버려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은 할 것이 없다.” 백남준은 한번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당신과 반대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배들은 예술의 다양한 방법과 가치, 미학적 토대 등 많은 것을 실험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며, 따라서 앞으로 현대예술은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지며 인류의 정신문명에 기여할 것이다.” 이는 수많은 선사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어록으로 남겨 놓아, 후배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힘들다고 한 것에 비유된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의 깊이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로 예술의 가치와 방법들을 이해하게 됐고 다시 학생들에게 이러한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가 독일에 갔을 때 백남준은 살아있는 신처럼 생각됐다. 젊은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그를 만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으며, 그가 하는 말은 곧 법(미학)이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백남준을 따르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선이었다. 당시 불교나 선이 대중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백남준이 하는 알쏭달쏭한 표현들은 많은 의문을 가지게 했으며, 가끔씩 TV인터뷰에서 전하는 그의 철학은 새로운 관점이었다.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독일에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로 돌아가고 결국 그 하나는 사라진다.’라는 그의 주장은 황당한 것처럼 들렸으나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선에 입문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재의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불교와 선은 보편화된 철학이며 미학이고, 삶이다. 예술가들에게는 더욱더 중요한 관심사이다. 
 
필자가 2000년도에 독일의 예술가, 갤러리스트, 비평가 등과 연구모임을 하여 만든 단체가 국제선조형예술협회이다. 2000년도에 독일 오덴탈 시에 있는 오덴탈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회를 개최하여 독일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 생소한 선조형예술은 ZEN49, ZERO, FLUXUS 등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으며 현대적인 정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2005년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 개설된 선조형예술학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탄생했고 현재에도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선조형예술은 포괄적 개념의 정신, 예술운동이다. 이를 통하여 국제적인 예술가를 양성하고, 나아가서 미학적 토대를 구축하여 미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제 선조형예술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미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호에 한국의 단색화를 분석하며 그 특성을 선적 관점에서 찾고자 했다. 한국 단색화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환기의 작품에 대하여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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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관조하게 하는 김환기의 작품
한국추상미술의 선두주자인 김환기(1913~1974)는 초기작품에서부터 자신만의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점과 선을 가지고 화면에 나타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특히 미국에 머물러 만든 작품들에서는 강한 정신성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색면추상이 많이 진행되며 새로운 미학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러한 유행에서 조금은 떠나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돌파구를 선적 관점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에서 비롯된 그의 단색화는 선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무수히 많은 점과 사각형을 통하여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비정형의 형상들은 각각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들이 모여 새로운 형상과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만날듯하면서도 서로의 사이에 조그마한 간격을 표현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각각의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고뇌의 과정을 점과 선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만날듯하지만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인연처럼 화면 속에서도 그 간절함이 느껴진다. 때문에 그러한 작업과정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의 작업과정은 수행자의 구도과정과 흡사하다 할만하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변화되는 자연의 이치를 터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변화하지 않는 자신의 인연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관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울림이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푸른 바다에 떨어진 별 같기도 한 화면의 표현은 보는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선사들이 대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듯이 김환기의 작품 앞에 서면 스스로의 마음을 관조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일상, 삶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계기를 가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도 김환기의 작품을 접하며 그의 ‘정신성’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문화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그의 작품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신성에 주목하기 때문에 소통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 중 하나가 소통의 가능성이다. 특히 김환기 작품처럼 가장 단순하고 반복적인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상이 사라지고 뜻만 있으니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不二)을 일으키게 한다. 
 
한국의 가장 격변기에 예술가로 살았던 김환기는 추상미술을 통하여 민족의 고통과 슬픔, 연민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시대적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내면적 정신성을 표현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그의 노력들은, 그가 떠난 지금 다시 그의 예술성과 정신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 무無와 공空의 관계를 적절히 아우르는 김영주
김영주(1920~1995)는 김환기와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화면에 자유롭게 자신이 생각하고 인지하는 현상들을 기호화해 표현했다. 자주 등장하는 기호 중 하나가 하트모양이다.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삶을 살다간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대로 표현된다. 검정색의 바탕 위에 자유롭게 선과 기호로 조합되는 화면들은 보는 사람들이 자유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한국에 이러한 작가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아이가 낙서한 것 같기도 한 작품들은 보면 볼수록 묘한 매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강한 힘이 있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이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작가이다. 그의 예술성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컬렉터가 적어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에서 많이 거래가 되어야 빨리 알려지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 작품성이나 예술성에 비하여 저평가 되는 작가가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작가가 김영주라고 생각한다. 
 
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작품은 무無와 공空의 관계를 적절히 아우르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사라진다는, 그에 대한 어떠한 형상도 일어나지 않는 무생심無生心의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이 그의 인식 속에 들어가면 모든 형상이 사라지고 오로지 한 번의 선이나 점, 면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유롭게 그어진 선은 자유를 남발하지 않는 절제를 포함하고 있다. 즉,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며,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 충돌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존재성을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듯한 최소한의 자신의 존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김영주가 보여주는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이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내면적인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와 비교되기도 하는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사후에 조명을 받고 있다. 최근 한국의 단색화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추상 1세대에 대한 조명이 함께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단색화 작가들과 10~15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김영주의 작품들은 한국 추상미술에서 새롭게 정립돼야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철학적, 미학적 특성들은 현재에도 연구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창적인 정신성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예술로써 한국의 정신적 가치를 찾아가고자 했다.
 
강렬하고 원색적인 색채들은 암울한 시대적 상황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보인다. 원색은 주로 원시미술에서 자주 사용하는데 그는 자신의 화면에 자주 원색을 등장시키며 본질적인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절제를 통하여 승화시키고자 했다. 이는 그의 대비되는 색채와 화면에서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특성들에서 엿볼 수 있다. 단지 내적인 에너지의 분출이 아닌 정화되어 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타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아간 그에게서 후배 작가들은 배워야할 부분이 많다. 
 
 
| 진정한 정신성은 통한다는 것을 입증한 정상화
단색화의 흐름 속에서 가장 늦게 조명 받은 작가가 정상화(1932~)이다. 작가가 된지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 몇몇의 작가들과 평론가들에 의해서 그의 작품이 회자될 뿐 그의 작품들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들이 많지 않았다. 작품 가격 또한 동년배나 후배작가들에 비해서 아주 낮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단색화 바람을 타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단색화의 흐름 속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작가가 정상화이다. 그와 더불어 그의 강인한 정신력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일찍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그는 주변의 많은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자그마한 지점토를 화면에 붙이고 그 사이에 색을 칠하고 다시 붙였던 흙을 떼어내면 그 자리에 가느다란 하나의 색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수천 번, 수만 번 해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들 속에서 그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많은 시간을 작품에 매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제작하는 시간이 많이 든다고 작품성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정상화의 작품 앞에 서면 그대로 시간과 공간이 통합되고 인고의 시간이 흘러 자유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그 많은 시간동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에서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는 불과 1~2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 많은 시간성을 평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그의 진정한 가치들이 인정받고 있어서 다행이다.
 
결국 진정한 정신성은 통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과정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수행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가듯이 그 역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아갔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작품이 높은 가격에 판매가 되고 유명해 진 것은 자신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자신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며 최선을 다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술가가 걷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그 힘든 과정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유혹에 흔들리며 나중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예술가가 되고자 했는지 초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현대는 모든 작품들이 가격이 매겨지고 거래되기 때문에 가격기준이 예술성과 정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격이 높다고 하여 꼭 좋은 예술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또한 가격이 낮다고 하여 예술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술의 가치는 작가의 정신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김환기, 김영주, 정상화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시대의 정신을 통하여 자신의 독창성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시대의 유행이 아닌 진정한 예술의 정신성을 찾기 위한 그들의 땀 흘린 노력들이 좋은 가치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인과의 이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선은 현재에도 살아 있다.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선은 그 모습을 다양하게 하며 우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해준다. 예술은 이제 선의 정신으로 인하여 더욱 풍성해지고 삶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선조형예술은 시대적인 흐름을 선도하는 미학, 철학, 정신문화운동이다. 한국 작가들의 정신성을 통하여 국제적인 흐름을 선도하고자 한다.                            
 
 
윤양호
독일의 국립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마이스터쉴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선조형예술학과를 개설하여 국제적인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대미학의 새로운 관점을 선사상을 바탕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현대미술에 영향을 끼친 선사상」, 「선사상에 나타난 조형성 연구」, 「조형예술에서 본 불교의 미학적 특성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작품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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