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에 대해

2015-10-08     김성동

● 오랜만에 한국불교에 ‘깨달음’ 논쟁이 점화됐다. 그 발화점은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다. 조계종 스님들의 출가와 교육을 책임지는 수장이 던진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글은 2015년 가을, 한국불교에 큰 질문을 던진다. 글의 주된 요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 첫째, 깨달음은 선정 삼매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다섯 제자들과 밤낮 없이 토론하고 대화했듯이 설법, 대화, 토론을 통해 ‘잘 이해하는 것’이며, 논리적인 성찰과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 전통의 ‘사띠’도 ‘잘 기억하고 그 내용을 사유하는 일’이란 뜻이었지만, 점차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같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화하게 했다는 것이다. 간화선도 조사 스님들의 설명 내용을 대화하고, 기억하고 사유하는 수행 전통이지만, 중국 원나라 때 몽산 선사에 의해 선정위주의 간화선이 제창되어, 우리나라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 당시의 ‘사띠’나 초기 간화선이 이루고자 했던 본래의 깨달음 성격은 ‘잘 이해하는 것’이며, 다만, 후기에 이것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 둘째, 만약 이렇게 깨달음이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 즉, 연기성과 공성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삶과 괴로움, 행복 등 이런 것을 감당하고,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깨달음은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는데, 당시 사회 통념으로 깨달음의 본래 성격을 대폭 상향하고 마침내 엄청난 도그마가 되어, 깨달음의 경지가 설정됐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힘든 것은 바로 이런 잘못 설정된 깨달음 때문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한 불교가 일반 사상이나 철학과 뭐가 다른가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현응 스님은 이를 연기론에 입각한 무아, 무상, 고의 관점과 비실재론을 말한다. 여타 사상과 철학 등은 모두 실재론에 근거한 패러다임이기에 불교의 비실재론적 인식은 세상에 가장 독보적인 깨달음이란 것이다. 또한 굳이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연기론을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셋째, 현응 스님에 따르면 생사生死의 문제도 ‘이해하는 깨달음’을 통해 그 실재성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에 해결이 가능하다. 또 실제 현실에서 나타나고 진행되는 괴로움의 문제는 연기의 관점에서 살펴, 극복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이는 깨달음(보디)의 영역이 아닌, 현실역사(사트바)의 영역이기에 깨달음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현실역사에서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그의 깨달음이 훼손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글의 파장은 컸다. 교계 각종 매체에서 나온 비판은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에 겨눈다. 수행이 필요 없단 이야기냐, 지적 이해다, 수행이 그렇게 쉽겠냐, 경전의 근거가 없다, 선정 삼매는 필수다, 오히려 사유를 경계했다, 실참도 못한 사람 등등이 그렇다. 진리에 정직할 필요가 있다. 진리는 아웃사이더에 있지 않다. 저 멀리서 훈수 두면 곤란하다. 자기가 얻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 자기 말을 해야 한다. 진리라는 전장의 맨 앞에내가 있어야 한다. 진리에서 상대방의 언어를 따라가며 반박한다면 유체이탈 화법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비극이 반복된다. 진리는 인사이더에 있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의 글은 많은 논제를 던지고 있다. ‘깨달음’도 그러하지만, ‘역사’의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스스로도 그렇게 밝혔듯이 25년 전에 말했던 ‘깨달음’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국 현응 스님이 풀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