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선] 단색화와 禪

2015-10-07     윤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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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색을 단순하게 화면에 칠했을 때 느껴지는 감성은 단순함이다. 종이가 아닌 아사 천 위에 젯소나 다른 기초적인 밑 작업을 하지 않고 바로 칠해지는 먹물의 느낌은 거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물을 머금은 먹은 순간 번져 나가며 스스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작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느낌으로, 천과 먹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둘은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가 된다. 일찍이 보지 못한 이러한 기법을 화면에 적용한 화가는 윤형근이다.

 

| 불이不二의 가치를 추구한 윤형근
불이不二의 이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아사 천과 먹물, 작가와 천, 작가와 먹물, 감상과 이성, 의도와 우연 등 상반된 내용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이다. 그것이 정신적인 깨달음과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으나 화면에 나타나는 표현적 특성은 둘이 아님을 보여준다. 주관적인 관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극사실주의, 표현주의, 민중미술 등 한국의 미술은 혼돈의 과정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그의 이러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는 것에서 작가의 정신성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성의 핵심은 대상이나 표상에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세계다. 극도로 절제된 표현과 색으로 작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상과 철학,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생각된다. 즉, 자연의 변화를 스스로 체득하며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음의 관조를 느끼게 해준다. 대상을 관조한다는 것은 그 존재방식과 더불어 변화의 과정을 인지하는 것이며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이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의 이치를 찾아가는 여정과 비슷해 보인다. 학습을 하거나 경험, 지식 등으로 얻어지는 모든 인식들이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유자재로 활용이 가능한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아는 것이 고정되어있다는 생각은 모든 것을 박제화하며 현재의 삶을 과거의 관념 속으로 고정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유정법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자신이 학습하거나 경험한 것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기 복제적인 경우도 일어나는데, 이때 얼마만큼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즉 지난 경험이나 지식은 모두 버리고 현재의 관점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창의성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관점의 차이가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창의성은 새로움, 시대성, 지속성, 깨달음 등으로 규정해볼 수 있다.
 
항상 과거의 것에 비해 새로워야하며 시대정신을 담아내야 한다. 혹자들은 창의성은 시대성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경우도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는 창의성은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가의 창의적인 작품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인정받는 경우에도 그 작품은 그 작품이 제작되는 당시의 기준에서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었다고 보이며, 그 가치를 현재에도 인정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창의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함은 자기 모순적일 수 있다. 창의성은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항상 변화하며 그 가치를 드러낸다. 때문에 새로운 작품이 창작되는 것이다.
 
윤형근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창의성은 반복되는 색을 통해 자유롭게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정형화된 사각형의 도형과 비정형화된 사각형을 가지고 불이의 가치를 추구한다. 마음의 변화를 감지한다는 것은 자신을 관조하는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깊은 심연의 세계를 단순한 색과 형으로 표현한 그의 예술적 관점에서 작가의 고뇌와 성찰의 울림이 전해진다. 
 
 
| 이우환의 점 시리즈
커다란 화면에 점을 하나 찍으니 순간 울림과 긴장감이 밀려온다. 반복되는 점찍기는 깊은 호흡을 하듯이,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호흡을 조절하는 것처럼 계속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며 스스로 존재방식을 찾아가는 것 같다. 이우환의 점 시리즈를 볼 때의 느낌이다. 물감을 잔뜩 머금은 붓은 점을 찍을 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놓으며 흔적을 남긴다.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순간 다시 무거운 짐을 지고 옮기는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 마치 인간의 삼독심을 내려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행하는 수행자의 모습과 흡사해 보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시작된 점 시리즈는 질서를 잡아 가기도 하고,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마치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붓은 쉬고 있다.
 
길고 가느다란 선은 그 끝을 향하여 쉼 없이 내달린다. 마지막 힘을 모두 소진한 붓 끝은 모든 것을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선긋기는 하나의 질서를 형성하며 화면을 새롭게 구성한다. 점을 찍을 때보다는 깊은 호흡이 필요해 보인다. 한 번 출발한 붓끝은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이 마치 지구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처럼 강한 힘으로 달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번뇌를 벗어던진다.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수행자의 깊은 호흡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숨이 멈추어서는 것처럼 느껴질 때 다시 숨은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가는 것처럼, 하지만 반복되는 가운데 밝은 빛을 발산하며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우환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점, 선 시리즈에 나타나는 특성들이다. 선사들이 자신이 체득한 바를 세상에 새로운 어법으로 법을 설하듯 그의 작품들은 새로운 기법으로 자신의 체득한 바를 자신 있게 표현하고 있다. 회화에서 점과 선, 면은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다. 때문에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점, 선, 면을 공부한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 이를 하나씩 분리하면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는 점과 선을 분리하고 그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깊게 생각하지 않을 때 이우환은 그 기본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과 예술을 만들어 간 것이다. 
 
수행자가 호흡하기를 처음 배우는 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흡은 방법이지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이우환이 보여주는 점과 선 시리즈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과정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일련의 방법들로써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마치 간화선에서 선사들이 화두를 던지듯 세상에 대한 화두처럼 보인다. 정해진 것이 없는 과정을 통해 고정화된 관점에서 벗어나는 강한 의지는 부드러움과 반복으로 인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주는 특성이 있다. 이우환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 낯섦과 단순함에 순간 당황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묘한 기운을 느끼며 자신에게 전해지는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무엇인가에 감전된 것처럼 이것이 이우환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처럼 보인다. 관점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는 화두처럼 깊은 자신의 내면의 울림과 떨림에 주목하라고 하는 것 같다. 결코 외부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지 말고 본래 존재하는 자신의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무도 간섭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길을 가는 그는 오늘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인류와 교감하고 있다. 조형언어를 통하여 소통을 하니 아무런 걸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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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보의 묘법描法 시리즈
화면에 가득한 선의 선율은 리듬감이 들며 순간 스피드가 느껴진다. 가느다란 선의 반복은 무심한 듯이 보인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박서보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박서보의 묘법描法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묘법은 화면에 반복적으로 선을 그리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조형언어를 형성해 간다. 이우환의 점이나 선 시리즈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가장 기본적인 선을 사용함에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그 완성미가 훌륭하다. 한지 위에서 반복되는 선을 긋는 행위는 수행자의 호흡과 비슷하다. 처음의 거친 호흡을 점차적으로 순화시켜 나아가는 것 같은 그의 작업들은 일순간 정지된 것처럼 무의식의 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선의 흔적들은 의식의 명료함을 드러낸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가 어떠한 경지에서 그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화면에 나타나는 그 표현들로 작가의 의식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랜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된 그의 묘법 시리즈는 하나의 패턴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변화를 주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한지가 갖는 부드러움과 유연함, 청아함, 단아함들이 작가의 반복되는 행위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를 모두 작가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어떠한 특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지가 가지고 있는 존재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한지의 역할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질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 때문에 작가들이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여 재료의 물성들을 자신의 생각 속으로 들어오도록 인위적인 힘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박서보의 작품에 나타나는 질료의 특성은 자신의 물성을 다른 재료에게 내어주며 스스로의 존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의 생각과 표현이 대단해 보인다. 
 
박서보의 묘법은 말 그대로 새로운 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석도의 일획론처럼 선을 그을 때마다 새로운 법이 생겨나는 경우다. 예술에서의 법은 창의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즉 새로운 개념의 작품들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법을 만들 만한 가치와 기준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예술에서의 가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식이 출가수행자들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예술가들 역시 스스로를 구도자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 온갖 실험과 다양한 재료, 기법, 사상, 미학, 종교 등과 사투하며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길을 가는 두려움이 있지만 어느 정도 가다보면 자신만의 희열을 느낄 때도 있다. 예술가의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이 길을 묵묵히 50년 이상 걸어가는 박서보의 정신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작가가 가는 그 길은 시대의 혼란을 겪어내며 버텨온 강함이 있어 더욱 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자신의 어법을 터득한 그는 이후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더욱 자신의 어법들을 확립해 나아간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색(빨강, 주황, 파랑)을 등장시키며 오랜 숙성의 과정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색은 어떠한 의미일까? 단색의 기법을 사용할 때와 색을 사용할 때의 내면적인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래된 나무가 새순을 틔우듯이 자신의 다양한 느낌을 새롭게 펼쳐 나아가는 그의 노력이 색을 등장시킨 것으로 추측해 본다. 팔순을 넘긴 작가가 앞으로 어떠한 작품을 내놓을지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도자의 길을 가는 그에게 느껴지는 향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캔버스 뒷면에 물감을 밀어 넣은 하종현
캔버스 뒷면에서 비집고 나온 물감들이 살포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들이 새순이 나온 것처럼 순수하고 청명하다. 올이 굵은 캔버스 천에 물감을 밀어 넣어 작품을 만드는 작가 하종현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자. 처음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움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였다. 자세히 보니 물감을 뒷면에서 밀어낸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작품은 화면 앞에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하종현의 작품은 이러한 관념적 사고를 일순간에 무너뜨린다.
 
시대적인 패러다임을 바꾸는 획기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린다는 행위자체가 무색해 진다. 그린다는 것은 대상이 있든 없든 화면에 무엇인가 이미지 혹은 상징화된 것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의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벗어나 자신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 결과물이다. 이후 점차 앞면의 화면에 다른 행위들, 즉 표현적인 의도들이 들어가지만 그 표현들도 어떠한 기호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관념적 사고에서 느끼는 인식의 틀을 거부한 하종현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기법과 조형언어를 만들어 내며 또 다른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을 두고 명상적, 수행적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화두처럼 느껴진다. 
 
위에서 거론한 윤형근, 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등은 한국현대미술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며 작품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며 동시대인 1960년대 후반부터 단색화를 표현하기 시작한 동료작가들이다. 이미 작고한 윤형근을 제외한 작가들은 모두 생존해 있어 그들의 작품세계를 규정짓는 것은 모순적일 수 있으나, 50여년을 진행해온 단색화의 특성을 분석해 보면서 선의 정신성과 수행자의 모습이 그들의 작품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예술이 선과 공통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필자가 90년대 후반에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 유학할 때 지도교수였던 헬무트 페데를Helmut Ferderle은 “앞으로 현대미술은 선과 밀접한 관계성을 형성하며 진행될 것이다. 즉 외형적인 표현보다는 정신적인 가치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시대를 아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한국의 단색화작가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깊게 느낀다. 이제 선의 미학적 패러다임을 새롭게 규정하는 노력들이 시대적인 요구사항이 되었다.     
 
   
윤양호
독일의 국립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마이스터쉴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선조형예술학과를 개설하여 국제적인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대미학의 새로운 관점을 선사상을 바탕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현대미술에 영향을 끼친 선사상」, 「선사상에 나타난 조형성 연구」, 「조형예술에서 본 불교의 미학적 특성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작품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