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현들’을 넘는 길

2015-09-03     김성동

● 지금 한국불교 현대사를 거꾸로 돌리는 퇴행이 진행되고 있다. 스님들은 익숙한 단어이지만, 일반 불자들은 낯설 수 있다. 서의현. 1994년 3월 29일 새벽 서울 조계사에 수백 명의 조직폭력배를 난입시켜 스님들과 불자들을 구타하고 폭행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 이다. 그는 총무원장 3선을 강행했으며, 상무대 자금 수수 의혹, 탈종 선언, 처자 확인 등으로 출가수행자의 계율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해 4월 10일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체탈도첩(멸빈)되었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서의현으로 상징됐던 부패한 부와 권력과 결별하는 듯했다. 전국승려대회 이후 한국불교는 교육과 포교, 사회복지 등을 내세워 한국사회에 불교의 이정표를 새롭게 제시했다.

● ‘서의현’은 잊힌 단어였다. 1994년 이후 한국불교는 전근대의 습習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 알았다. 세속보다 못한 오래된 악습을 계속 끌고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가오는 미래를 내다보며 움직이는 현재와 호흡하기 위한 일이 시급했다. 부패한 부와 권력의 구습은 숙업宿業처럼 따라붙었다. 21년 전 서의현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였다. 타락한 개인이 아닌, 감추어진 욕망의 ‘서의현들’이었다. 부패한 부와 권력들은 서로를 눈감아주면서 교단 내 기득권을 조금씩 재구성해나갔다. 교단은 공공성이 무너지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예민한 대학생과 청년들은 이런 한국불교에서 삶의 에너지를 찾지 못하고 주춤거리거나 무심해졌다.

● 2015년 오늘 서의현은 다시 ‘부활’했다. 불교에 없는 단어다. 조계종 재심호계원이 멸빈에서 공권정지 3년으로 감형 판결했기 때문이다. 멸빈 없었다, 고령이다, 자비를 베풀자 등 수많은 변명의 잔치가 벌어졌다. 모든 사사로움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공공성은 희미해지고, ‘서의현들’을 개인 서의현으로 치환시켰다. 기억해보자. 21년 전 멸빈했던 것은 부패한 부와 권력, 폭력, 계율 훼손 등으로 상징된 ‘서의현들’이었다. 승가의 계율 전통에 이런 행위들은 산문山門으로 들어올 수 없는 범계犯戒인 것이다.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다. 작은 알음알이도 버리고 오는 곳이 승단인데, 교단을 폭력과 부패로 얼룩지게 했던 범계자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두는 것은 어떤 이치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 지난 7월 15일 독일에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친위대(SS) 경비병으로 복무했던 94세 오스카 그로닝에게 30만 명의 학살을 방조한 혐의로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그로닝은 시종일관 죄를 뉘우치고 사과를 거듭하며 ‟내 뜻이 아니고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선처를 구했다. 그러나 법정은 검찰의 구형보다 오히려 4개월이 늘어난 4년을 구형했다. 직접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70년이 지나서도 끝나지 않는 독일 당국의 과거청산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엿볼 수 있다. 무려 70년이 지난 사건이고, 단순 경비병이고, 또 무려 94세의 고령이어도 그는 개인이 아닌 역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속제俗諦의 세계도 이렇듯 이치에 엄중하다.

● 공공성이 길이다. 모든 사사로움을 걷어내야 한다. 교단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은 공공화해야 한다. 수많은 ‘서의현들’이 승단에 다시 등장하는 까닭은 드러나지 않은 사적 교류와 관계망,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여기에 한국불교에 깊이 뿌리 내린 ‘사적 자본’이 자발적 통제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21년 전 종단개혁 불사가 내세운 다양한 지표들이 향한 곳은 결국 교단 전체를 공공성에 기초해 운영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