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경전을 읽어버립시다

내 안의 경전, 어떻게 깨울 것인가?

2015-09-03     이미령
삶에서 새로운 방법 : 잠자는 경전을 깨워라 01 경전을 읽어버립시다 / 이미령 02 간경看經, 거듭거듭 읽으면 저절로 그 뜻이 드러난다 / 김성동 03 사경寫經, 쓰는 만큼 지혜가 자란다 / 조혜영 04 경전 공부의 첫 단계는 청경聽經 이다 / 하정혜 05 스마트폰, 내 손 안에 팔만대장경 / 유윤정 불교 경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려워서, 낯설어서, 바빠서, 피곤해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책 읽기 힘든 현대인을 위한 2015년식 ‘경전 읽기’를 제안한다. 그동안, 불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경전을 읽어왔을까?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독경, 옮겨 쓰면서 읽는 사경, 뜻을 익히고 새기면서 읽는 간경 등이 일반적이었다. 이마저도 널리 일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행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잠자는 경전을 깨울 방법은 없을까? 출퇴근 지하철에서 무심코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속으로 팔만대장경이 들어갔다. 불광출판사 전자책 판매순위 1위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경전구절』이다. 스마트폰 속 경전은 쉽고, 편리하고, 언제라도 손닿는 곳에 있다. 팟캐스트 속으로 들어간 경전은 어떤가? 스마트폰 음원 등으로도 경전 원문과 강설을 들을 수 있다. 듣기만 해도 경전 공부가 된다. 생처즉숙처生處卽熟處 숙처즉생처熟處卽生處. 생경했던 것이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것이 멀어진다. 생경했던 불교 경전에 익숙해지면, 익숙했던 번뇌의 습관이 멀어진다. 경전을 가까이 하는 문은 전보다 훨씬 넓게 열려있다. 잠자는 경전을 깨워라! - 편집자 주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입니다. 좀 섬뜩한 이 제목은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한 시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책 제목 자체가 내게 짜릿하게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종교’라고 하면, 공손히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절대자를 향해 무릎을 꿇은 뒤에 간절하게 시선을 비스듬히 저 위로 향한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간절하게 내민 두 손을 누군가가 따뜻하게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우면, 절망에 쪼그라들고 열망에 지쳐버린 사람의 오금과 장딴지에 힘이 모아져 그 누군가에 기대서 따라 일어서고,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얻게 됩니다. 우린 이것이 종교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 역시 간절히 믿고 기도하는 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순수한 기도의 힘이 그 무엇보다 가장 센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는 불교를 알고 있는가?

그런데 경전을 통해 만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되묻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대체 그대의 두 손을 누구 앞에 내미는 것인가?”

우리가 내밀어야 할 두 손은 내 자신을 향해 있어야 하고, 붓다는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손을 내밀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리고 스스로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도록 종용하는 분입니다. 스스로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일, 나는 그것이 ‘경전읽기’라고 봅니다.

다시 사사키 아타루에게로 돌아가 봅니다. 그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서 이런 구절을 자주 씁니다.

“책을 읽어버렸다.”

“책을 읽고 말았다.”

대체 그는 왜 ‘책을 읽었다.’라고 단순하게 말하면 될 것을, ‘읽어버렸다.’, ‘읽고 말았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일본어 특유의 표현이라고 여기기에도 그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필시 뭔가를 읽는다는 행위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읽는다는 행위는 어떤 사건이 저질러진 것을 말합니다. 읽기 전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읽고 난 뒤에는 확연해집니다. 대체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읽고 난 뒤에 확연해지는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그건 단답식으로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고, 읽는 책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숱한 사람들과 경전 읽는 크고 작은 모임을 엮어와 봤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알고 있다.”, “나는 불교신자다.”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정말 기분 좋습니다. 불자인 나로서는 인생의 친구를 만난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험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전장에서 아군을 만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다익선이라고, 친구와 아군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그 대답들이 궁색해집니다. 궁색하다는 말은 군색하다라는 말과 통합니다. 궁색窮塞은 밑천이 다 떨어지고 앞길이 꽉 막힌 것을 말합니다. 군색窘塞이란 말 역시 앞뒤가 꽉 막혀서 막막한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이 딱 다물어지는 것이 많은 불자들의 현실입니다. 그 궁색함을 벗어버리기 위해 우리는 경전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경전공부를 시작하다보면 또 참 흥미로운 광경을 만나기도 합니다. 경전에는 이러이러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다.”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개를 갸웃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고 여겨왔던 불교와 경전 상의 불교가 차이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내용을 포기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경전공부를 관두겠다고 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알수록 헷갈리기만 하니 그냥 모르는 채로 지내겠다는 겁니다. ‘내 방식의 불교’가 편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도 불교일 수가 있을까요?

 

| 내 일생의 너무나 큰 사건

경전 읽기는 이런 어정쩡하고 제멋대로인 마음자세를 교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전을 읽으면 몇 가지 효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경전을 읽으면 불교에 대한 지식의 틀을 넓히게 되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저런 법문만을 들으며 막연히 불교란 이런 것이라고 추측했던 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눈으로 경전의 내용들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디를 가서도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반열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주먹구구식으로 받아들여 온 불교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보편타당한 근거를 갖춘 정보로 재입력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경전을 읽는 두 번째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딘가에 가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때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불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이 정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불자로서 이보다 더 든든하게 기댈 언덕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저 ‘경전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피상적인 효과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경전을 읽기 전과 읽고 난 뒤 자신이 달라지는 효과를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경전의 구절을 곰곰 생각하고 음미하는 가운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 달라집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경전을 꼼꼼하게 읽고 음미하다보면 설령 ‘달라지기 위해서’ 읽은 것이 아니라 해도, 이미 달라져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달라졌다.’가 아니라 ‘이미 달라져버린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생의 혁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혁명은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경전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니르바나로 향한 지도를 봐버렸기 때문에 동서남북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매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경전 읽기란 그런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물음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경전에는 대체 뭐가 쓰여 있을까요?

뭐가 쓰여 있기에 그걸 읽어버리면 읽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런 물음을 품고 경전을 열어야 합니다. 경전을 열고서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를 읽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그 수많은 선지식들과 수행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궁구했던 내용들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의 ‘나’는 현재 경을 읽고 있는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경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서 ‘암만 두드려봐라. 내가 이 마음의 빗장을 여나….’라는 자세로는 경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완고한 자세를 풀고, 붓다의 회상에 나아가 두 귀를 쫑긋 세우는 ‘나’여야만 경을 만날 수 있고, 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라야만 경을 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을 꾸준히 읽다보면 어느 사이 첫 페이지를 펼칠 때의 자신과 너무나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경전을 읽어버렸고, 나는 이미 달라져 버렸습니다.

내 일생의 너무나 큰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깨어나고 내가 눈을 뜨고 내가 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타성에 젖은 삶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새 생명으로 두근거리고, 만나는 모든 사물들은 늘 새로운 빛으로 반짝거리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어제의 눈으로 오늘을 보지 않고, 어제의 습관으로 오늘을 대하지 않습니다. 타성은 설렘으로 바뀌고, 무기력은 생동감의 옷을 입습니다. 분명 부처님은 매일 아침 중생들을 만날 때마다 ‘오늘은 또 어떤 미래의 붓다를 만나게 될까.’라며 가슴 두근거리며 탁발에 나섰을 겁니다. 그 두근거림이 45년 붓다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었을 겁니다.

경전을 읽어버립시다. 세세생생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타성을 두드려 내 안에서 붓다의 두근거림을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령

북 칼럼니스트. 동국대 역경위원을 지냈다. 현재 불광교육원 전임강사를 맡고 있으며, 불교서적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붓다의 지혜를 일상의 이야기와 함께 엮은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풀어서 쓴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 경전 수행에 관한 입문서 『간경 수행 입문』,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붓다 한 말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