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박노자 교수가 생각하는 한국불교

박노자 교수가 생각하는 한국불교와 자본주의, 그리고 불자의 삶

2015-09-03     김성동

무척 예의바른 그의 목소리는 좀 낯설었다. 큰 키에 ‘솔’ 음계의 톤으로 비교적 전문적 용어도 막힘없이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약간 고민스런 답변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틈을 두고 이야기했다. 그는 묵조선과 지관수행을 말했고, 한국불교의 자본성을 걱정했다. 그는 지눌 스님을 언급하며 성철 스님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달라이라마 스님보다 틱낫한 스님을 출가수행자의 전형으로 보았다.

불자이면서 사회주의자인 그의 불교관은 초기불교 승단이 추구했던 불교를 향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불교에서 그의 존재는 매우 불편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교수(43). 지난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의 이력은 독특한 것을 넘어 특별하다. 러시아 태생으로 고대 한국의 가야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인 아내를 두었으며, 한국사회 문제에 부단한 진보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특히 그는 청소년기에 불교사상에 심취해 불교경전을 탐독했으며, 한국사회에 던지는 문제의식이 한국불교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이방인의 이력과 진보의 눈을 가진 그가 한국불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들어보았다.

| 성철 스님은 귀족적, 달라이라마보다 틱낫한을 주목

불광
반갑습니다. 교수님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지식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또 한국불교계에 적지 않은 문제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인으로 개인적 신행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혹 불자로서 특별히 관심 있게 하고 계신 수행이 있습니까?

박노자 교수 저는 묵조선과 지관계통의 수행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관조하는 방식이죠. 묵조선처럼 생각을 가다듬고, 자신의 몰입, 욕망의 세계 등을 조감하고, 객관화하면 자아의 상대성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자아란 것은 잡념의 흐름입니다. 그 흐름이 변화무쌍하고, 일정하지는 않고, 계속 새로운 자아가 생겨나가고, 그런 것을 느끼면 자신을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첫 스승이 『법구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스승이 『숫타니파타』입니다. 이후에 여러 경전을 탐독했습니다.

불광
경전이 교수님의 스승이었군요.

박노자 교수 예. 그렇습니다. 소련 공산주의 말기에는 경전 외에는 없었습니다. 또 한국에 와서 봉선사 월운 스님 밑에서 1년 정도 경전을 배웠습니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 중에도 저는 ‘좋은 책을 쓰신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스님은 현세에 모습을 나투시다가 입적하신 분들이죠. 현세에 계신 곳은 잠시이지만,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시죠. 그런 스님들이 남기신 어록이 있으니까요. 인간의 식識의 내용이 책에 있잖아요. 그 내용을 보면 그 분을 보게 됩니다.

불광
한국불교에서 그런 스승이라고 할 만한 분이 계신가요?

박노자 교수 지눌 스님을 좋아합니다. 성철 스님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입장 자체가 지금 중생의 교화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입니다. 귀족적이죠. 지눌 스님에 대해서도 난타하시죠.(웃음) 저는 지눌 스님의 입장입니다. 돈오와 점수 사이의 중도中道가 부처님의 길인 것 같습니다.

불광
왜 성철 스님이 귀족적이죠?

박노자 교수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의존한다는 것에 귀족성이 느껴집니다. 화두참구만 일관하는 것이…. 돈오돈수의 입장이 중생을 교화할 수 있나요? 우리가 ‘상구보리 하화중생’합니다. 하화중생이라면 중생의 근기에 맞는 것을 찾고, 중생의 아픔을 공유하고, 중생의 별업別業과 공업共業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화중생에 참여를 거부하고, 귀족적인 스타일을 호소한다는 것은 중생교화의 입장이 아니죠. 이런 말 하면 국내 불자들이 싫어하는데요.(웃음) 그런데 백년이 지나면 또 (국내 불자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불광
​​​​​​​해외에서는 어떤 스님을 주목하고 계신가요?

박노자 교수 석일행釋一行 스님, 한국에서는 틱낫한 스님으로 알려졌죠. 참여불교를 하신 분으로 중생교화에 훨씬 더 맞추어진 분이죠.

불광
​​​​​​​교수님께서는 하화중생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군요.

박노자 교수 진리의 시금석은 실천입니다. 불교의 진실성도 실천 속에서 입증됩니다. 또한 타자他者들이 불교를 볼 때 교리만 갖고 판단하지 않고 교단의 실천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한국불교는 반성할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달라이라마 스님도 마치 청나라 시대 황제를 대하듯이 미국 대통령을 대하고 있어요. 티베트 불교는 오래 전부터 세속 권력과의 유착이 전통이었습니다. 초기 달라이라마는 모택동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불광
​​​​​​​달라이라마 스님이 보여준 참여불교적 시각이나 사회개혁 노력은 국내에서 높이 평가하는데요?

박노자 교수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상당 부분 옳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출가자로서의 입장과 정치지도자로서의 입장을 분리시키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실제로는 티베트 민족투쟁을 구상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미국을 우군으로 삼는 것이 그로서는 당연시되지만, 민족투쟁의 차원에서는 미국보다는 세계의 양심세력이나 세계인을 향해 외칠 수 있는데, 굳이 그는 중국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미국 지도자를 우군으로 만들려고 하죠. 결국 중국에 반감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일면으로는 마르크스를 동감하면서, 또 일면으로는 가장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자본주의 권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요? 정말,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민족투쟁이 티베트 민중의 입장에서 바람직할까? 이런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이지 않을까요? 물론 티베트 민중에게 달라이라마는 여전히 구심입니다.

 

| 자본주의와 불교는 공존할 수 없다

불광
​​​​​​​교수님께서는 불자이면서 사회주의자입니다. 이 둘의 공존은 가능한가요?

 

박노자 교수 100프로 가능합니다. 승가공동체에서는 사유재산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는) 사회주의보다 더 근본적이죠. 사회주의는 현실세계에서 사유재산을 혁파하고 공공 위주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형식의 원리라면, 불교는 사유재산이라는 욕망 자체를 부정합니다. 불교 논리로 보면 그것은 무명無明이고, 탐진치貪瞋癡입니다. 결국에는 무명에서 발생되는 공포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는 불교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불광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박노자 교수 불교가 왜곡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율장이 지켜질 수 없습니다. 이 사회의 욕망은 신분상승과 재산획득에 대한 욕망입니다. 불교가 우리 사회에서 상업화의 일부가 되면, 불교는 그 욕망을 처리하는 사업을 하게 됩니다. 종교업宗敎業이죠. 욕망 속에서 발생하는 아픔을 치유하고, 또 그 욕망을 키워주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업 잘 되게 하고, 대입 기도 하고….

불광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불교가 종교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요? 예를 들면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위해 불교계가 하는 역할도 적지 않습니다.

박노자 교수 여기서 문제는 제도적인 형태입니다. 사찰이 비영리이기는 하지만, 사찰이 유지되는 것은 종교업을 통해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 종교시장에서 내던져진 것이죠. 종교시장에서 재정확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욕망을 챙겨줘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찰에서 대입기도를 없앨 수 있나요? 못합니다. 사찰이 시장경제의 일부가 된 것이죠.

불광
​​​​​​​그럼 사찰은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요?

박노자 교수
완전하게 공공 부문의 일부분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중앙통제가 되어야죠. 근데 그게 지금 가능할까요? 시장경제와 불교는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휴…, (한국불교가) 어디로 가야할까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실을 수 있나요?(웃음)

그는 ‘공포’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종교가 ‘공포’를 다루는 방식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공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종교에 다가간다. 부처는 이 공포에서 벗어났다. 벗어날 수 없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받을 고통이 있다면, 받는 것이고, 제가 업을 지어서 받을 고통이라면 제가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불광
​​​​​​​불교에서 공포를 다루는 방식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노자 교수 제가 보기에는 연기의 법칙을 바르게 이해하면 됩니다. 또 상구보리 하화중생, 그러니까 자신의 고통을 멸하려면 남의 고통부터 멸하게 하고, 남들과 같이 고통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광
​​​​불교를 ‘신앙’하지 않고 불교적 사고로 산다는 것과 삼보에 귀의하며 불자로 사는 것은 다른 것인가요?

박노자 교수 궁극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전통 불교에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존중돼야 하겠죠. 그러나 근대 이후 다양한 방편이 필요합니다. 불교를 하는 이유는 해탈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 자체도 방편이고 뗏목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큰 장점입니다. 다른 종교, 기독교 등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자타自他의 경계선이 분명합니다.

불광
​​​​​​​교수님이 생각하는 불자로서의 이상적인 삶은 무엇인가요?

박노자 교수
불자는 남을 해하거나 괴롭히면 안 됩니다. 그런 직업을 갖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남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맥락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뜻하지 않아도 신구의 삼업이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선한 것인지 아닌지 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노력을 하지만, 안 되는 경우도 많죠. 그래도 늘 노력하고, 또 그런 맥락을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불광
​​​​​​​교수님은 “스님은 돈을 만지면 안 된다. 고급차를 모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출가수행자는 어떤 모습인가요?

박노자 교수
오늘 불교 교단이 공공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출가자 개개인이 윤리적으로 더 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스님 개개인을 탓할 수는 없겠죠. 병이나 노후, 이런 문제를 교단이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요. 지금 개개인이 재물의 결핍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서, 수행할 수 있는 공공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그런 공공시스템이 없잖아요. 모든 것이 개인에게 떠맡겨진 상황이잖아요. 이것은 한국불교 교단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그런 상황이죠. 출가수행자는 최소한의 물질만 소유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 종교는 기본적으로 시장과 국가를 견제해야

불광
​​​​​​​그런 면에서 교수님은 근본주의자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박노자 교수
불교에 이런 근본이 없으면 불교일까요? 불교의 근본이 그것인데요? 스님들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적절할까요? 뭐가 근본인지….(잠시 침묵) 불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신이 자비와 정진인데, 자비는 결국 자기만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위주의 욕망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의 논리는 자본주의를 거역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입니다. 정진은 남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의 욕망을 상대화시키고,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개인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불광
​​​​​​​교수님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폭력에 대한 거부를 실천하는 것이 불자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불교 내 호국불교, 군포교 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폭력에 대한 거부는 절대적인가요?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승병은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가요?

박노자 교수
최소한의 방어였다면 불가피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찰을 지키거나 사찰에 피신한 백성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왕명에 따라 사명 대사나 휴정 대사가 승병을 조직했습니다. 만약 왕명을 받들지 않으면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쩔 수 없이 국가의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상황상 불가피했지만, 그런 것이 비극이란 것은 사명 대사나 휴정 대사도 인식하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명 대사 한시를 보면 괴로워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최소한의 자기방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생명을 가진 생명체로서 최소한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스님들의 군軍 입대 문제와는 다르죠. 북한이 침략하거나 위협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스님들이 군에 안 간다고 국가에서 불교의 씨를 말리거나 그러지는 않잖아요. 전혀 다른 상황이죠. 지금 (스님들의 군 복무는) 자기방어 차원이 아닙니다.

불광
​​​​​​​교수님은 국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불교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박노자 교수
부처님께서는 국가와 교단은 거리를 두라고 하셨어요. 현대사회에는 종교의 본분에 충실하려면 국가를 견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 교황이 최근 보여준 모습(자본주의 비판, 빈자 배려, 기후온난화 대응 등)이 그런 것이죠. 국가와 시장은 기본적으로 지배 질서를 유지하게 합니다. 종교는 시장과 국가에 기본적으로 견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의 본분에 충실한 것입니다. 최근 불교계가 세월호 문제나 노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불광
​​​​​​​불교는 우리에게 내면을 바라보는 지혜 이외에 세상을 바로 보고 폭력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지혜도 가르쳐 주는가요?

박노자 교수
그럼요. 불교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뭐죠? 소비와 세상을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한한 확대재생산입니다. 자본은 이윤을 찾아 계속 돌아다닙니다. 자본의 논리는 비용 절감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는 논리입니다. 불교의 지혜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왜 소비를 해야 하는가?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 라는 궁극적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불교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근본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불교의 논리는 모든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논리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약자들에게 더 강하게 연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해고로 노동자의 생존권을 뺏는 것은 불교로 볼 때 이고득락의 논리에서 한참 멀어진 것입니다.

불광
부처님께서 탁발하실 때 부자와 가난한 자 관계없이 평등하게 탁발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빈자와 부자를 나누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박노자 교수 
당시 부처님 시대와 오늘의 시대는 다릅니다. 부자와 빈자의 차별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대자본이 당시에는 없죠. 또 하나는 부처님 자신의 계급적 한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배자와는 거리를 두거나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승가공동체의 유지 존속을 위해서 그랬을 겁니다. 지혜를 증득하셨다고 해도 당시 계급 질서를 완전히 상대화시킬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일체 만물의 연기를 깨치신 것은 사실이지만, 시대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한계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짧은 인터뷰 시간이었다. 국내 체류 기간 동안 많은 약속 일정이 잡혔다고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질문하면 답변이 바로 나오면서 오히려 인터뷰 분량이 넘쳤다. 그는 항상 약자의 시선으로 사회와 불교를 봤다. 그래서인지 약자의 분노를 이야기할 때 그 ‘분노’를 이렇게 말한다. “약자의 분노는 타인을 해치고자 하는 분노가 아니라, 억울함입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억울함이며, 개인이 받는 고통의 표현입니다. 또 약자들이 서로 연대하면서, 울고, 웃고 하면서 그 ‘분노’가 풀릴 수 있습니다.” 그가 밖으로 보여주는 불교는 항상, 사회와 약자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