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의 선담禪談] 고요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고요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2015-08-31     금강 스님
 
 
몇 해 전 서울에 소임을 맡은 도반스님의 숙소에서 하룻밤 자는데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었다. 숙소가 도로 근처여서인지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기계소리가 끊임없이 어디에선가 들려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불빛이 밤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도승(수도 서울에 사는 스님)은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바람 소리로 들어야하고, 사람의 말소리가 새들의 노래 소리로 들려야 한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다 소리 때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샜다. 매일 이보다 더 시끄러운 생산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문득 부끄러워졌다. 
 
 
극복할 수 있는 대중의 힘
산사의 여름 오후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인적은 없고 햇살만 가득한 널찍한 마당을 마주하기 어려울 때는 가끔 음악을 듣는다. 그 적막한 고요함을 깨뜨릴까봐서 음악도 조심스럽다. 산중에 어울리는 음악은 피아노 연주다. 선율 사이로 고요함과 새소리, 바람소리도 들려온다. 
 
언제부터인가 환경의 고요함을 즐기게 되었다. 그런데 옛 스승인 박산 무이 선사는 수행자가 환경의 고요함을 찾는 것을 크게 경계한 바 있다.
 
참선하는 데는 무엇보다 고요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고요한 환경에 빠지게 되면 사람이 생기가 없고 고요한 데 주저앉아 깨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시끄러운 환경을 싫어하고 고요한 환경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수행자가 항상 시끄럽고 번거로운 곳에서 지내다가 한번 고요한 환경을 만나면 마치 꿀이나 엿을 먹는 것과 같이 탐착하게 된다. 이것이 오래가면 스스로 곤하고 졸음에 취해 잠자기만 좋아하게 되니, 그리 되고서야 어찌 깨치기를 바라겠는가.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그것은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그것 역시 물이 아닌 경지에 있어야 한다.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 모르며,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문뿐이니, 그 의문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집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혼자 수행을 하다보면 나태해지기 쉽다고 절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일터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경쟁하며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떠밀리듯 고요함을 찾아 절에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찾아온 참선집중수행의 기간에는 꼭 묵언을 권유한다. 
 
여럿이 함께 수행할 때는 개인수행의 게으름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대중의 힘을 느끼게 된다. 가령 홀로 공부할 때, 참선 시간을 정해 1시간 정도 수행을 한다면 시간이 다 되지 않아서 자꾸 시계를 보거나 일찍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함께 수행하게 되면 옆자리의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 돕는다. 
 
 
| 몸을 쉰다고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나를 표현하는 데에 의식의 많은 부분을 소모하는 경향이 있다. 그동안 몸에 익은 나를 알아달라는 몸짓들이 무심결에 나오게 마련이다. 이러한 때 묵언은 함께 수행을 하는 이익과 홀로 깊어지는 이익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반면에 고요한 자연적 환경을 찾아서 왔지만 정작 스스로의 기대감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편한 경우도 있다. 산사를 찾아 수행을 하러 오는 사람 중에는 일상에 지쳐 일주일동안 인적 없는 절에서 잠도 실컷 자고 게으름 피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왔다가 새벽부터 저녁 늦도록 진행되는 수행일정에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숙소 배정을 받고 낯선 이들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함께하는 이들의 친절과 미소에도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생명력이 고갈된 지치고 메마른 땅과 같은 나의 마음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4일 동안 시스템에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한 채 시간에 저항하고 불편해하며 속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를 냈다. 
 
5일째 되어서 내 안의 생명력이 돌아왔다. 그냥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풀어졌다. 6일째 참선 중에 졸음과 다리의 통증이 사라지고 의식은 명료하게 유지됐다.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지배하며 나를 움직이도록 하는 그 무엇에 대해 고요한 의식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이 고요한 마음이 누군가에게 가 닿아 치유의 부드러운 손길이 되기를 기도한다.” 
- 86회, ‘참사람의 향기’ 참가자 소감 
 
몸을 쉰다고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지친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 긴장하는 마음이 쉬어졌을 때 비로소 고요해진다. 유마 거사는 사리불의 좌선에 대해 말한다.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 할 수는 없다. 현실 속에 살면서도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생각이 쉬어버린 무심한 경지에 있으면서도 온갖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마음이 고요에 빠지지 않고 또 밖으로 흩어지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이와 같이 앉을 수 있다면 이는 부처님이 인정하는 좌선일 것이다.”
- 『유마경』
 
 
| 고요한 마음은 어디에서든 있다
십여 년 전에 선운사에 모셔진 백파 선사의 비문을 탁본한 일이 있었다. ‘화엄종주백파대율사華嚴宗主白坡大律師 대기대용지비大機大用之碑’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단정했다. 백파 선사는 당대의 최고의 선사로서 조사선 입장에서 ‘선문수경禪門手鏡’이라는 글을 쓰셨는데, 젊은 초의 선사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라는 글로 반박했다. 백파 선사의 답변이 없자, 초의 선사의 지기인 추사 선생이 백파 선사가 망발을 15가지나 하였다는 ‘망증십오조妄證十五條 ’라는 글을 발표했다. 젊은 시절의 패기와 치기가 다분히 섞인 글이었다. 허나 비문의 이 글씨는 그 이후, 추사가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겪으며 수행이 깊어지고 추사체가 완성된 뒤 쓴 글씨로 유명하다. 화엄종주는 교학의 최고요, 대율사는 계율의 최고요, 대기대용은 선의 최고라는 찬사를 한 스님에게 한 글귀로 쓴 것이다.
 
탁본을 하면서 대기대용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 오랫동안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육조단경』의 「정혜품」을 보다가 의문이 풀렸다.
 
『육조단경』에서는 정定과 혜慧가 한 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가만히 정에 있을 때는 그 안에 혜가 깃들어 있고, 그 선정의 마음이 대상과 경계를 만나게 되면 지혜가 작용한다. 그 지혜가 작용하는 속에, 앉아 있을 때 선정의 마음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마음이라면 앉아있을 때에는 고요하지만 움직이면 지혜가 작용하고, 자비가 실천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움직임은 대기대용이 되고, 다른 말로 활발발 자유자재라 하겠다.
 
옛 선사들은 한결같이 수행의 결론은 고요한 마음에 간직된 대자비심을 일으켜 더불어 함께 나누는 삶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 선 수행을 하는지에 대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스님들이 가장 애송하는 종색 선사 『좌선의』에는 좌선하기 전 다섯 가지 중요한 마음가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대비심을 내고, 큰 서원을 일으키고,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서약하고, 홀로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지극히 고요하고 아무 번뇌가 없을 때 그 마음이 열려 광대해진다. 그것이 자신의 본래 상태를 드러낼 수 있는데 그것이 큰 지혜의 상태이다. 마음이 지혜로 충만해졌을 때 비로소 이것을 깨달음이라 부를 수 있다. 고요함을 이루려는 집착에서 벗어날 때 고요한 마음은 어디에서든 있고, 어디에서든 깨달음 속의 자비는 나타난다. 
 
 
금강 스님
미황사 주지. 조계종 교육아사리.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 결사운동’, 무차선회를 진행하였고, 고우 스님을 모시고 한국문화연수원의 간화선 입문과 심화과정을 진행하였다. 홍천 무문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참선집중수행 ‘참사람의 향기’를 80회 넘게 진행하며 일반인들과 학인스님들의 참선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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