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에 길을 묻다] 지금 나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 나의 생각이 되었을까?

‘있어 온 것’과 ‘만들어진 것’의 선택

2015-08-31     법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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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

『중론』의 가르침은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갈등과 불안을 ‘해결’하는 쪽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일어난 원인을 제거하여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장 드러난 병을 치료하는 구병救病과 함께, 다시는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병防病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중생이 앓고 있는 병, 다시 말해 고통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먼저 고통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 모습과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긴장, 초조, 압박, 무기력, 소외, 고독, 불안, 공포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리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인생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은 이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고통의 원인을 욕망과 집착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규정이 아닙니다. 집기集起, 즉 여러 조건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조건과 간접적이고 부수적인 조건,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인 환경 등이 맞물려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론』에서는 고통과 불안의 가장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원인을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그릇된 생각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존재 일반에 대해 바르지 못한 인식과 판단이 불안과 고통이라는 병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착각이 만병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뒤바뀌고 거짓된 생각을 멀리 떠나야만 고통을 영원히 소멸할 수 있다고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깜깜한 밤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벼랑에 떨어지게 되었다. 도중에 용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 가지를 잡고 몇 시간을 버티어 보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죽었구나 하며 손을 놓았다. 그런데 떨어지고 보니 땅에서부터 겨우 6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종교학자 오강남 선생이 즐겨 인용하는 예화입니다. 어둠에 가려 나뭇가지와 땅 사이가 6인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몇 시간 동안 불안에 떨어야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사실을 사실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인식과 판단의 오류로 인해 엉뚱한 행위를 하고 불길과 같은 감정에 휘말리고 갈등을 겪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 사견邪見 혹은 희론의 해체

왜곡된 인식과 판단, 이를 일러 『중론』 곳곳에서는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이 책을 한역한 구마라즙의 제자 승예(355~439)는 서문에서 사견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름지기 전도된 견해에서 애착과 미혹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삼계(三界, 중생이 괴로움에 사는 세 가지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 논리를 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서 찾아볼까요?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청렴하고 근면합니다. 자기 신념이 확고합니다. 그런데 신념이 지나쳐 늘 자기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옳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틀렸다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견해가 달라 일을 할 때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차별하고 싸우고 불이익을 줍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 마침내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 과보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실제 이런 사례는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오류가 빚어내는 비극입니다.

『중론』은 모두 2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인식의 종류를 제시하고 논리적으로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1장 관인연품」에서는 존재 일반에 대한 여덟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논리적으로 타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운동과 인식기관, 오염원과 오염된 자, 행위와 행위자, 시간과 인과, 속박과 해탈 등에 대해 논의합니다. 다음 회부터는 각 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중론』은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위’를 낳고 잘못된 행위가 ‘고통’을 낳는다는 진단 아래, 그 잘못된 생각, 즉 사견은 인간이 허구적으로 구성한 망상이고, 희론戯論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불안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바로 사견 혹은 희론의 해체입니다.

“(온갖) 희론의 적멸寂滅과 상서로운 연기緣起를 가르쳐 주신 정각자, 설법자 중 제일인 그분(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제1장 관인연품」 첫 머리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허구적으로 구성한 인식, 즉 희론을 제거하여 정각을 이루셨고, 그 희론을 제거하는 방법은 곧 모든 존재가 연기의 법칙에 따라 존재함을 확연히 깨닫는 것임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간명하게 정리해볼까요? 모든 존재를 보는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고통은 소멸되고 자유와 평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개 존재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나의 생각, 감정, 습관 등은 어떻게 해서 나의 것이 되어 ‘나’라는 인격을 형성하고 활동하고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양자택일해야 하는 문제를 던지겠습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습관, 그리고 신분과 인종 차별, 남녀 불평등과 같은 것들은 ‘있어 온 것’인가요, 아니면 ‘만들어진 것’인가요?

 

| 모든 존재는 만들어진 것

그럼 이 물음에 대해 하나하나 접근해볼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들, 집과 자동차와 산과 강은 예전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판단에는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온갖 법과 제도와 전통적 풍습과 문화 등은 처음부터 있어 온 것인가요? 아니면 어느 시기에 이러저러한 요구와 조건들이 모여 탄생되고 유지되고 변화하고 있는 것인가요? 상식적으로 접근해 보아도 어떤 필요에 의해 합의하여 만들어진 것이지요. 또 우리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 걸핏하면 화를 잘 내고 참지 못하는 언행, 게으르고 남을 험담하기 좋아하는 습관, 늘 편 가르기 좋아하고 경쟁하기 좋아하는 성격 등은 어떤가요?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선뜻 여러 조건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확연하지 않습니다. 바로 ‘본성’과 ‘습관’이라는 덫에 걸려있기 때문이지요. 쉽게 고쳐지지 않고 소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의 생각과 감정, 언어와 신체의 행위들의 심층은 ‘있어 온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본성, 천성, 본능, 습관이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런 이름들이 우리에게 주는 다음 생각은 무엇인가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선설과 성악설입니다. 그리고 일부분과 표면은 조금 변해도 의식과 행위의 전면적인 변화와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규정합니다.

불교는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새로운 대전환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뇌를 돌려 지혜로, 고통을 돌려 해탈로, 중생을 돌려 부처로, 오염된 세상을 돌려 극락정토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론』의 각 장은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끈질기고 정밀하고 집요하게 모든 존재가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논증합니다. 모든 존재가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졌기에 그 무엇이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는 공空이라는 확연한 깨침이 있어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허구적인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24장 관사제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조건이 결합하여 생긴 것들은 본래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그리고 반야심경은 서두에서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나의 몸과 감수작용과 관념과 의지작용, 인식과 판단은 모두 본래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으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한다.(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사견과 행위들은 처음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이기에 소멸할 수 있고, 해체할 수 있고, 큰 전환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법인 스님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다. 2000년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오늘날 템플스테이에 해당하는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불교계 최초로 열었다. 2009년부터 4년간 조계종 교육부장을 맡아 ‘백 년 만의 변화’라는 승가교육개혁을 이끌었다. 이때 우리 사회의 고뇌하는 청년들을 위한 ‘청년출가학교’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청년암자학교’를 통해 청년들의 고민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따듯한 처방으로, 일약 ‘병’주고 ‘약’주는 스님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차茶의 성지, 일지암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