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제따와나선원 선원장 일묵 스님

번뇌 없는 선한 마음 상태, 수행자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

2015-08-31     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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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화선과 위빳사나
불광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일묵 스님 간화선을 깊이 해보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제한적이지만, 간화선은 수행 시스템 자체가 수행의 단계나 개념, 체계성 이런 것을 배제하는 입장이죠. 초기경전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불교에 대한 개념정리가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쓰셨던 용어 등의 개념 정리가 잘 되어있었죠. 초기경전은 부처님 원음에 가까우니까 공부를 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죠. 그 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법에 대한 이해가 명확했습니다. 수행의 구체적인 체계를 잘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또 간화선이 경전보다는 조사어록에 더 의존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불광 출가 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간화선을 해오셨는데요. 간화선은 스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일묵 스님 제가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다시 선禪을 보니, 좀 더 이해가 명확했어요. 다만, 법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선에 바로 접근했을 때는 합리적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접근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틀에 갇힌 사고를 깨주는 효과가 있지만,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성공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간화선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를 말해줍니다. 실제 틱낫한 스님도 처음에는 간화선을 하다가, 호흡법 등을 중심으로 했죠. 아마 숭산 스님이 유일무이할 겁니다. 
불광 일본의 젠 센터는 미국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요?
 
일묵 스님 일본 젠은 묵조선黙照禪이죠. (미국에) 화두선話頭禪 계통은 거의 없습니다. 
 
불광 묵조선도 선의 계통인데요.
 
일묵 스님 수행방식은 다르죠. 화두선은 ‘의심’이라는 수단이 있죠. 또 ‘본래부처’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죠. 이를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화두선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간화선은 중국이라는 문화에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분석적이며 직관적이죠. 제가 볼 때는 수행방법도 중요하지만, 이론적 토대가 튼튼해야 하는데, 이것이 약합니다. 밖에서 볼 때는 간화선이 객관화, 이론화가 잘 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서구에서 불교가 환영받는 것은 대부분 이론적인 토대가 확고하거나 객관적인 경經과 논서論書 등에 의지한 불교, 예를 들면, 티베트불교나 위빳사나 등입니다.  
 
불광 스님은 출가 이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대승불교 문화를 몸으로 익힌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위빳사나를 중심으로 수행하고 계시죠. 선과 위빳사나의 장점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인가요?
 
일묵 스님 제가 미얀마에서 위빳사나를 배웠지만, 우리나라 대승불교의 장점은 ‘중도’입니다. 이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죠. 물론 초기경전에서는 중도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팔정도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중도’는 팔정도의 ‘정견’입니다. 팔정도의 관점에서 간화선을 해석한다면 간화선이 더 신뢰받고, 이론적 토대도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초 설법인 팔정도를 토대로 간화선에(팔정도가) 이렇게 녹아있다는 설명이 된다면 간화선이 좀 더 힘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불광 지금 말씀하신 ‘팔정도’와 ‘중도’의 관계는 미얀마 등 남방불교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테마입니다. 말하자면 한국불교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주제가 아닌가 싶은데요. 
 
일묵 스님 그렇죠. 실제 그렇습니다. 저는 대승불교를 10년 동안 공부해왔잖아요. 중도中道는 수행으로 보면 팔정도八正道이고, 견해로 말하면 연기緣起입니다. 연기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입니다. 사성제四聖諦로 말하면 집성제와 멸성제죠. 사라짐은 공, 무아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사라짐’이란 측면에서 보면 인과가 약해집니다. ‘일어남’이란 측면을 간과합니다. 그리고 인과因果를 강조하다보면 실체론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숙명론이 그렇죠. 그래서 인과를 강조하면 현실에 빠지게 되고, 또 공空을 강조하면 인과를 무시하고 막행막식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균형 잡는 것이 제가 이야기하는 중도입니다. 인과를 무시하지 않고 공을 생각하고, 공을 바탕으로 인과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선禪을 잘못하는 경우에 공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과나 번뇌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 과보에 대해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 번뇌와 윤리
불광 윤리성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겠네요. 
 
일묵 스님 그렇죠. 수행은 윤리적인 것을 떠날 수 없어요. 깨달음과 윤리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과보가 있다고 하셨어요. 비록 나쁜 짓이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관계성이 있다는 것이죠. 인과와 공의 문제인 것이죠. 인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인과를 이해하면 나쁜 짓을 할 수 없어요. 
불광 윤리성이 부재하다는 것은 아까 말씀하신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가요? 
 
일묵 스님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직계 제자들은 덕스럽고 남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경전에는 성자의 첫째가 바로 계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인지 기행이나 막행막식을 하는 것이 수행상의 하나로 비춰지고 있어요. 종교에서 윤리성이 빠지면 종교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번뇌는 공하지만, 번뇌로 인한 고통과 과보가 있습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번뇌를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게 했어요. 탐진치貪瞋癡를 버리는 것이 열반인데, 이 탐진치를 보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번뇌를 보는 노력이 상당히 있어야 합니다. 
 
불광 번뇌를 보는 훈련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번뇌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번뇌가 버려질 수 없다는 것인가요?
 
일묵 스님 번뇌가 어떤 내용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버려질 수 없어요. 경전에 부처님께서 깨닫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사성제를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번뇌로,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고, 이것이 번뇌가 소멸하는 길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탐진치를 버리는 메커니즘에 대한 것입니다. 예컨대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는 부정관을 해야 한다, 성냄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애관이 필요하다, 어리석음은 연기를 관찰해야 한다, 이런 것이죠. 저는 초기경전을 배우기 전에는 이런 것을 배운 적이 없었어요. 
 
불광 재가자들은 정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일묵 스님 수행을 왜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정견은 선善과 불선不善을 구분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다.’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정견이죠. 예를 들면, 어리석음, 탐욕, 자만, 성냄, 의심 등은 괴로움의 원인이므로 불선한 마음이죠. 또 알아차림, 선정, 지혜, 자비 등은 괴로움의 소멸의 원인이기에 선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고, 이것이 수행의 방향성입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계발할 것인지, 어떤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인지, 이것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재가자들은 선과 불선을 구분하는 지혜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불광 스님은 호흡수행과 연기위빳사나를 말씀하십니다. 연기위빳사나는 어떤 의미인가요? 
 
일묵 스님 내가 화가 났다면, 보통 사람들은 화에만 포커스에 맞추는데요. 그 화가 난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원인을 알고, 버리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면을 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연기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연기가 수행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탐욕과 성냄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호흡수행입니다. 호흡에만 마음을 두고, 호흡만 기억하고, 호흡에만 알아차림을 두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물을 볼 때는 맑은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훈련하면 됩니다. 이런 훈련이 되면 연기위빳사나를 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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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세상
불광 20대, 30대 청년들과 법회를 하고 있는데, 최근 20대, 30대의 가장 큰 고민들이 취업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청년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일묵 스님 저는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취업이 안 된다고 제가 직장을 잡아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화가 있는 상태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물을 대하는 방법이나 접근법을 불교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죠. 불교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 없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불광 적지 않은 스님이나 불자들은 불교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고민하고 계신데요.
 
일묵 스님 입장 차이일 수 있겠죠. 수행자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치달릴 때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우리가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서 투쟁하는 것은 우리 역할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문제는 아직 개인적으로 제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할 만큼 깊이 고민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수행자로서 불교공부하고 이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이런 생각이 많죠. 오히려 저의 주된 관심사는 젊은이들을 출가시키는 일입니다. 이곳에 오는 청년들 중에는 출가를 고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청년들은 출가하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 봅니다. 세상에 직접 뛰어들어 변화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추천하는 출가수행자의 삶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행자는 자기 자리에서 마음을 맑히고, 재가자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결국 사회에 큰 이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절에 오는 사람만이라도 인과를 믿게 하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화합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출가수행자의 역할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광 불교는 사회현상이나 사회적 고통에 해결점을 직접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일묵 스님 이타행은 자기 수행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수행 없이 세상과 함께한다는 것은 진정한 보살행이 아니죠. 그리고 모든 불자들을 그렇게 끌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보살의 길을 갈 사람과 아라한의 길을 갈 사람을 다 제시했어요.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죠.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출가수행자의 사회적 활동에 대해 저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스님들이 갖고 있는 양질의 콘텐츠가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대중에게 진정한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나와 남이 함께 이익이 되는 것이 어떤 길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불광 스님 말씀을 들으니, 불교가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때에는 자칫 세력을 확장하거나, 이익을 위해 던져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묵 스님 예. 만약 그러면 감동이 없습니다. 노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자는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다스린다.” 출가수행자가 법에 대한 이해가 갖추어졌다면 세상을 뛰어다니면서 세상을 바꾸지 않고, 그 모습 자체가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죠. 자꾸 외연을 넓히려면 부작용이 많습니다. 특히 출가자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비춰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이 세상에 보내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봅니다. 세상의 이익에 맞추게 되면 결국 세속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번뇌로부터 벗어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출가하면서 살아가는 초심은 그렇습니다.    
 
불광 사회현상은 늘 분별과 욕망의 현장입니다. 이의 불교적 해법 중 하나로 개인적 마음수행으로 해결책을 내놓게 되니, 불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정신승리’라고 합니다.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정신적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일묵 스님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한 선善은 탐진치가 없는 선입니다. 컴퓨터로 보면 악성코드나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과 같거든요. 번뇌가 없는 선한 마음 상태가 되면, 우리 마음이 최적화됩니다. 그때 아주 적절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한 지혜의 역할입니다. 무조건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상황에 가장 적합한 판단, 이익을 좇은 것이 아니라 가치를 좇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힘이 약하니까 이익을 좇게 됩니다. 그러나 욕망이 제거된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일이 잘 풀립니다.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선택합니다. 빠른 것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중심이 없으면, 큰 경계가 들어오면 바로 흔들립니다. 진짜 선한 사람은 자기 중심이 있습니다. 신뢰를 주게 됩니다. 이 중심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것이 힘들지만 바른 길입니다. 
 
 
일묵 스님
서울대 수학과 박사과정 중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하였다. 범어사 강원 졸업 후 봉암사 등의 선방에서 수행하였다. 이후 미얀마 파욱국제명상센터, 프랑스 플럼빌리지, 
영국 아마라와띠, 호주 보디야나, 말레이시아 담마난다까 등 세계 각지의 수행센터에서 지속적인 수행을 하였다. 현재 제따와나선원의 선원장으로 있으면서 불교명상의 핵심인 팔정도에 따라 다양한 수행 및 교육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해하고 내려놓기』,『윤회와 행복한 죽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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