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누리] 가난, 기본소득, 불교

2015-08-02     김성동

● 우리 시대에 가난은 차별로 다가온다. 메르스 사태의 고통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더 깊다. 메르스 자가격리 대상자인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자칫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메르스 환자와의 접촉사실을 쉬쉬하고 있어 당국의 애를 태우고 있다고 했다. 그 노동자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난은 생명조차 운으로 바꿔버린다. 그만큼 오늘날 가난의 고통은 어느 시대보다 차별적이며, 깊다. 비교적 부의 차별이 느슨했던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은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서운가 하면, 빈궁의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은 불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고통이다.

● 부처님은 가난한 이와 부자를 나누어 법을 설하지 않았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처럼 보시布施에서도 가난과 부를 차별하지 않았다. 걸식할 시간이 되자, 가난한 집과 부자 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한 집 한 집 다니며 음식을 얻으셨다. 부자에게는 탐욕을 경계하고 보시를 행하게 했으며, 가난한 이에게는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일상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빈자와 부자를 나누지 않았지만, 빈자의 고통에 더 주목한 것은 그 고통이 물리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공감의 메시지인 것이다.

● 부처님은 군주와 국가의 중요한 역할 중에 세금으로 얻은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말씀하셨다. 부자에게 재물을 거두어 그것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을 국가의 주요 기능으로 보았다. 재물의 궁핍으로 인한 가난은 우선적으로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의 재분배에 공동체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최승의最勝意보살이 “빈궁한 중생으로 하여금 가난한 고통을 여의도록 하겠나이다.” 하고 합장했던 서원은 불자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고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 기본소득Basic Income은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 개인에게 ‘조건 없이’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가능한 일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나올 법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미 기본소득제가 낯선 말이 아니다.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의 국가가 기본소득제를 시행하고 있거나 시행 준비 중이며, 논의되고 있다. 기본소득제의 가장 큰 의미는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이들이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장치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 기본소득제는 가난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불교의 지향에 개념적으로 가장 접근된 제도로 보인다. 국가 재정의 안정성과 세수제도의 큰 변화가 뒤따라야 하지만, 차별 없고, 인간 존엄을 생각한다는 것에서 그렇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깊은 사유 속에 연기緣起, 무아無我를 깨달았고, 이 진리로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남녀노소, 빈부, 직업의 차별을 두지 않고 만났다. 모든 사람이 모두 존귀하기 때문에(天上天下唯我獨尊)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三界皆苦 我當安之)도 차별 없는 것이다. 불교가 제도화된 가난의 고통에 적극 개입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