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누가 그대를 절망케 하는가?

2015-08-02     장휘옥 / 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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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가 있으므로 만물이 있다.” 이 말은 상식적 수준의 인과관계는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창조주라는 원인에 의해 만물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기를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창조주는 실체에 해당하고, 연기와 실체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가 연기를 나타내기 위해선 ‘이것’과 ‘저것’ 자리에 실체에 해당하는 뭔가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실체가 들어간 인과관계는 연기가 아니다 
실체를 포함한 인과관계는 연기라고 할 수 없다. “숏다리라서 불행하다.”는 말을 듣곤 한다. ‘숏다리’는 신조어로, 짧은 다리를 비하한 말이다. “숏다리라서 불행하다.”는 숏다리를 원인으로 해서 불행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인과관계를 나타낸다. 이 말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숏다리인 한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숏다리도 연기적 존재여서 그 자체로서 숏다리는 없다. ‘숏다리’라 불리는 이것은 비교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롱다리이기도 하며, ‘숏다리’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숏다리인 것이 아니라 이름만 숏다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은연중에 이 다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짜 숏다리라고 생각한다. 숏다리라 불리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거기에는 늘 불행이 따라붙는다고 집착한다. 진리의 눈으로 보면, 숏다리는 공空하다. 다시 말해 숏다리는 ‘진짜 숏다리’가 아니다. 숏다리가 숏다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행ㆍ불행이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숏다리라서 불행하다.”는 실체가 들어간 인과관계이다. 이것은 마치 유부有部에서 실체인 번뇌가 내 마음과 결합하면 나는 피치 못하게 번뇌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 실체인 번뇌가 나와 분리되지 않는 한 번뇌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고 유부는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숏다리 자체를 특수 요법을 써서 롱다리로 만들지 않는 한, 그로 인한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대부분은 이같이 실체에 근거한 인과관계의 수많은 경우의 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에서 ‘이것’과 ‘저것’에 이 실체와 저 실체를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 우리 사고활동의 실태가 아닌가? 모든 현상을 실체간의 이합집산으로 보고, 그 이합집산의 조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면 할수록 연기적 사고와 행동에서 멀어져 버린다.
 
더구나 ‘이것’과 ‘저것’의 연결고리가 고정화되어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숏다리’에는 늘 ‘불행’이 따라붙고, ‘롱다리’에는 언제나 ‘행복’이 따라붙는 식이다.
 
몇 가지 예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해 보자. “저 사람을 만나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의 불행의 원인은 전적으로 저 사람에게 있다. 저 사람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실체이다. 때문에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몇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해야 행복하다.” “인생에서 해야 할 ○○가지 일을 했으니 내 인생은 성공이다.” ‘몇 년에 한 번의 해외여행’과 ‘인생에서 해야 할 ○○가지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 인생을 성공적이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을 하지 않는 한 나는 행복하다고 할 수 없고, 내 인생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이외에도 유사한 사고방식은 부지기수이다. “이런 과거를 가진 나는 결코 성공할 수 없어!” “집안환경이 이러하니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과연 이러한 생각대로 사실도 그럴까? 과거가 당신의 일생을 결정짓는다고 누가 그러던가? ○○가지 일을 해야 인생은 성공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설사 누가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가? 당신은 언제 대자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셈인가?
 
정견正見이 중요하다. 정견은 사물을 보는 바른 눈이고, 모든 일의 첫 단추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애는 쓰는데 공은 없다. 실체에 근거한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짚어 보자.
 
 
| 번뇌는 실제로는 없는 헛것이다 
외국의 어느 세계적인 석학이 TV 대담 프로그램에 초청을 받아 출연하게 되었다. 사회자가 “세계적인 석학이 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제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작은 것이 불만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어느 날, 하숙집 방에 누워서 우연히 벽에 걸린 자기 바지를 보게 되었는데 무척 짧아 보였다. 이때부터 그는 키 작은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 사귀고 싶은 여학생이 있어도 말 한번 건네 보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죽을 채비를 하고 바닷가 바위 꼭대기에서 부서지는 시퍼런 바닷물을 내려다보았다. 새끼 거북이 한 마리가 거센 파도를 맞으며 바위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밀려나면 기어오르고, 밀려나면 기어오르고…. 문득, 내면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저 작은 놈도 거센 파도를 이겨 내며 살고 있어. 육신이 멀쩡한데, 키 작은 것 하나 때문에 인생을 끝내다니! 머저리 같은 놈, 분하지도 않나?”
 
그때부터 생각을 바꾸어 어떻게 해서라도 성공하여 키 작은 한을 꼭 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신체적 조건과 상관없는 학문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결국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쭉 뻗은 다리의 늘씬한 신체의 소유자였다면 결코 오늘의 자기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사회자가 웃으면서 물었다. “지금도 키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남아 있습니까?” 석학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저를 존경하고 따르는 여성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박사의 얼굴은 언제 나에게 콤플렉스가 있었느냐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만든 것은 결국 그의 숏다리였다. 그렇다면 숏다리가 항상 불행을 가져온다고는 할 수 없다. 
 
지난 호의 산속 암자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산속 암자에서 똑같이 생활한 도인과 거사. 도인은 그곳을 극락이라 했고 거사는 지옥이라 했다. 그러나 진실의 눈으로 보면 그곳은 공空하여 극락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다. 그렇다면 극락도 지옥도 아닌 그곳이 왜 도인에게는 극락으로, 거사에게는 지옥으로 보였을까? 
 
물은 컵에 들어가면 컵 모양, 바가지에 들어가면 바가지 모양을 한다. 왜 그럴까? 물은 공空하여 어떠한 고정된 모양도 없다. 어떠한 고정된 모양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해 공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컵이라는 조건을 만나면 컵 모양이 되고, 바가지라는 조건을 만나면 바가지 모양이 된다. 물에 컵 모양이라는 고정된 모양이 있다면 바가지에 들어가도 결코 바가지 모양이 되지 못한다. 물은 공하기 때문에 인연 따라 여러 모양을 하는 것이다.
 
물이 컵 모양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물은 공하기 때문에 컵 모양으로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그 순간에도 컵 모양에 물들지 않고 컵 모양에서 자유롭다. 때문에 컵에서 바가지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이 되며, 컵 모양은 흔적도 없다. 물은 이처럼 인연 따라 걸림 없이 어떤 특별한 모양을 하지만 어느 모양에도 물들지 않고 자유롭다. 
 
따라서 컵 모양의 물이 생겨났다고 해도 그것은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생겨난 ‘컵 모양의 물’, 그것도 공한 것이다. 이것을 ‘불생不生의 생生’, 즉 ‘생함이 없는 생함’이라고 한다. 실체로서 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한 결과는 마치 신기루와 같아서 그것에 전혀 구속될 바가 없다는 뜻이다. 실제의 물에 손을 담그면 손이 젖지만 신기루로 나타난 오아시스에는 손이 젖지 않는 것과 같다. 물이 공하듯이 컵과 바가지 또한 공하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표시해 보자.
 
 
물   + 컵    →     컵 모양의 물
물   + 바가지 → 바가지 모양의 물
↓          ↓               ↓
공(원인)   공(원인)       공(결과)
 
 
공한 것 사이의 인과관계가 참다운 연기이다. 컵이나 바가지를 전제하지 않고 “물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물은 공하여 어떠한 고정된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공하기 때문에 인연 따라 여러 모양을 한다. 그렇지만 결코 그 모양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사는 사람을 전제하지 않고 “산속 암자 생활은 극락인가, 지옥인가?”라고만 묻는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다. 그곳은 공하기 때문에, 도인에게는 극락이고 거사에게는 지옥이지만, 그러나 그곳은 극락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곳을 지옥이라는 실체로 본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거나, 그곳을 본인의 입맛대로 개조해야만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숏다리’라 칭해지는 다리의 소유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숏다리는 성공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좌절의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한 젊은이를 세계적인 석학으로 만든 것도 숏다리였지만, 그 숏다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좌절을 안긴다. 그러나 숏다리는 공하여 불행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다. 
 
숏다리  + 갑  →  세계적인 석학
숏다리  + 을  →  끝없는 좌절
 
숏다리는 물과 같다. 물은 컵을 만나면 컵 모양을 하고 바가지를 만나면 바가지 모양을 한다. 숏다리는 갑의 마음 그릇에 담기면 세계적인 석학이 되지만, 을의 마음 그릇에 담기면 좌절을 부르는 저주가 된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좌절을 불러왔다고 해도, 그 좌절은 ‘불생不生의 생生’이다. 신기루와 같고, 마술사가 마술로 공중에 만든 허깨비와 같다. 그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허깨비에 붙들려 꼼짝 못하는 것과 같다. 용수 보살은 말한다. “번뇌는 실제로는 없다.”
 
숏다리 때문에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실체에 근거한 사고방식이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어리석음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는다. 위에서 예로 든 여타의 실체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억울하지 않는가?
 
 
| 누가 너를 구속하느냐? 
당나라 때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에게 제자가 물었다.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해탈은 어떠한 구속도 없는 대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석두 선사는 즉시 대답했다. “누가 너를 구속하느냐?” 눈이 있는 자는 금방 “아!” 하고 알 것이다. 이 간단한 한마디에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천금 같은 진실에 눈을 뜬다. 누가, 무엇이 나를 절망에 빠뜨리는가?
 
제자가 계속해서 물었다. “어떤 것이 정토(淨土,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세계)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히느냐?” 그대를 더럽힌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새삼스럽게 정토를 찾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강의 시간에 석두 선사의 해탈 이야기를 했더니 누군가가 “경찰이 나를 구속합니다.” 해서 강의실 전체가 웃음바다를 이룬 적이 있다.
 
숏다리가 그대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당신의 과거나 집안환경이 그대를 절망시키는 것도 아니다. “누가 그대를 절망케 하는가?” 우선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확신에 찬 답변부터 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거나 타인에게 물어보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이것저것이 필요하다고 앉아서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만 할 뿐,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 왔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저 정도까지 노력하는데 누가 저런 결과를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결국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결과는 없다. 
 
어느 날,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 문하의 수행승들이 고양이 문제로 동쪽 선방과 서쪽 선방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남전 선사는 마침 그곳에 있던 고양이를 붙잡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수행승들을 다그쳤다. “자, 네 놈들이 다투고 있는 실물이 여기 있다. 누구라도 곧바로 고양이를 살릴 수 있는 한마디를 하면 고양이를 살려 줄 것이고, 못하면 당장 죽일 테다. 주저하지 말고 빨리 말하라.”
 
누구 하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남전 선사는 눈물을 머금고 끝내 고양이를 칼로 베었다. 남전 선사는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고 살아 있는 고양이의 목숨을 끊었다. 얼마나 무서운 결단인가? 그는 왜 고양이를 베어야만 했는가? 남전 선사가 벤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끊어도 끊어도 되살아나는 우리의 지독한 망상분별이었다. 
 
남전 선사의 칼날에 숏다리 망상도 자르고, 극락과 지옥의 망상도 자르고, 당신의 과거와 집안환경이라는 망상도 잘라라. 바깥에서 핑계거리를 찾으려는 모질게도 끈질긴 습관을 잘라라. 일체를 ‘단칼에’ 잘라라.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잘랐을 때, 바로 그때 죽은 고양이는 다시 살아나 천하를 활보한다. 목숨 걸고 뛰어들어 남전 선사의 칼날에 잘려 보라!
 
완전히 잘라 자른 흔적조차 없을 때, ‘청풍만지淸風滿地’, 청량한 기운이 온 천하 대지를 뒤덮는다. 이 경지를 알면 고양이를 벤 남전 선사의 경지도 안다. 누가 그대를 절망케 하는가?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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