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기획대담 월암 스님, 이미령 님

2015-06-29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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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불광」은 지난 1월부터 육바라밀을 불자들의 수행 지침으로 이야기해 왔다. 이번 6월호에서는 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 수행을 제시한다. 반야바라밀 수행은 보시부터 선정까지 다섯 바라밀로부터 얻게 되는 실천의 결과이기도 하며, 또 진정한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바라밀의 어머니에 비유한다. 이번 대담에서는 반야바라밀 수행을 불자들이 일상에서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고, 특히 선의 관점에서 반야바라밀은 어떤 의미를 갖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에서 월암 스님(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과 이미령 님(불광교육원 전임강사, 전 동국대 역경위원)이 함께 했으며, 사회는 김성동 편집장이 맡았다. - 편집자 주

| 선禪과 반야바라밀 
사회자  오늘 대담은 반야바라밀을 불자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주제로 마련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반야바라밀은 육바라밀의 마지막이며, 흔히 지혜바라밀이라고 불립니다. 지혜바라밀이지만, 바라밀행 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바라밀행이 삶 속에 용해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혜바라밀은 불자들의 삶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선에서 바라밀을 보는 시선은 어떤지를 중심으로 대담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월암 스님  선은 우리 삶 그 자체입니다. 일상의 삶 그대로가 선이 됐을 때가 바로 선의 황금시대입니다. 일상을 떠나서 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은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기에 어디에도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 화두의 안정을 좌坐라고 합니다. 좌선의 좌坐란 것이 몸의 앉음만이 아니죠. 일하면서 하는 노동선, 농사지으며 하는 농선, 생활 속에서 하면 생활선이죠. 그런데 정작 우리 선방에서는 여덟 시간, 열 시간, 열 몇 시간 좌선만 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의 모습은 퍽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요. 

사회자  지금 선방의 수행문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면,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월암 스님  멀리는 경허, 만공, 용성 스님, 가까이는 성철 스님이 봉암사에서 결사할 때만해도 새벽, 아침, 저녁 정진만 가능했지 나머지 시간에는 앉아서 참선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노동선이었죠. 낮에 일하고, 탁발하고, 나무하고 그랬습니다. 세상이 어려우니 절집, 당연히 어렵죠. 지금은 사회가 그만큼 바뀌었고, 절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절집이 풍요하니 스님들이 좌선에만 몰두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역으로는 살아있는, 24시간 참구하는 선이 되지 못합니다. 동정動靜이 여일하게 함께 겸수兼修되지 못하고 고요한 정靜만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면 화두가 멀어져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동중수행의 약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효과가 크게 반감되죠.

이미령  동정 수행이 여여如如하게 이뤄져야한다고 하는데,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쉽지는 않습니다.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주의를 흩트리는 것이니까요. 세속의 많은 사람들은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 절을 찾고,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앉는 이쪽(禪) 세계를 강하게 열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지금 바쁘게 살고 있는 모습 속에서, 이런 게 선이야.’라고 보여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월암 스님  육조 스님은 “성품을 보아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육조 스님의 정의를 봤을 때는 삶 그대로가 깨어있음으로 갈 때 그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정에 들었을 때만 선정이라고 한다면 입정入定에 들었을 때 선정이고, 출정出定 즉, 정에서 나와 버리면 선정이 아니라는 것인데요. 그것은 제대로 된 선정이 아니지요. 일상생활에 부딪혔을 때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들어가고 나옴이 없는 몽땅 그대로가 선정일 때가 부처님의 선정이죠. 반야바라밀도 그렇습니다. 일상을 떠나 바라밀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육바라밀을 성취하는 대승선
이미령  보통 사람들은 선禪이라고 하면 고요한 것, 적막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선이 갖는 이미지 자체가 모든 것을 다 놔버리는 것, 고요한 것, 이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바쁘게 사는 일상, 그 속에서 선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선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안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월암 스님  규봉종밀 스님이 선을 범부선, 외도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이렇게 오종선五種禪으로 나눴습니다. 그 중 대승선은 육바라밀을 성취하는 선입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 육바라밀을 성취할 때 대승선이 됩니다. 나와 일체중생이 함께 해탈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혼자 수행하지만 혼자만의 선수행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이 함께 수행하고 있는 거예요. 조용한 곳에서 나 혼자 해탈하려고 참선한다? 그것은 바람직한 대승선이 아닙니다. 

이미령  바깥에서 대중들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새벽부터 건물에서 청소하시는 분들께 “당신의 그 모습이 부처님의 모습이다.” 하면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직업의 위상이나 급여가 낮죠. 이런 사회적 구조와 불평등 속에 사는 대중들에게 ‘모두가 본래 부처’라는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이것이 숙제가 아닐까요.

월암 스님  우리는 직선화된 가르침, 계급화된 가르침에 익숙하기 때문에 감히 일체중생이 평등하다는 것을 상상 못합니다. 그래서 펄쩍 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보통 절에 다니는 불자들도 마찬가지죠. “내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말한단 말이죠. 이런 왜곡된 인식, 그걸 깨줘야 해요. 그것이 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인식의 틀부터 틀렸으니까 그 사람들은 아무리 참선해봐야 범부선 밖에 못합니다. 범부를 벗어나는 선이 되지 않아요. 

이미령  그런 사람들이 범부선에 국한된다면 뭐가 안 좋을까요? 범부선에만 만족한다면?

월암 스님  평생 노력해도 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평생 참선하지만, 꿈속에서 성취할 뿐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꿈을 깨는 것입니다. 꿈속의 성취로 만족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꿈 안에서의 성취를 가지고 자꾸 그걸 찬양 고무하는 것은 선이 아니죠.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동안 차제적, 계급적 형식의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틀 깨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부처님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과 역대 조사가 진실로 일러주고 싶었던 말이 있단 말이죠. 그것을 깨닫게 해줘야 돼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작업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 바라밀은 행동하라는 것
이미령  본래적 측면에서 보면, 청소하는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전혀 차별은 없어요. 본래적인 입장에서야 그렇지만, 과연 중생세간에서 실제 차별 없이 적용되는 것인가 하는 겁니다.

월암 스님  바로 그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교육을 깨달은 자가 담당하고, 또 아는 자가 담당해야 합니다. 완전히 깨달아서 그 깨달음의 법을 말하는 자나 설사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법을 아는 자가 여러 방편을 구사해서 하는 수밖엔 없죠. 세속적인 논리구조로 보면 더 가진 자와 더 배운 자가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본래적 입장을 알려주는 교육)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미령  왜 안 하려고 할까요?

월암 스님  그것이 중생의 업이죠. 우리 사회가, 가졌다 못 가졌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그런 틀 속에 갇혀 있단 말이에요. 학교교육에서부터 가정교육, 사회교육에서 모델이 뭐죠?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돈 많이 버는 거, 이것만 부추기고 있잖아요. 교육자들 자체가 거기에 물들어 있는데 누가 하겠어요. 깨어있는 자가 해야지요. 결국 우리 불법佛法의 입장에서 봤을 땐 보살이 해야지요.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가진 자가 해야죠. 우리 중생세계 전체가 물들어 있는데 어쩌겠어요. 그래서 본래적 입장을 알려주는 교육은 깨어있는 자와 아는 자, 즉 보살이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미령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보살의 서원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보살의 서원으로 자신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좋은 점이 있다, 이렇게 목표점을 분명히 보여주면 보살행을 서원하는 데 좀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  보살행은 육바라밀행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육바라밀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서원을 세우는 것인가요?

이미령  서원 세운다는 것 자체가 보살행을 하게 만들죠. 보살행 한다, 바라밀행을 한다는 것은 나 혼자 좋은 경지를 알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왜 저렇게 밖에 못살아?’ 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에게 뭔가를 일깨워줘야겠다. 당신이 결코 무가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줘야겠다.’는 그 마음 한 번 더 일으키는 것이 바라밀의 구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생이라는 관념 속에 가두지 말고, 사람들한테 이런 소식을 들려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보살이 내게 깨달음을 주고, 내 답답함을 없애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합니다. 오히려 보살은 이웃에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일깨워주는 우리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 파사현정이 필요한 이유
월암 스님  우리 종단의 포교 방법과 내용을 바꿔야 합니다. 중생으로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지금 핍박받고, 가난하고, 월급도 적어 생계를 걱정하지만, ‘나는 본래부처다.’라는 긍지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긍지를 심어주면 무한한 자기에너지, 본래부처로서의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러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힘이 납니다. 어둠을 하나하나 제거해야지 광명이 온다? 그거 아니잖아요? 해가 뜨면 깜깜하던 밤하늘에 그대로 광명이 비추는 것이지, 점점 노력해서 밝게 한다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자꾸 앉아서 마음 집중하고, 조용한 데 찾아가서 공간 이동하는 것을 참선이라고 하고, 명상이라고 알려주고 있단 말이죠.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부처 자리에 그대로 앉는 그 법法을 일러줘야죠.

이미령  앉은 자리라 하면, 예를 들면 제가 일하고 있는 그 자리가 부처 자리고 좌선 자리라는 것이지요? 

월암 스님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하잖아요. 항상 있는 그 자리 목전에서 주인이 되라는 말이, 부처로 살아라,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일러줘서 무한한 긍지를 갖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등부터 꼴등까지 점수를 매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꼴등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점수에선 꼴등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일등할 수 있단 말이에요. 또 학교 점수는 일등이지만, 다른 분야에서 꼴등일 수 있다고요. 수학에서는 꼴등이지만, 다른 운동에서 일등일 수 있는 거죠. 각자의 기질을 살려 서로 이익이 되는 그런 문화가 불교입니다. 사회에서 인정 못 받는 직업에 있더라도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게끔, 본래부처로 살 수 있게끔 하면 됩니다. 이러한 정신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불교밖에 없어요. 

이미령  예를 들어 사회에서 정말 인기 없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러니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십시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해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상은 서열을 나누는 사고방식에 완전히 익숙해졌단 말이죠.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에 핍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죠. 노후도 불안하고요. 그들에게 “당신은 본래 부처”라고 하면 본래적 측면에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사회 구조에 울려야 할 메시지가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월암 스님  그래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신적 차원에만 머물게 된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삿된 행위를 파하는 보살행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를 미움의 대상으로, 부숴야할 것으로 삼는 게 아니라, 너마저도 함께 가야 한다, 라는 마음과 행동으로 분연히 일어날 때 보살행이 되는 것이죠. 함께 바라밀을 성취해야 할 동업중생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삿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밖엔 모르니까 자기만의 성城을 어떻게든 지키려하겠죠. 하지만 나는 이미 그걸 알았잖아요. 나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하는 책임이 있잖아요. 무한한 자비로 그 사람을 섭수함으로써 끊임없이 바꿔야하는 것, 그것이 파사현정입니다. 중생의 번뇌는 끝이 없기 때문에 언제 이뤄질지는 모르지만, 물러남 없이 보살행 하는 것이 본분납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 『육조단경』의 마하반야바라밀법
사회자  반야바라밀이 선에서는 ‘본래 부처’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입니다. 바라밀행이란 것은 결국 보살행이고, 보살행이란 것은 나의 인식 영역이 중생으로 확장되는 것이니까요. 생활 속에서 살아있는 바라밀행이란 것도 선이 보여주는 ‘지금 이 자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월암 스님  좌선 속에서만 선정이 있다고 하면 유리병에 갇힌 새일 뿐입니다. 유리병 속 새가 살아있나요? 죽은 거지요. 내가 좌선 속에서 최고의 경지를 얻었다 한들 현실 속에 나가서 무너져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욕설이 다가오고, 폭력이 다가오고, 고된 시련이 다가오는 그 경계 속에서도 내가 활발발活潑潑해야 진짜 선이죠. 『육조단경』에서 육조 스님이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법에 해당되는 것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입니다. 무념은 생각하되 생각하는 법 없다는 것이죠. 무상은 일체 상을 알지만 상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무주는 우리 생명의 속성으로 머무는 것 없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란 말도 나와요. 무념・무상・무주로써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게 『육조단경』에 나오는 반야바라밀입니다. 광덕 스님이 우리의 삶과 연결해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바로 그것이죠. 실제 살아있는 반야바라밀이 되기 위해선 우리 삶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 생활, 삶이 그대로 반야바라밀로 돼야 합니다. 

이미령  제가, 그리스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주인공은 열심히 부처님의 경지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청년인데, 그의 조수라 할 수 있는 억센 남자 조르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신비에 대해서 연구하지만, 나는 신비를 살아버려요.” 왜 우리 보살과 불자들은 붓다의 경전을 연구만 하지 붓다가 말하는 삶으로 살아볼 생각 안 해봤을까? 바라밀로서의 삶, 살아있는 생생한 삶으로서의 체험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월암 스님  바로 그 말이죠. 선은 설명이 아니죠. 그냥 드러내고 그렇게 사는 것이죠. 『금강경』에서 공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공을 설명하고 있듯이 반야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삶이 반야바라밀로 승화되어 드러날 때 참된 반야바라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미령  제가 부처님의 생애 강의를 자주 하고 있습니다. 강의 시작할 때 “성불하세요.” 합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 되고 싶습니까?” 하면 “에이~” 합니다. 왜 그럴까, 왜 다들 도리도리 하는가. 우리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가 되려면 지금 당장 머리 깎고 출가해야 하고, 당장 비우고 부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도리도리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어떤 직업을 갖고 있다면, 가령 내가 요리사라면 요리사 부처님, 청소부면 청소부 부처님이 되어야 하는데 왜 저 2,500년 전 히말라야 부처님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성불하세요.”라고 말하는데 정작 행동으로는 도리질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월암 스님  ‘즉시현금갱무시절卽時現今更無時節’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 눈앞을 떠나서 다른 좋은 시절 없다, 이 상황 그대로 부처가 되면 되지, 3아승지겁 지나 부처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죠. “성불하십시오.” 하면서도 3아승지겁 수행 통해 기나긴 세월 지난 뒤에 부처님 된다는 관념론에 빠져있습니다. 이 관념론을 바로 부숴버리고, 지금 이대로 부처로 살아가려고 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을 갖고 수행해야 합니다.  

이미령  현재의 모습과 처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정립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월암 스님  그래서 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정견定見을 확립하는 겁니다. 두 번째가 발보리심이죠. 발보리심이 뭐예요? 일체중생과 함께 하겠다, 이것이 발보리심입니다. 그 다음에 실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정견과 발심을 전제로 두느냐? 바로 생각을 바꿔버리는 것이거든요. 생각 바꾸지 않고 참선해봐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더 빨리 돌고 편하게 도는 법만 배웁니다. 쳇바퀴를 나가는 법, 그게 정견 확립이고, 반야바라밀로 가는 길입니다.

 


월암 스님
1973년 경주 중생사에서 도문道文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중국에 유학하여 북경대 철학과에서 『돈오선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백양사, 화엄사, 봉암사, 정혜사, 벽송사 선원 등에서 수행했다. 지금은 경북 문경 한산사에서 선농겸수禪農兼修로 한국 간화선 선풍 진작에 노력하고 있다. 선의 대중화를 위한 책, 『친절한 간화선』을 냈다.





 

이미령.
불광교육원 전임강사로 동국대 역경위원을 지냈다. 현재 YTN라디오 ‘지식카페 라디오 
북클럽’과 BBS 불교방송에서 ‘경전의 숲을 거닐다’를 진행하고 있다. 또 불교서적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 수행 입문』, 『붓다 한 말씀』,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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