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은 공공의 것이다

2015-06-13     불광출판사

(재)대한불교조계종 선원수좌복지회 대표이사. 양평 용문선원 선원장 의정 스님 명함에 찍힌 직함이다. ‘수좌’와 ‘복지’란 단어가 조합해 만든 조어가 낯설다. 수좌는 화두 참구하는 출가수행자다. 수좌란 단어에는 몸으로 직접 부딪쳐 연마한다는 체구연마體究鍊磨의 정신이 담겨있다. 수좌는 인간의 고통,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냉정하고 침착하게 내심자증內心自證하는 실천가이다. 이를 위해 가家의 윤리를 버린 것이다. 한국선韓國禪의 중흥조 경허 스님이 “옷이 헤어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 먹세.”라고 노래한 것처럼 수좌는 가난과 간소한 삶의 형태를 지복至福으로 삼았다. 

많은 수좌스님들이 승가공동체 밖으로 내몰려지면서 가난과 소외는 강요됐다. 승가공동체의 물적 토대가 소수에게 집중된 결과다. 강제된 지복은 존엄의 훼손일 뿐이다. 굳이 의정 스님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한국불교에서 일상적 대중생활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안거 때 전국 선원에서 2천3백여 명의 수좌들이 대중생활을 하지만, 해제가 되면 1천여 명의 대중은 대부분 개인 토굴로 향한다. 산철 결제하는 150여 명을 제외한다면, 수좌스님의 50%인 1천여 명이 떠돌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굳이 선원 수좌스님들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많은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이 실질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이다. 

의정 스님은 고민했다. 부끄럽지만 현실을 그대로 볼 수밖에 없다. 가난과 소외로 내몰려져 병들고 있는 수좌스님들에게 최소한의 치료비를 지원해야 했다. 구참 수좌스님들과 의논하여 선원수좌복지회를 만들었다.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것이 임시방편임을. 문제는 승가공동체의 회복인 것을. 개인 토굴은 갈수록 늘어나고, 사찰에서는 객실이 사라지고 있다. 대중생활은 이제 몸에 익숙하지 않다. 아는 사람이 없으면 사찰에 머물기 어렵고, 경제적 여건이 되면 개인 토굴을 만든다. 납자들이 해제가 되면 짐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 값싼 여관을 빌린다. 수좌스님의 현실지만, 한국불교의 오늘이고, 민낯이다. 

경허 스님 이후 근대 선승들은 청빈과 결기의 삶이 가능했다. 사찰의 객실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했다. 의식주가 부족해도 대중생활에서 해결해 나갔다. 신심있는 단월檀越의 시주로 모자람을 채웠다. 작은 승가공동체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그 승가공동체가 깨지고 있다. 승가의 공공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릴 채우고 있는 것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며 문중주의門中主義다. 자본주의와 유교주의가 불교정신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승가 공공성의 부재는 출가수행자의 자존을 갉아먹는다. 최소한의 의식주가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당연히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로서 위의는 설 곳이 마땅치 않게 된다. 선禪의 강력한 실천가인 수좌스님들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승가의 존립 근거를 다시 묻게 한다. 

의식주의 기반인 사찰을 공공화해야 한다. 물적 자원의 공공화가 필요하다. 세속에서조차 국민의 기본적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한다. 국민의 존엄성을 지켜주지 못하면 이미 국가가 아니다. 스님들 모두 기본적 의식주 위에 존재해 있어야 한다. 모든 사찰에서 모든 스님들이 자유롭게 의식주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모든 사찰에 모든 스님이 주인인 곳, 모든 사찰에서 모든 스님들이 옷과 밥과 잘 곳을 주고 받는다. 주主가 객客이고, 객客이 주主가 되는 곳이다. 사찰은 그런 곳이다. 사찰은 공공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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