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회에 담긴 대동의 공동체정신

부처님오신날 특집 | 연등회 | 더불어 함께 즐기는 공동체

2015-06-13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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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진리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 『예기禮記』

| 연등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자발성과 정성
최근 몇 년 사이에 ‘지역공동체’, ‘마을공동체’, ‘생활문화공동체’ 등의 이름을 단, 공동체 관련 프로젝트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공동체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각박한 오늘의 현실에서 그 옛날 농촌공동체의 ‘더불어 살던’ 문화가 그립고도 절실한 탓일 겁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려서 그렇지, 과거에는 지역공동체 단위로 참 많은 부분을 자치적으로 해결하며 살았습니다. 그 안에는 관심과 배려가 있었고, 주인의식이 살아 있었고, 물질적 가치보다 인간적 관계를 큰 가치로 여겼던 윤리가 있었지요.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공동체문화의 핵심은 ‘자발성’과 ‘공익성’이라는 점입니다. 주민들의 욕구를 기초로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주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협력을 토대로 사업을 풀어가야 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공동체문화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연등회의 공동체성을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작은 공동체가 ‘자발성’을 바탕으로 얼마나 활력 있게 운영되는지, 눈여겨 볼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찰과 신행단체마다 ‘이번에는 어떤 행렬등을 만들까?’를 고심하는 시기부터 연등회의 막이 올랐다고 봐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기점으로 6개월에서 석 달 정도 앞둔 시기입니다. 말이 고심이지 실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난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더 멋진 등을 만들까,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과정부터 즐거움이 살아있습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쏟아내고, 저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거리들을 찾아 나섭니다. 굳이 조를 짜지 않아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등을 빚습니다. 누군가는 연잎을 말고, 누군가는 한지에 물을 들이고, 연륜 깊은 이는 초보자에게 등 만드는 노하우를 들려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신심도 무르익어갑니다. 

이렇게 합심해서 정성으로 만든 등은 연등행렬 현장에서 들고 걸어갈 때 크나큰 자부심이 됩니다. 행렬 구성원의 숫자가 적은 팀들조차 연등행렬 현장에서 기운생동의 에너지를 뿜어 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이 때문입니다.

동국대학교 대운동장에서 펼쳐지는 어울림마당의 열기를 체험하지 않고선 연등회를 다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어울림마당은 연등행렬의 참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행렬 전, 열기에 불을 지피는 과정입니다. 사찰과 단체마다 입장식부터 눈길을 끕니다. 그리곤 연희단과 율동단의 공연이 신명나게 펼쳐지지요. 실제 이들이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는 건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한곡의 노래에 율동을 담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한두 달이 넘는 시간을 들여 연습을 거듭합니다. 혼신의 연습을 하는 사이, 이들은 하나가 됩니다. 동국대 대운동장의 땡볕 아래에서 모두가 그토록 흥겨울 수 있는 건, 각각의 팀들이 우리처럼 하나가 돼 열심히 준비했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대운동장 안에서 이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정성스러움으로 연등회를 준비한 단체들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서로 뜨거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겁니다. 


| 공동체정신이 살아있는 민족명절 4월초파일
국어사전에 ‘초파일’은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음력 4월 8일로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다. 이날에는 파일등을 단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4월초파일을 불교행사라는 흑백논리로 금 긋기 이전까지 기실 4월초파일은 역사 이래 민족의 ‘명절’이었습니다. 4월초파일은 종교가 없어도 절에 가서 복을 비는 날이자, 등을 달고 탑돌이를 하는 날이었지요. 오늘날 연등회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에도 공영방송 KBS에서 매년 4월초파일이면 봉축기념식과 연등행렬을 생중계했을 정도로 4월초파일은 틀림없는 민족적 명절이었습니다. 

명절이란 설날이나 추석처럼 ‘해마다 일정하게 지켜서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연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큰 농경 사회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게 명절이지요. 농사주기의 틈새에서 하루 쉬면서 활력과 재충전을 하는 의미도 지닙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공민왕 당시 4월초파일의 풍속을 담은 기록이 전해집니다. “왕이 호기동의 놀이를 대궐뜰에서 구경하고 포 100필을 하사하였다. 여러 아이들은 종이를 오려서 장대에 붙여 기를 만들어 도성안의 거리와 마을을 돌며 외치면서 쌀과 베를 구해 그 비용을 삼았다. 이를 호기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를 앞두고 어린이들이 모여서 등 만들기에 쓰일 재료를 구하는 호기놀이를 즐겼습니다. 호기희呼旗戱, 호기동희呼旗童戱라고 불렀던 이 놀이는 왕이 관람할 정도로 연희적인 면모가 강했던 듯합니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용재총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집니다.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깃발을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떼를 지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등불 켜는 재료를 구걸했다.”

오늘날에도 동제의 경비를 추렴하기 위해서 지신밟기를 하면서 풍물을 치듯이 호기놀이 역시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외치며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요. 최남선은 이를 연등회 시작 전의 정화의례였을 것으로 추정했고, 편무영 역시 2월 영등놀이에서 무당이 흰 천이나 종이를 매단 나뭇가지를 갖고 주문을 외며 집집마다 방문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보았습니다. 해맑은 어린이들에게 정화기능이 맡겨졌다는 것이죠. 더구나 행사를 앞두고 몰려다니면서 놀이를 즐긴 것은 연등회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감초 같은 역할이었을 것으로도 보입니다. 

더불어 함께 즐기는 공동체 놀이였던 만큼 그들만의 준비과정이 있었을 터이고, 그들만의 놀이에 규칙이 있고, 기승전결이 있었겠지요. 어린이들이 모여서 호기를 만들고, 등 재료를 모금을 했다면 그렇게 모금된 공동비용으로 마을주민들은 함께 둘러앉아 함께 등을 만들었을 겁니다. 전통적으로 4월초파일을 앞두고 가족이 둘러 앉아 가족의 숫자만큼 파일등을 만들곤 장대에 새끼줄을 매어 줄줄이 등을 매달았습니다. 집집마다 장대를 세워 등불을 걸면 층층이 달린 그 많은 등불은 마치 하늘의 별이 펼쳐진 듯했고, 조선 사람들은 그 장관을 밤새도록 구경하기 위해 이날 통금을 해제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날은 ‘파일빔’을 입었습니다. 4월초파일은 남성들이 모시진솔 두루마기에 상침겹옷을 챙겨 입는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영롱한 색동반배 파일빔을 챙겨 입혔습니다. 개인적인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절을 찾았지요. 절에 간 길에 복을 빌며 등을 달고, 탑돌이도 하고, 근처 계곡에서 화류놀이를 즐겼습니다. 볼거리가 드물던 시절, 사찰은 문화공간으로 변모해 만석중놀이와 수부희水缶戱에 사당패의 연희까지 선보였습니다. 연등이 장관을 이루는 밤엔 줄불놀이도 행해졌고 민가에선 증편과 검정 콩 볶은 것, 쑥버무리 등을 이웃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4월초파일의 절식節食이었죠. 

이처럼 4월초파일은 불교인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오던 민족의 명절이었습니다. 다달이 이어지던 명절들이 스러져가는 21세기지만, 지금도 4월초파일 연등회는 시대에 걸맞게 변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공동체문화를 이어오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기려지고 있습니다. 전통을 이어가되 획일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지역마다 단체마다 저마다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하면서 오늘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서 행복해지는 축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넘치는 축제가 연등회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심으로 우리가 되는 대동의 세계가 바로 연등회입니다. 


이윤수
방송작가. ‘연등축제의 역사와 문화콘텐츠적 특성’이라는 제목의 연등회 축제 관련 학계 최초논문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강단에서 수년 째 문화콘텐츠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KBS1라디오에서 23년째 매일 방송 원고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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