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

공空(2)

2015-06-13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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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空山


홍길동이 태어났을까, 태어났으니 홍길동일까? 미운 놈을 피해야 할까, 피해야 할 미운 놈은 없는 것일까? ‘홍길동이 태어났다’는 말은 태어나기 전부터 홍길동이 있었다는 뜻이고, ‘태어났으니 홍길동이다’는 태어남을 통해 비로소 홍길동이 된다는 뜻이다. ‘미운 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하게 고정된 미운 놈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피해야 할 미운 놈은 없다’는 그런 고정된 미운 놈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다. 전자는 부파불교(설일체유부)의 사고방식이고, 후자는 대승불교의 사고방식이다. 두 사고방식 모두 ‘연기’라는 동일한 이름의 교리 아래에서 전개된 결과물이다. 왜 이처럼 차이가 나타나며,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 비유의 한계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 불교는 “나는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에 붙여진 명칭일 뿐이다”라고 답한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한다. 색色은 육체를 말하며, 수受는 좋고 싫다는 등의 느낌, 상想은 이미지와 개념을 형성하고 언설을 일으키는 작용, 행行은 의지 작용, 식識은 마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 결국 오온은 육체와 정신을 다섯으로 세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색이 육체이며 나머지 넷은 정신에 해당한다. ‘가화합假和合’은 인연에 의해 임시적으로(假)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和合)는 뜻이다.

‘나’라고 불리는 것의 진상은 오온의 가화합일 뿐이다. 다시 말해,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요소(오온)가 인연에 의해 임시적으로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인연이 다하면 다섯 요소의 화합도 다하고 ‘나’도 없어진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요소 가운데 영원하며 변치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몸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기쁨도 잠깐이며 영원한 미움도 없다. 

이 오온이 가화합되어 있는 상태를 편의상 ‘나’라고 부를 뿐이다. 따라서 영원히 머무르며 변치 않는, 즉 상주불변常住不變의 ‘나’가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상주불변의 ‘나’는 없다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잡아함경』에 수레와 ‘나’의 대비를 통해 무아無我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여러 부속품을 조합한 것을       
세간에서 수레라 하는 것처럼,    
오온이 인연에 의해 화합한 것을  
임시로 ‘나(我)’라고 부른다.       
如和合衆材
世名之爲車
諸陰因緣合
假名爲衆生

바퀴・축・손잡이 등 여러 부품을 조립한 것을 두고 수레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부품들이 해체되면 수레도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것도 색・수・상・행・식의 다섯 요소가 인연에 의해 임시로 화합되어 있는 것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 인연이 다하여 이 다섯 요소가 흩어지면, 수레가 없어지듯이 ‘나’도 없어진다.

수레가 바퀴 등 여러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 연기의 소산물이듯이,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오온의 화합이라는 조건에 의존한 연기적 존재이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상주불변의 ‘나’란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이다. 위의 게송이 보여 주고자 하는 이러한 내용은 초기불교시대부터 설해져 왔다.

그런데 이 설명을 이렇게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수레로 조립되기 전부터 바퀴・축 등의 부품은 이미 그대로 있었다. 수레를 해체해도 그 부품은 그대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 각각은 ‘나’가 생기기 전에도 그대로 있었고, 없어진 뒤에도 그대로 있다.

문제는 수레와 부품의 관계는 위와 같이 생각할 수 있지만, ‘나’와 오온의 관계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몸과 이 감정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사후에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인공물인 수레와는 달리,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은 그것이 있다고 하면 이미 누군가의 오온으로 있을 뿐, 누군가를 떠난 오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위의 비유를 통해 오온이 누군가의 출생 전이나 사후에도 변함없이 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비유는 무아를 이해시키는 데는 유효했을지 모르나 사실과는 다른 터무니없는 오해를 낳는 부작용을 가져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비유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런데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이와 유사한 오해를 하고 말았다. 그 오해의 연장선에서 구축된 그들의 사고방식은 상당 부분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많이 닮아 있다. 설일체유부를 줄여서 ‘유부有部’라고도 부른다. 대승의 공空사상은 유부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공을 이해하는 것은 유부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진단하고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 공空・자성自性・연기緣起
‘공空’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어는 순야śūnya 또는 순야따śūnyatā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에 대한 한자 번역어인 공空의 의미는 ‘비었다’이다. 이 방이 텅 비었다고 하면, 이 방에 사람이나 기물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도 원어의 의미를 ‘공’이라는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그럼, 무엇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인가? 바로 자성(自性, svabhāva)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은 모든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無自性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다음의 예를 통해 자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삼각형 모양을 한 물이 있다고 가정하자. 보통은 물이 삼각형 모양을 하려면 삼각형 용기에 의존해야 한다. 연기의 이치에 의해 삼각형 모양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이 물은, 어떤 다른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게다가 컵에 넣어도, 바가지에 넣어도, 어떤 조건에서도 모양을 바꾸지 않고 삼각형 모양 그대로 있다. 이런 물이 있을까?

어떤 이는 그런 물은 없어도 삼각형 모양의 얼음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다른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얼음은 어디에도 없다. 삼각형 용기에 넣거나 해서 얼려야 한다. 삼각형 모양은 고사하고 얼음이 되는 데도 섭씨 0도 이하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우선 얼음이 되기 위해서도 다른 것에 의존해야만 한다. 일단 삼각형 얼음이 되고 난 뒤에도 끓는 물에 넣거나 망치로 치면 그 상태는 소멸하고 만다. 

이와 같이 삼각형 얼음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어떤 조건에서도 변치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결단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그것을 자성自性 또는 아我라 부른다. 철학 용어로 말하자면 실체實體에 해당한다. 범부가 생각하는 상주불변의 ‘나(영혼)’, 즉 ‘아’는 자성의 대표적 개념이다. ‘아’가 자성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은 ‘아’의 개념을 ‘나’에 국한하지 않고 사물 전체로 확대시킨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한다. 삼각형 모양의 물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었듯이, ‘자성’ 또는 ‘아’는 없다. ‘자성’은 마치 토끼뿔과 같다. 토끼에게는 뿔이 없다. 그러나 ‘토끼뿔’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토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토끼뿔’이라는 말만 들으면 토끼에게 뿔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자성은 토끼뿔과 같은 착각의 소산물이다. 그래서 ‘무자성無自性’이라 하고 ‘무아無我’라 한다. ‘공’은 바로 이 무자성을 의미한다. 

한편 연기와 자성은 서로 반대 개념이다. 연기가 ‘조건(다른 것)에 의존한 성립’을 의미하는 반면, 자성은 ‘조건을 필요치 않는 자립적 성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기를 인정하면 자성을 인정할 수 없고, 자성을 인정하면 연기를 인정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연기했다는 것은 그것이 무자성이라는 말이고, 이 무자성을 공이라 한다. 따라서 연기, 무자성, 공은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공이 연기의 동의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불교에서 자성이 ‘불성佛性’이나 ‘진리’ ‘본래의 모습’을 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착각・허상의 부정적 이미지의 자성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사상을 설하는 경전인 『대반야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일체법은 공空을 자성自性으로 한다. 일체법은 무자성無自性을 그 자성으로 한다.” 이때의 ‘자성’도 역시 영원불변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무자성’이라 할 때의 ‘자성’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자성이 “공・무자성을 자성으로 한다”는 문장 속에서 사용됨으로써, 공의 반대인 부정되어야 할 ‘자성’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공・무자성이 영원한 진리임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자성’으로 차원을 달리 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자성은 ‘불성’이나 ‘진리’를 의미하게도 되었다. 인도에서 용수의 공사상을 선양해 갔던 것이 중관학파이다. 그 거장 중의 한 사람인 월칭(月稱 Candrakīrti, 600-670년경)도 자성을 ‘진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성이 ‘불성’ ‘진리’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고 있을 때라도, 그 ‘불성’ ‘진리’ ‘본래의 모습’이란 ‘공’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을 자성으로 하는’ 불성이며 진리인 것이다. 적어도 대승불교에서는 그렇다.


| 열반과 윤회의 차이
이제부터 유부의 사고방식에 대해 살펴보자. 유부의 교리체계는 매우 복잡하다. 이해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하여 유부 교리의 핵심을 재구성해 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유부는 오온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 변치 않고 존재한다고 보았다. 공사상의 핵심을 설하는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 즉 “오온은 모두 공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유부에서는 ‘오온개공’이 아니라 ‘오온개유五蘊皆有’였던 것이다.

유부는 경전에 설해져 있는 여러 교설들을 자신들의 이해방식에 따라 조직한 결과, 일체의 존재를 ‘5위位 75법法’으로 체계화했다. 여기서 ‘법’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물질적・비물질적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요소’를 말한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구성되어 있듯이, 모든 것은 이 75가지 법 중의 어느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75법 가운데는 당연히 오온도 세분화된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 ‘5위’란 75법을 성질상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다섯 범주로 분류한 것이다.

유부는 75종의 이 법들이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자신만의 본질을 스스로 유지하면서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75법 하나하나는 바로 ‘공’에 의해 부정되어야 할 ‘자성’ ‘실체’에 해당하는 개념이 된다. 75종에 달하는 개개의 법들은 제각기 독특한 본질과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구분이 되며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유부가 말하는 ‘연기’란 실체인 이들 ‘법’ 사이의 인과관계, 바로 그것이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란 ‘일체가 실제로 있다고 설하는 부파’를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일체란 책상이나 철수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 단위인 75법을 말한다. 철수를 예로 들어 말하면, 철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나 철수의 마음, 그 마음이 일으키는 탐욕 등의 여러 심리작용이 75법에 속한다. 따라서 철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탐욕 등은 있었고, 현재는 물론 철수의 사후에도 그것들은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철수는 태어나서 죽는 ‘공’이지만, 철수를 구성하는 요소인 ‘법’은 ‘실체’로서 늘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은 생겼다가 없어지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수소와 산소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유부의 이러한 생각을 ‘아공我空법유法有’라 부른다. 여기서 ‘아’는 철수나 책상 등을 말하고, ‘법’은 75법을 가리킨다.

유부가 말하는 75법 중에는 열반(유부는 ‘택멸擇滅’이라 불렀다)도 있다. 따라서 열반은 본질상 윤회와 다르며, 그 열반은 어딘가에 늘 있다. 마치 현실을 떠난 어딘가에 유토피아가 늘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당신도 열반을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공사상을 대성한 용수는 말한다. “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 “열반은 윤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무상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 현실을 떠나 열반은 없다. 이 현실의 실상을 바르게 아는 것이야말로 열반이라고 한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을까? 지면 관계상 다음 호에서 이야기하겠다.

다음 호부터는 구체적 항목을 하나씩 들어 가며 유부와 공, 양자의 사고방식의 차이와 실천의 차이, 그런 차이를 낳게 된 이론적 배경을 밝히고자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곧 우리의 사고방식을 진단하고 바로 잡는 일이다. 이번 호에서 생소할지도 모르는 교리에 관한 설명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일상생활에서 응용력과 대처 능력을 함양하기는 힘들 것이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