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사이로 걸어가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 통영 미래사 눌암

2015-06-13     불광출판사
6.png
 
7.png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나는 꽃과 잎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각자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꿔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보기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지나가요. 제가 이 자리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난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듣기를 바랍니다.” 영화 ‘법정 스님의 의자’가 들려주는 스님의 육성이다. 이생의 인연 거두고 떠나신 지 다섯 해. 다시 봄날이다. 꽃과 잎들이 전하는 침묵의 법문을 들으러 길을 나선다.


|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의 의자를 만나다
여기가, 내가 살 만한 곳이구나. 1975년 4월 19일, 때마침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를 보며 스님은 썼다. 비 오는 날이었다. 비에 젖은 흙과 공기는 봄의 습도와 냄새로 짙었으리라. 그때는 이곳이 자정암慈靜庵이었다. 자정암을 헐어 나온 재목과 기와로 불일암 아래채를 지었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축축한 봄기운 속에 대나무 길을 돌아 불일암佛日庵에 당도한다. 스님 거기 계시는 듯, 댓돌 위에 흰 고무신 가지런하다. 굴참나무 자투리장작으로 만든 법정 스님의 의자가 그대로다. 의자에는 오가는 이들을 위한 사탕바구니가 놓였다. 사탕을 입에 물고 군말은 삼키라는 다정한 채근이다. 그 위로 한 줄기, 스님의 미소가 걸려 있다. 

밀물처럼 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저마다 기념사진 촬영에 분주하다. “하나, 둘, 셋, 오케이!” 벌거벗은 후박나무가 옹이눈을 뜨고 굽어본다. 성벽처럼 불일암을 감싼 푸른 대숲이 쏴아-쏴아- 바람에 몸을 씻는다. 후박나무 그림자가 해를 따라 흐른다. 머뭇거리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는다. 그저 비추는 대로 나툴 따름이다. 말 없는 법문이다. 다가가 보니 나무 아래 표지석에 스님의 흔적이 적혔다.

법정 스님 계신 곳.
1932. 10. 8 ~ 2010. 3. 11 
스님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아래 유골을 모셨다.

비구 법정法頂. 1932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홀어머니에 외아들로 자라 숙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대학을 다녔다. 전쟁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청년을 휩쓸고 지나갔다. 틈날 때마다 절을 찾던 그가 스물셋에 출가를 결심하고 강원도로 떠난 길이 폭설로 끊겼다. 서울 안국동에서 효봉 스님과 연이 닿는다. 효봉 스님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판사였고, 당시에는 해인총림 초대방장이었다. 법정 스님이 털어놓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과 출가의 뜻을 묵묵히 듣고 효봉 스님은 말한다.

“중노릇이라는 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신심이 금강같이 굳지 않고서는 견뎌내기가 힘든 법이지. 대저 한번 출가를 하면 사자의 기상과 코끼리의 힘으로 인정을 끊어야 하고, 일구월심으로 부처님의 출가한 뜻을 알아 부처의 행동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당대의 대선사 효봉 스님 문하에 출가한 행자 법정은 통영 미래사에서 스님을 모셨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효봉 스님과 함께 보낸 겨울안거였다고, 법정 스님은 회상한다. 젊은 시절 은사 곁에서 배웠을 수행자의 청빈과 선禪의 세계는 스님의 문장들에 오롯이 담긴다. 불일암의 두 평 차방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은 스님이 홀로 차를 달이며 글을 짓는 공간이었다. 『무소유』, 『텅 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오두막 편지』, 『인도기행』, 『혼자 사는 즐거움』과 같은 책들이 그렇게 세상에 나와 어지러운 시대의 대중들을 맑게 깨웠다. 책의 인세는 남김없이 고학생들의 장학금이 되었다. 

그 일을 여기 불일암의 나무와 꽃들이 거들었을 터. 불일암을 내려오는 길, 법정 스님의 수많은 은사들이 침묵의 법문을 들려주고 있었다.

8.png
 


| 법정 스님 출가터, 통영 미래사
통영 미륵도로 향한다. 불일암으로부터 차로 두 시간 거리에 비구 법정을 길러낸 출가터, 미래사가 있다. 육지에서 멀지 않아 지금은 다리로 이어졌다. 섬 안에서 읍내를 가로지르고 한려수도의 비경이 한 눈에 보이는 해안도로를 지나니 숲길이다. 불일암이 법정 스님이 손수 터를 보고 지은 암자라면 미래사는 효봉 스님의 제자들이 은사스님을 위해 터를 찾아 마련한 절이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이듬해, 효봉 스님과 제자들은 통영으로 왔다. 섬 이름도 미륵이요, 산 이름도 미륵이었다. 

다리를 건너 미륵도에 들었는데 미래사 앞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넌다. 인공연못을 건너게 해 놓았다. 미래사는 섬 위의 섬인 셈이다. 아담하고 정갈한 도량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별 없이 찾아온 객에게, 주지스님이 무심히 차 한 잔을 권한다. 암자를 찾아왔다고 하니 스님이 도반 스님과 함께 앞장을 선다. 

미륵회상의 남쪽 해안, 편백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으로 심어진 나무들이다. 편백은 수분이 침투하기 어려워 배를 짓기에 좋다. 육로를 따라 남으로 내려온 문화재와 자원들이 여기서 실려 갔을 것이다. 강점과 전쟁의 세월을 감당한 편백나무 숲에 효봉암을 짓고 효봉 스님과 법정 스님이 살았다. 

행자 법정이 설거지하는 물에 시래기와 밥알 몇 개가 눈에 띄자 효봉 스님이 얼른 찬물에 씻어 들이킨다. “다음엔 함께 마시랴?” 어느 날엔 일 나갔다 그만 점심공양시간에 늦는다. “수행자가 공양시간을 어기다니, 오늘 점심공양은 안 할란다.” 그 길로 행자 법정은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가 오후 내내 참회의 노동을 한다. 해질 무렵, 은사스님은 가만히 국수를 내온다. 후일에 불일암을 찾은 사람들에게 법정 스님은 곧잘 국수를 내주곤 했다. 말없이 이어진 스승의 사랑이다.

반백년을 넘게 자란 편백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한낮인데도 짙은 그늘이다. 암자는 미래사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현판에 적힌 글자는 ‘눌암訥庵’이다. 원래의 효봉암은 눌암 옆에 암자터만 남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미륵불 입상 전망대에서 암자가 훤히 들여다보여 자리를 옮겼다고 전한다. 눌訥. 말을 더듬다, 과묵하여 말을 경솔하게 하지 않다, 라는 뜻이다. 시대의 문장가를 키워낸 단어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 이렇게 쓰고 있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다. 
- ‘침묵의 의미’ 中

법정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남도로, 통영으로 이어간 순례길. 불일암은 암자를 지키는 제자들의 손길로 정갈했고, 미래사 눌암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고즈넉했다. 눌암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법정 스님의 눈빛처럼 푸르고 고요한 그 바다를 등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깊은 침묵이 스며 있었다.



9.png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