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집에 왔구나

2015-06-13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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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 나가 사는 사람들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다시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귀향을 결심하는 경우에도 적극적인 선택보다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대부분이다.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하거나, 몸이 만신창이가 되거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얻고 난 다음에야 귀향을 결심한다. 

불교는 마음의 근본을 돌아보는 종교라는 점에서 흔히 존재의 본향에 비유되기도 한다. 누구라도 쫓기는 삶의 긴장을 내려놓고 존재의 고향을 돌아보려는 충동을 느끼지만, 실행에 옮길 기회를 좀체 가지지 못하다가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고서야 자각을 얻어 결심에 옮긴다. 나 역시 별 수 없는 존재라서 이것저것 만신창이가 다 되어서야 “이게 사는 건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무서운 생각이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고민 없이 살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고민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여러 종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의 종교인 가톨릭과도 친숙한 편이었고, 신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성경 공부에 빠진 적도 있었고, 불교 경전도 기본은 읽었었다. 민족종교든 외래종교든 종교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만은 본격적으로 가까이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내게 불교를 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는 낡고 지쳐있고 퇴락해 보였다. 근대 사회의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미스런 소문만 무성했고, 수시로 일어난 법난 소식은 아수라장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산중 낡은 시설에 고리타분한 전통은 개화되지 못한 후진적 인상을 주었다.

사찰이 많고 불교 신도가 흔한 지역에 살면서 불교와 접촉하지 못한 건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급격한 산업화 세대의 정신세계에 불교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는 물질적 추구 방식뿐 아니라 정신세계에도 일방향의 가치관을 요구하고, 삶의 모든 규범을 강제했다. 하지만 그러한 불균형은 오래가지 못하고 불혹이 가까워오자 내 몸과 정신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연은 엄중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불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짓게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려고 산중 암자를 찾게 되었는데, 절에 첫발을 들이자마자 절집 처사가 되었다. 스님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절을 통째 맡겨두고 선방에 가신다고 훌훌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적막한 산중 암자에서 처음 몇 날을 보내고 나니 나는 마치 고요에 나를 헹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회를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문득 떠오른 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현대를 사는 우리 개인은 하나의 빗방울이 아닐까, 시간을 타고 직진 낙하하여 마침내 땅에 떨어져 파국을 맞는 존재가 아닐까? 인간의 의지로 창조한 문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숙명을 극복한다고 하지만, 현대문명은 되레 자연적 순환의 시간을 직선적이고 그래서 파국이 엄연히 결정된 운명적인 시간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빗방울의 마지막 착지점은 어딘가? 땅바닥에 부딪쳐 소멸할 수도 있고, 연못에 떨어져 수많은 물방울과 만나 자신을 새롭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빗방울을 둥글게 받아 안는 연못이 부처님의 법문이고 불교가 아닌가? 이미 파국적 숙명이 주어진 물방울과 해인의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얼마나 다른가? 나의 현재는 다가올 파국의 공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불안한 삶이 아닌가? 초보 불자의 유치한 발상이지만 그 생각은 다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좀 지났으나 내가 염불에도 경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스님은 참선을 권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법당에 가서 좌복을 깔고 앉아 스님의 말에 따랐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내 머리에서 찬바람이 일더니 내 입에서 문득 한 마디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이제 내 집에 왔구나!”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인간의 시간』, 『거대한 일상』,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그 모든 가장자리』 등의 시집을 냈다. 서정과 사유의 힘이 살아있는 시들로 이산 문학상, 만해 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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