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수행 바른 깨달음

2015-06-13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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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來淨体徹根源 본래정체철근원하니
出入同途秖此門 출입동도지차문이로다.
己住如來大解脫 기주여래대해탈하니
掌中至宝輝坤乾 장중지보휘곤건이로다.
본래 청정한 진리의 본 자체, 
인인개개 심성의 본 자체는 
근원에서부터 사무쳐 있음이니,
출입에 있어서 모든 분들이 
이 문을 좇아서 길을 같이 함이로다
그러한 고로 여래의 대해탈법에 
항상 머물러 있음이니, 
손바닥 가운데 하나의 구슬이 있어서 
하늘과 땅을 비침이로다. 


| 어떻게 공부를 지어 가는가?
삼세三世의 제불도 이 구슬을 아셔가지고 자재하게 쓰셨고, 역대의 도인 스님들께서도 이 구슬을 아셔가지고 일생토록, 미래세가 다하도록 자재하게 쓰시나니 이것이 곧 모든 불조의 살림살이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바에 출현하시어 팔만사천가지의 귀한 법문을 남겨놓으신 것은 바로 이 구슬을 알게 하기 위함이니, 참선교육을 받아 바르게 참구하는 법을 배워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면 바로 이 구슬을 증득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러한 명주(明珠,밝은 구슬)는 발심한 자만이 쟁취할 수가 있지, 발심 못한 자는 천리만리 밖에서 껍데기 구경만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지어 가야 옳으냐? 

이 고준한 최고의 일가의 명주는 아는 자가 아니면 바로 쟁취할 수가 없습니다. 바르게 참구하고 바르게 일념삼매가 되어야 관문을 투과해서 억만 년이 다하도록 자재하게 쓰는 것이 견성법見性法입니다. 이러한 견성법을 금생에 달성해야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모든 육도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 열반의 낙에 안주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화두 드는 법을 잘 배워 꾸준히 챙기면 여기에 부처님의 은혜를 다 갚고 죽음에 다다라도 후회가 없고 아주 당당하게 이 몸을 벗는 저력을 갖추게 되는 법입니다. 

인생은 오늘 있다 내일 가는 것입니다. 이 몸은 그와 같이 허무합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서 간절한 마음에 화두를 들고 일념삼매가 되도록 혼신의 정력을 쏟아야만 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화잡담하고 시비분별하며, 어떻게 하면 먹는 것 입는 것에만 관심 갖으면서 헛되이 시간만 보내면 죽음에 다다라 후회밖에 없습니다. 

일념삼매를 이루기 위해서는 화두가 없는 이는 아주 간절하게,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 하고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삼세제불도 이 ‘참 나’를 알아가지고 위대한 부처님이 되셨고 역대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참 나’가운데 팔만사천법문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참 나’를 앎으로 인해서 모든 할 일을 다 해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호흡지간에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숨 한 번 들어 쉬고 내쉬지 못하면 암만 건강한 사람이라도 밤새 안녕이 되가지고 냄새가 나니 매장을 하고 화장을 해 버리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 한 줌밖에는 남지 않는 것입니다.


| 간절한 의심이 뒷받침되어 화두를 밀고 가야
이처럼 이 몸뚱이는 썩어 없어지는 고로 ‘참 나’가 아닙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간절히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청소하나 밥을 먹으나 목욕을 하나 산책을 하나 잠을 자나 일분일초도 화두를 놓으면 안 됩니다. 

시야는 목전 2미터 앞에다 두고 화두를 챙기되 앉아서 정진할 때는 눈을 감지 말고, 보통으로 뜨고 있어야 됩니다. 봉사의 참선을 하면 안 됩니다. 눈을 감고 참선하는 것과 눈을 뜨고 참선하는 것은 천지현겁天地現劫으로 다릅니다. 평범한 눈을 뜨고 2미터 앞에 시선을 두고 화두를 챙기되 마음속에서 아주 간절한 의심이 우러나오는 화두가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마음속에 쭈욱 흘러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화두는 흘려버리고 멍하니 밤낮이 지나가는지 모르고 앉아만 있다면 이것은 천년만년 해도 견성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주 간절한 의심이 뒷받침되어 화두를 쭈욱 밀어주는 여기에 혼침 망상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2미터 앞에 시선을 두고 화두를 챙기라는 것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는 단전에 두라 하는데 나는 항시 눈앞에 두라고 합니다. 왜냐? 사위의(四威儀-行住坐臥)가운데, 가고 앉고 눕고 말하고 시끄럽고 고요한 이러한 거동 가운데 화두가 항시 흐르는 물과 같이 쭈욱 밤낮으로 흘러가야 무르익어지는 것이지 24시간 앉아만 있다고 익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화두가 쭈욱 흐르는 물과 같이 간절히 흘러가는 이러한 과정이 무르익어져야 일념삼매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면 그때는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밤낮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를 모르고 화두일념에 푸욱 빠져서 모든 의식분별이 다 재(灰)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상태가 오면 그때는 일주일이고 삼칠일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속이 되는데, 이러한 상태가 지속이 되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고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지 않고서는 대오견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언하言下에 고준한 법문을 깨닫는 이는 과거전생에 이렇게 많이 닦아왔기 때문에 들으면 그냥 열리는 분들입니다. 초학자는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의심으로 일념이 지속되어 밤낮으로 끊어짐이 없이 흘러가고, 거기에 온 천지에 간절한 화두 의심이 가득차서 모든 분별이 다 재가 되고 화두만 흐르고 흐르다가,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남으로 인해서 대오견성大悟見性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으면 헛된 깨달음이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 정진하다가 홀연히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망령된 생각으로 알았다 하는 이가 처사나 보살이나 스님네가 부지기수입니다. 그것은 안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진리의 세계는 향상구向上句 여래선如來禪 법신변사法身邊事가 있는데 이것을 다 잘 알고 있는지 물으면 동문서답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눈이 열리면 척척 바로 나오지 절대로 헛소리가 없는 법입니다. 바른 눈이 열리면 진리의 팔만 사천 법문이 손바닥 보듯이 정확하게 보이는데, 깨닫지 못하면 밝은 눈이 열리지 못하면 그것은 봉사가 사물을 가리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일 뿐입니다. 

스님네가 해제했다고 바랑지고 돌아다니면서 어디가면 해제비를 많이 주는가에 관심 갖는 것은, 중놀이가 아닙니다.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서 이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바랑을 짊어지지 않는다.’ 하는 이러한 확고한 신념이 따악 자리잡아가지고 화두와 씨름을 해도 될 듯 말듯 한데, 온갖 분별이 있으면 반드시 이 생生은 눈 깜짝 할 사이에 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일생토록 시줏밥만 얻어먹어 빚만 잔뜩 졌으니 소가 되고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가 불자님들도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시비와 허영심에 시간만 낭비하면 죽음에 다다라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니 정진에 힘쓰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 행사 선사와 제자 석두 스님
옛날 육조六祖 대사로부터 인증을 받으신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께서 회상을 열고 있는데 고준한 안목을 갖췄다고 소문이 중국에 자자하니, 발심한 석두石頭 스님이 찾아가 40년을 그 문하에서 정진에 몰두하여 정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행사 선사께서 바른 눈이 열린 제자 하나를 인가해서 다른 산중에 머무르게끔 하기 위해서 심부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중국에는 오가풍五家風 즉 다섯 가풍이 있는데 그것을 다 알아야 됩니다. 법을 자재하게 써야지 하나만 알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향상向上만 알고 향하向下는 모르면 안 되고, 일구一句를 알면 이구二句, 삼구三句도 알아야 되고, 최초구最初句 말후구末後句도 알아야 되고, 법신변사가 무엇인지 여래선이 무엇인지 이것들을 다 한 꼬챙이에 꿰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가풍이 다 이 가운데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사 선사께서 제자를 분가하기 위해, 하루는 제자 석두 스님을 불러, “내가 서신을 써 줄 것이니 남악회양 선사께 서신을 전하고 심부름을 다녀오면 그대에게 무딘 도끼를 줘서 다른 산에 주住하게끔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회상에서 40년을 수행하여 나의 가풍을 다 알았지만 저쪽의 가풍도 다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선사가 되려면, 모든 가풍을 다 알아야 됩니다. 납자를 제접하는 데 있어서 한 스님 밑에서 배운 이들만 오는 게 아니라 천하의 납자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임제종臨濟宗의 가풍은 무엇인지, 위앙종潙仰宗의 가풍은 무엇인지, 조동종曹洞宗의 가풍은 무엇인지, 법안종法眼宗의 가풍은 무엇인지, 운문종雲門宗의 가풍은 무엇인지 알아야만, 가지가지의 문하에서 배운 납자가 찾아올 때마다 척척 그릇을 따라서 제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는 향하의 가풍을 전개했고, 석두 스님의 스승인 청원행사 선사는 향상의 가풍을 제창했습니다. 석두 스님이 그 밑에서 40년 동안을 연마를 하다 보니 향상의 일변도로만 나가는지라, 하루는 저쪽 가풍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심부름을 보낸 것입니다. 서신을 줘서 전하고 오란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석두 스님이 며칠을 걷고 걸어서 회양 선사의 회상에 당도하고는 인사를 척 올리고 대뜸 묻기를, “모든 성인聖人도 흠모하지 않고 자기의 소중한 영靈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할 때 어떠합니까?” 이렇게 고준한 일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회양 선사께서 묻는 뜻을 척 아시고는, “그대는 아주 고준한 법만 물을 줄 알고 어째서 향하의 일은 묻지 아니하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석두 스님이 “억만 년을 생사의 바다에 잠겨 있을지언정 모든 부처님의 해탈법은 구하지 않습니다.” 하고는 자기의 깨달은 살림살이로 시종일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회양 선사께서는 말할 상대가 안 된다 여기시고 돌아앉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석두 스님은 서신도 전하지 않고 바로 절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서신書信은 잘 전했느냐?”

“서신도 전하지 못하고 신信도 통하지 못했습니다.”

서로 대화가 안됐다 그 뜻입니다. 그럼에도 석두 스님이, “스님께서 심부름을 다녀오면 무딘 도끼를 주어 다른 산의 주인으로 봉하신다고 하셨는데 무딘 도끼를 주십시오.”하고 청하니, 행사 선사께서 다리를 한 발 들어 보이셨습니다. 이에 석두 스님이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고 큰절을 올리고 물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행사 선사께서 석두 스님에게 무딘 도끼를 줘서 법을 인가하고 분가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무딘 도끼를 달라하는데 있어서 다리를 들어 보이셨느냐? 이것을 바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무딘 도끼를 달라는데 행사 선사께서 다리를 들어 보이시니 척 아셨습니다. 그래서 큰절을 올리니 무딘 도끼를 주어 인가하여 다른 산에 주하게끔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최고의 관문을 꿰뚫는 그러한 정안의 눈이 갖추어져야 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 번쩍하는 조그마한 알음알이, 반딧불만한 알음알이 가지고는 자기신세도 말이 아니고, 만 사람에게 설교를 하고 지도를 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불성설이라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 화두 일념삼매 후 정안이 열린다
산승이 이처럼 고준한 법문을 하는 것은 이러한 견성의 가풍 즉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천추만대에 그릇 전하지 않고 후학을 바르게 지도하고 세밀하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데 있어서 중간에 오점이 생기고 다르게 변질이 된다면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스승 없이 깨달은 이는 천마외도天魔外道라고 못을 딱 박아놓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느냐 이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래서 산승이 사부대중에게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내놓은 것은, ‘덕산탁발화’는 공안 중에서도 가장 보기 어려운 공안인데, 이 공안을 바로 봐야 모든 공안을 한 꼬챙이에 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호왈견성呼曰見性입니다.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의 견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요, 천차만별이 아닙니다. 동일하게 자기의 성품을 보았다 해가지고 견성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문을 잘 듣고 조그마한 알음알이를 살림으로 삼고 있다면, 이는 내 신세도 버릴 뿐만 아니라 만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세월을 낭비하는 것일 뿐임을 잘 알아 마음 단속을 잘 해야 될 것입니다. 모든 허깨비를 다 놓아버리고 화두 일념삼매가 지속이 돼서 쭈욱 세월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중死中에, 죽은 가운데에, 산 사람이 죽은 송장이 되어가지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일념삼매에 푸욱 빠져가지고, 흐르고 흐르다가 거기서 뛰쳐질 때 바른 정안이 열림으로 인해서 모든 공안을 한 꼬챙이에 다 꿰어 버리게 됩니다. 견성見性은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우리 모든 대중은 항시 배운 바대로 바르게 참구를 잘 해서 바른 정안이 열려 부처님 은혜를 보답하고, 천추만대에 이 부처님의 심인법이 끊어지지 않게끔 그렇게 정진에 몰두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필경에 이 고준한 법문의 일구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향상향하向上向下를 자재용自在用하야사 
천상인간天上人間에 무등핍無等逼이로다.
향상구와 향하구를 자재하게 써야사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에 
견肩할 자가 없음이로다. 

향상의 일구와 향하의 일구는 모든 불조의 최고의 살림살이라. 향상의 일구와 향하의 일구를 자재하게 써야사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에 짝할 자가 없음이니, 향상구와 향하구를 모르면 견성이 아닙니다. 이것으로서 우리가 견성의 귀감을 삼는다면 빈틈없는 살림살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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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부산 해운정사에서 선수행을 하는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진제 종정예하
스님은 1934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1953년 해인사에서 석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59년 향곡 선사 문하에 입실, 간화선 수행을 했으며 1967년 향곡 선사로부터 법을 인가 받아,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전해 내려온 정통법맥을 이었다. 1979년부터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 조실로 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3대 종정이다. 법어집으로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선 백문백답』, 『고담녹월古潭漉月』, 『石人은 물을 긷고 木女는 꽃을 따네』, 한영 법어집 『Open the Mind, See the Ligh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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