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롱 불자’의 동아줄 엮기

2015-06-13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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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마흔 셋. 생후 22개월 된 딸을 둔 늦깎이 엄마이자 ‘무늬만 불자’다. 한때는 절에도 열심히 다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늦은 임신과 출산 이후로는 내 몸 하나 추스르고 서툰 살림하며 아이 키우기도 벅차서 절에 가는 것조차 연중행사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가뭄에 콩 나듯이 사찰에 가도 불전에 삼배 올리기가 고작,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딸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한 건 스물 네 살의 겨울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유교 지상주의자이셨고 엄마는 1년에 한 번 씩, 부처님오신날에만 쌀과 빛깔 고운 과일을 골라들고 집 근처의 절로 향하는 분이셨다. 삼남매의 대입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법당에 방석 깔아놓고 정성껏 1,080배를 올리시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 역시 딱히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질 이유도, 계기도 없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와 버스를 타고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 가게 되었다. 어느 책에서인가, 화계사의 겨울이 아름답더라는 문구를 우연히 봤기 때문이었다. 화계사의 겨울이 실제로 아름다웠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절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우리를 본 주지스님은 젊은 처자 둘이서 법당 근처만 맴도는 모양이 답답하셨는지 삼배 하는 법도 가르쳐 주시고, 화계사에 청년회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셨다. 둘 다 종교가 없었지만 그 후 친구는 성당, 나는 화계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부처님과 절은 편안하고 친근했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향 내음도 싫지 않았다. 초발심이 절로 우러났다. 좌선을 배우고 틈틈이 108배를 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청년회 활동도 했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지대방에 모여 앉아 연잎도 비비고 하루 종일 절 뒤편 공양간에 쭈그려 앉아 설거지도 했다. 밤새 삼천배를 하고 다음날 새벽 6시까지 회사에 출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모든 게 낯설고 미숙했지만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다. 

청년회에서 친했던 언니의 권유로 사찰답사와 여행을 함께하는 인터넷 모임에 가입한 것은 이십대 후반이었다. 당시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유적 답사가 크게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남도 여행부터 시작해서 책에 나온 불교 유적지, 폐사지를 숱하게 돌아다녔다. 온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 예전에도 다른 법명을 받기는 했지만 ‘무구행無垢行’이라는 법명을 받은 것도, 마음 속의 스승님을 만난 것도 그 모임 덕분이었다. 

일장 스님은 공주의 작은 사찰에서 처음 뵈었다. 줄곧 육지에 계시다가 제주도로 건너가셨던 스님은 몇 년 간의 제주 목부원 생활을 정리하고 경남 사천을 거쳐 공주에 올라오신 참이었다. 스님께 삼배를 드린 후 차를 마시는 자리였다. ‘벌떼들’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수다에 여념 없던 일행이 무심코 다관을 ‘주전자’라고 하자, 언짢은 기색도 없이 줄곧 듣고만 계시던 스님은 주전자의 ‘술 주酒’ 자를 들어 쉽고 자상하게 설명해주셨다. 공주, 경주, 지리산 황매암, 현재의 지리산 목부원에 이르기까지 스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하는 ‘불자’라기보다는 ‘절자’, ‘스님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처음의 순수했던 초발심은 어디로 갔는지 더 이상 불교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며칠 절에 머물게 되어도 피곤을 핑계로 새벽 예불도 예사로 빼먹고 스님께서 그 좋은 법문을 하시는데도 귀 기울여 듣기는커녕 공양간에서 보살님 도우기에 바빴다. 애초에 내가 왜 절에 다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끌렸는지도 잊어버렸다. 주객이 전도된 꼴이었다. 

조금씩 스스로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결혼 5년 만에 아이를 임신했다. 직장을 그만둔 남편이 머리를 식히겠다며 일주일간 팔공산 갓바위를 다녀온 이후였다. 부처님의 영험 덕분인지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자 금세 들어섰다. ‘강처럼 흐르라’는 뜻과 ‘절’이라는 뜻으로 ‘가람’이라는 태명을 붙였다. 마흔 한 살의 노산이었지만 임신과 출산은 순조로웠다. 

팔뚝 만하던 아이가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생짜 초보엄마였던 나도 조금은 육아에 익숙해졌다. 태명에 ‘연줄기 가茄’, ‘쪽 람藍’이라는 한자를 붙인 가람이는 하루하루가 다르다. 눈만 뜨면 새로운 말에, 새로운 습이 붙어 있다. 좋던 나쁘던 그 중 대부분은 엄마 아빠에게서 고스란히 옮겨간 것이다. 자식은 나를 숨김없이 비춰주는 거울. 늦게나마 새삼 나를 돌아봐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이유다. 스스로 ‘나이롱 불자’라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마음 속에는 굵은 동아줄을 엮을 수 있는 질긴 나이롱 끈들이 있음을 믿는다.  
갓난아기 때부터 절에 데리고 갔던 아이는 여느 아이들이 배꼽인사를 하듯 합장 반배를 한다. 좀 더 부지런히 딸의 손을 이끌고 절을 찾아야겠다. 꽃처럼 환한 아이의 얼굴에 부처님도 좋아하실 것이다.


정효선
전문 번역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15년간 MBC 보도국 국제부에 근무했으며 ‘KBS스페셜’, ‘생로병사의 비밀’ 등의 프로그램에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번역 작품으로는 KBS특별다큐멘터리 ‘마음’, ‘기억’,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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