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차별 없는 법석 ‘광장’으로 나오다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

2015-06-13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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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종정 진제 스님이 던진 화두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산중 사찰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 지난 5월 16일, 서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단이 세워지고 수십 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중엔 스님도 있었고, 속인俗人도 있었다. 불자佛子도 있었고, 불자가 아닌 이도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펼쳐진 법석, 세계간화선무차대회. 그날, 광화문 광장은 사방의 벽을 허문 대도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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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대회는 승속과 빈부, 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여 법문을 듣는 법회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설법회상은 계급에 대한 차별 없이 만민이 평등한 무차법회였고, 장소 또한 대중이 모일 수 있는 개방된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누구든 법회에 참여해 진리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고, 삶의 바른 길을 배울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고통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2,600년 전, 싯다르타의 질문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6년의 고행과 수도 끝에 싯다르타는 깨달은 자, 부처가 되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의 깨달음이 될 수는 없다. 2015년 현재, 나의 마음 안에서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질문은 아직 그대로다.     
날선 질문과 간절한 발원이 사람들을 광장으로 이끌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열린 세계간화선무차대회. 20개국 200여 명의 스님들을 포함해 약 30만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같은 시각,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을 바라며 고통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지구의 또 다른 한쪽 네팔에서는 8,0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대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한편, 내 몸뚱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한 뼘의 여유도 없이 감기로 인해 열을 내고 있었고 마음은 전날 겪은 감정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었다. 
무차無遮. 고통에도 차별은 없다. 자, 이제 이런 크고 작은 고통 가운데서 간화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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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6일 pm 6:00
광화문光化門 현판 앞, 대로를 사이에 두고 야단野壇이 세워졌다. 그 앞으로 등을 곧추 세운 학인스님들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좌정하고 있다. ‘광화光化’는 ‘차별 없는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方)’는 『서경書經』의 한 구절에서 차용해 붙여진 이름이다. 언젠가부터 광화문 광장은 대중의 기쁨과 환희, 울분과 서러움을 토로하는 장소가 되었다. 세계간화선무차대회가 열리는 곳으로서 상징적인 공간이 될 만하다.  학인스님들이 앉아 있는 자리 뒤로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동아일보 사거리까지 의자가 빼곡히 채워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 신도들을 비롯해 주말을 맞아 시내로 나온 가족들, 외국인 여행객들도 보인다. 

총무원 기획실장 일감 스님의 사회로 식전행사가 시작됐다. 러시아 칼미크 공화국에서 온 텔로 툴쿠 린포체 스님의 달마토크. “모든 이들이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이들이 행복에서 멀어지지 않기를….” 

텔로 툴쿠 린포체 스님은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길 기원했다. 고통의 원인을 잘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고통 또한 저절로 사라져 행복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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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6일 pm 7:00
동국대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해 종로를 지나온 연등행렬이 광화문 광장에 다다랐다. 

“네팔을 도웁시다!” 일감 스님의 제창으로 참석자 모두가 휴대폰을 꺼내든다. “문자 메시지 수신자 칸에 ‘#2540-9595’를 치시고, 메시지 칸에는 ‘네팔 자비’라고 치세요. 자, 이제 동시에 문자를 보내겠습니다. 준비되셨죠? 하나, 둘, 셋!” 참석자 30만 명이 동시에 문자 메시지를 누른다. 문자 한 개당 3천원의 성금이 네팔로 보내진다고 한다.   

이어서 허공을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세계평화를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기리는 진혼제가 시작됐다. 진혼제가 절정으로 향하는 가운데, 대형 스크린을 통해 세계종교지도자들과 함께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에 헌화하는 진제 스님의 모습이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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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6일 pm 7:40
예불, 반야심경 독송, 석가모니불 정근까지. 닫힌 도량을 나와 열린 공간에서의 예불의식은 짧게나마 무아를 경험케 한다. 수십만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시방의 끝을 알 수 없는 세계로 퍼져나가는 느낌. 그 속에서 작은 나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하나 된 전체의 울림만이 허공에 감돈다. 그 사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무대 위에 설치된 조명 빛이 광장을 비추고 있다. 연등 불빛과 조명 빛이 어우러져 오색광명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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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6일 pm 8:05
7명의 동자승을 따라 진제 스님이 단 위로 오른다. 연화좌에 앉으시니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따로 없다. 저절로 환희심이 난다. 삼배를 올리고 입정入定의 시간. 20여 개국에서 온 고승들과 30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침묵한다. 서울의 중심, 광화문 일대가 이처럼 고요했던 순간이 언제 또 있었을까. 신비로운 정적. 시간이 멈춘 듯 흘러간다. 생사生死도, 고락苦樂도 끊어진 자리에 잠시 머물렀을까. 누군가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보살님, 왜 하필 이 시간에 내 앞을 지나가세요?” 바닥에 앉아 입정에 들었던 젊은 보살님 앞으로 노보살님 한 분이 좁은 길을 뚫고 막 지나가려던 참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아랫배를 움켜쥐고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 노보살님은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속세의 한가운데를 통과해가는 동안, 선정에 든다는 것은 뜬구름 같은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작은 경계에도 일일이 반응하고 나를 중심으로 판단해 시비를 가리고. 이것은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공동체와 사회, 국가 간의 갈등 또한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테다. 두 보살님들이 실랑이를 벌이던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이 어마어마한 입정의 순간에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지?’ 그 생각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소란을 피우는 것은 단연 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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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6일 pm 8:20
古佛未生是誰主
寥寥寂寂體平安
大千世界共一家
情與無情同一體
옛 부처가 나기 전에 누가 우주의 주인공인고?
고요하고 고요해서 그 체성은 평안한지라.
온 세계가 한 집이요, 
정이 있고 정이 없는 모든 만물이 한 몸이로다.

대중을 향해 불자를 들어 보인 후 진제 스님이 상당법어를 시작했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없이 시스템에 따라 당연한 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간화선의 화두는 낯설지만 일상을 깨우는 자극제가 된다. 언어가 끊어진 무판단의 자리, 고통의 감정과 기억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멈추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온 세계가 한 집이고, 너와 내가 한 몸임을 조금씩 체득해 나갈 수 있으리라. 

한국을 여행 중이라는 미국인 대학생 사라 와이즈(Sarah Wise, 25)는 말한다.

“간화선이란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연등이 아름다워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흥미롭네요.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참 나요?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네요. 간화선을 배우면 알 수 있나요?”   

   
 | 무시무종無始無終
대회는 오후 9시, 세계종교지도자 평화선언문 낭독과 합창공연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또는 홀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광장에는 다시 자동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간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이제 내 안에 법석을 깔 차례다. 내 마음의 법석에서 무차無遮를 실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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