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누리] 타인의 고통, 유마의 병

2015-05-04     류지호

●    재마 스님 눈이 붉어지면서 안경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세월호 좌담 때다.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스님은 몇 마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잠깐의 침묵. 스님은 이내 진정하고 말을 이어갔다. 스님은 세월호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나온다고 웃었다. 지난 1년간 서울 광화문, 진도 팽목항, 안산 등을 오가며 묵묵히 유가족과 함께해 왔지만, 여전히 미안하고, 부끄럽고, 안타깝다. 세월호는 화두였다. 세월호로 경전을 새롭게 읽었다. 사람을 만나면서 한국불교를 다시 본다.   

●    세월호 참사에 지난 1년간 한국사회 주류와 많은 대중이 보여준 인식은 연민과 회피였다.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함께한다, 고통을 함께하고, 다시는 그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대통령과 언론은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처음에 교통사고 같은 하나의 우연적 ‘사고’로 분류되기도 했고, 국민적 애도가 진행되자 필연적 ‘사건’으로 승격되었다. 그때부터 세월호는 저 건너편의 사건으로 만들어졌다. ‘아 끔찍한 일이야.’ 하고 얼굴을 돌린다. 처음에 가졌던 연민심은 이제 불편한 마음으로 변하면서 채널을 바꾼다. 그 참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새긴다. 

●    참혹한 시간들이다. 검은 바다 속에서 물이 발바닥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가슴, 목, 입까지 조금씩 올라왔을 때, 그 찰라의 시간, 열일곱 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엄마, 아빠, 오빠, 동생의 얼굴. 피워보지 못한 꿈. 그리고 죽음의 공포. ‘분’과 ‘초’라는 시간의 칼날에 푸른 목숨이 하나씩 잘려나갔다. 더욱 참혹한 것은 그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들이다. 일상화된 탐욕과 체질화된 무지, 책임회피, 약육강식, 비리의 공생으로 얽혀있는 이들은 연민의 얼굴을 한 채 당당하기까지 했다.      

●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은 말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타인의 고통』 . 손택은 9.11테러 일주일 후 미국사회를 흔들었던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란 글을 써 테러에 슬퍼하되, 이 테러가 ‘미국이 맺은 특정 동맹관계와 미국이 저지른 특정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임을 인정하자고 했다. 

●    문수보살이 유마 거사에 병문안 와서 물었다. “거사여, 병은 어디서 일어났으며 그 병의 생긴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으며, 도대체 언제나 멸합니까?” 유마 거사가 답한다. “비유컨대 장자에게 오직 한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이 병들면 부모 또한 병들며,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 또한 나을 것입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아들과 같이 사랑하나니,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나을 것입니다.” - 『유마경』 제5장 ‘문수사리문질품’

●    세월호의 고통이 연민에 그친다면, 손택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마음이 있는 것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바보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유마 거사는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세월호 문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세월호라는 병이 나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이를 잃은 유가족의 병은 어떻게 나을 것인가? 켜켜이 쌓여있는 질문 앞에 연민의 감정을 넘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