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하게 함께 멈춤없이

정진으로 만들어가는 우리 세상

2015-05-04     불광출판사

“언제나 갈망하라, 언제나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2011년 말 이 짧은 문구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 문장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명문장이다. 세계 IT업계의 제왕 애플사의 창업자인 그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했던 이 문장은 마치 그의 임종게처럼 세계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지난 3월 초 불기 2559(2015)년 동안거 해제 당시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스님이 스티브 잡스의 이 문구를 다시 꺼내들었다. 왜일까? 스님은 스티브 잡스의 입을 빌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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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표를 이루기 위한 꾸준한 노력
당시 무산 스님은 이렇게 부연했다.

“수행자는 생사고해를 타파하고, 일대본분사를 해결할 때까지 진정한 해제를 한 것이 아니다.”

동안거는 해제할지라도, 수행자의 본분인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진정한 해제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스님의 이 말은 안거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당부다. 그 뜻을 전하면서 무산 스님은 조사 어록이 아닌 스티브 잡스의 저 유명한 문구를 거론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대를 졸업하면서 연단에 올라 졸업생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졸업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늘 정진하기를 당부하는 메시지를 저 문장에 담아 들려주었다.

정진은 일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단어다. 사전에서 설명하는 ‘정진’이라는 단어는 ‘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이라며 불교에서 말하는 정진의 의미를 별도로 소략해 놓기도 했다. 불교학자들은 정진의 개념에 대해 주로 수행력이나 보살의 실천행과 관련지어서 설명한다. 보살이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실천을 행하는 것, 혹은 수행을 하며 관觀하는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 이를 다시 되돌리는 힘이 정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정진의 정의에 대해서는 ‘바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꾸준히 실천해 가는 노력’이라고 공통된 의견을 모았다. 

정진바라밀에 대해 『대지도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시·지계·인욕은 큰 복덕이면서 평안하고 즐겁고 좋은 명예가 있으며, 바라는 바를 얻게 된다. 이미 이러한 복덕의 맛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다시 정진을 더해 더욱 묘하고 뛰어난 선정과 지혜를 얻고자 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우물을 파는데 물기가 보인다면, 더욱 노력을 가해 반드시 물을 얻고자 희망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을 켜는데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면, 더욱 부지런히 비벼서 반드시 불을 얻고자 희망하는 것과도 같다.”

재밌는 것은 많은 경전들이 정진에 대해 설명하면서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천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게으름이라는 깨우침이다. 부처님은 『불설보살본행경』에서 게으름을 멀리하고 부단한 정진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 정진의 가장 큰 장애, 게으름
“게으름이란 모든 행行의 폐단이다. 집에 있으면서 게으르면 옷과 음식이 공급되지 못하고 산업産業이 흥하지 않으며, 출가해서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일들이 모두 정진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나니, 집에 있으면서 정진하면 옷과 음식이 풍요롭고 사업이 더 넓어져서 멀고 가까운 이가 칭찬하고 감탄하며, 출가하여서 정진하면 행하는 도道가 다 이루어진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데 있어 게으름은 가장 큰 장애다. 뒤집어 말하자면, 부처님은 정진하는 삶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부지런함’을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출요경』 제5권에서 정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행을 일으켰거든 방일하지 말고 몸을 단속하고 그 마음을 다루어라. 지혜는 능히 밝은 등불이 되니 다시는 어두운 연못에 빠지지 않으리라. 여기서 ‘행을 일으켰거든 방일하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한번 수행하려고 결심했으면 게으르지 말고 마음을 다하라는 것이니, 비록 결심했더라도 마음이 약한 사람은 그대로 되지 않고, 다만 용맹스런 사람이라야 그 원을 성취할 수 있다. 또 그 마음이 굳세고 부지런하더라도 방일함이 있으면, 위없는 도의 과果를 성취하지 못한다. ‘몸을 단속하고 그 마음을 다루어라’란 무슨 뜻인가? 몸을 단속하면 계율이 두루 청정하고, 마음을 다루면 뜻을 다잡아서 산란함이 없어지니, 끝내 삿된 생각이 없다.” 

여기에서도 부처님은 게으름에 대한 경계를 주문하지만, 정진하는 몸과 마음에 대한 자세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정진의 이야기들은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된다. 바른 목표를 세우고 부단히 노력하는 삶, 정진의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폐단을 바로 잡는 좋은 실천방안이 될 수 있다. 불광연구원 서재영 상임연구원의 말이다.

“요즘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는 거죠. 그렇다 보니 자꾸만 남들이 사는 모습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자꾸만 내 삶을 남의 삶과 비교하게 되고요. 이런 경우에 필요한 것이 정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가치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직하게 한 발씩 내딛으며 자기의 삶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정진의 덕목입니다.”


| 바른 안목이 있어야 올바른 정진이 가능하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성공한 삶’에 대한 갈망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 문제는 성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성공’은 일종의 코스가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높은 연봉 그리고 이름값. 좋은 대학, 고학력, 고평점, 자격증으로 대변되는 ‘스펙’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더 많은 연봉과 명예를 위해 경쟁하는 게 요즘 한국인들의 모습이다. 사람이 시장의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보다는 ‘내가 잘 사는 인생’이 우선시 되는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언론에서 제기돼왔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광주광역시 선덕사 주지 원묵 스님은 ‘바른 안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지만 방향이 어긋났다는 게 스님의 말이다. 정진바라밀의 진정한 모습은 이미 생긴 악은 끊어서 없애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앞으로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선은 더욱 키우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은 생길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고 부연했다.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올바른 정진바라밀을 위한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바른 생각’이었다. 스님은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로 밥을 짓고, 지혜로운 사람은 쌀로 밥을 짓는 법입니다. 동쪽을 가고 싶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서쪽으로 가면서 점점 가고자 하는 방향과 멀어지고, 지혜로운 사람은 곧바로 동쪽으로 길을 잡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지요. 요즘 우리 젊은이들 보면 참 열심히 살고 애를 많이 씁니다. 하지만 스펙의 거미줄에 사로잡혀 있어요. 열심히 스펙을 하나라도 더 쌓아서 높은 연봉을 받으려는 노력이 정말 바른 길일까요? 스펙 경쟁을 하면서 친구를 적으로 돌리는 삶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요? 그래서 정진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바른 안목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중요해요.”

바른 안목으로 바른 목표를 세우는 전제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실천방안은 결국 탐(貪, 욕심)·진(瞋, 분노)·치(癡, 어리석음)를 제거하는 것이다. 탐·진·치를 제거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수행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나를 내려놓는 절 수행이나, 현상을 바로보는 위빠사나 수행 등이 동반되어야만 바른 안목을 갖출 수 있다. 정진바라밀은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덕목이지만, 선정바라밀·지혜바라밀과 같은 덕목들이 동반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의 삶은 변화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변화를 꿈꾸는 개인이 사회 전체의 구조적 모순에 막혀 변화의 노력을 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에서 ‘탐욕’이라는 두 글자를 읽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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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운동을 병행해야 세상이 변한다
지나간 한국의 현대사에서 잇따라 터져 나오는 대형 참사의 뒤에는 늘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배가 침몰한 원인 중에는 늘 인간의 탐욕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더 쉽게, 더 많이 돈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탐욕들이 안전 관리를 소홀하게 만들고, 건물의 자재를 빼돌리게 만들었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정진바라밀의 정신이 뒷받침되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고다. 사회 전반에 걸친 구성원들의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요원하다는 게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동국대학교 박경준 교수의 설명을 참고해볼 만하다.

“정진바라밀을 나 한 사람이 잘 살기 위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불교의 모든 사상은 나 한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것에 맞춰져 있어요. 정진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빠릅니다. 여유가 없지요. ‘더 빨리, 더 많이’를 요구하는 사회입니다. 빨리 달리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반면에 천천히 가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면서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죠. 정진바라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도 그런 차원으로 접근해야 해요.”

원묵 스님도 박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 스님은 공동체 운동으로 사회의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는 해법을 내놨다. 생각해보면 불교는 태동 당시부터 사회 개혁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승가’라는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갔다. 

여기서 승가란 단순한 출가자 집단이 아니다. 당시 승가에 모인 출가자와 재가자들은 공동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 동일한 목표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을 함께 바꿔 나갔다.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다. 끊임없는 정진을 이어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큰 힘이 된다.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개인의 노력과 공동체의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원묵 스님의 지론이다. 개인적인 완성과 사회적인 완성을 동시에 추구해야만 정진바라밀을 통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00년 전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진바라밀의 필요성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핵심은 바른 안목으로 바른 목표를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늘 그렇듯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개인의 완성을 위해서든, 사회 전체의 변화를 위해서든 한 발을 떼어 놓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 다음은 꾸준함이다. 하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함께 그 길을 간다면, 우리 사는 세상을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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