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구니 노스님의 출가 이야기

양산 내원사 노전암 주지 능인 스님

2015-05-04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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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1958년임니더. 은사시님 모시고 노전암에 올때게. 전쟁통에 다 불타고 법당 하나빼끼 엄썼어요. 그때는 먹을 끼 엄써가꼬 근근히 살았는기라. 농지개혁을 해가 절땅이라꼬 전부다 뺏기고. 좌우지간에 끼니를 굶고 배를 줄여서라도, 우야든지 땅한평이라도 부처님땅 맨들어노코 죽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기지.”


| 법당 지키는 것도, 다시 짓는 것도 부처님 일이라
아이들이 내달려 흩어진다. 그것들이 불꽃놀이 하듯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착지점을 향해. 한 번은 건빵, 한 번은 딱껌이다. 탱크에서 내린 미군이 한 움큼씩 던져 올린 것을 열한 살 동선이는 먹지 않는다. 던지고, 떨어지고, 달음박질하는 모양을 쳐다볼 뿐이다. 아이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엎어졌다 금방 일어난다. 고개를 돌려 소리친다. 

“동선아, 니는 왜 안 묵나?” 

동선은 말이 없다. 오십 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룬 박 씨 집안 막내딸이다. 함양 땅 안이면이었다. 

:  배고픈 시절이었죠. 요즘 세대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요.

“국민학교 마치고 집에 갈때게 우유차를 한 잔 쓱 줬어요. 아–들이 모두 줄을 서가, 맛있다고 받아마셨지. 나는 그걸 안 얻어먹었어. 어릴 때도 거서 누린내가 나고, 아이고 안 먹을란다 그캤지. 지금 생각해 보먼, 아…, 내가 그때부터 자존심이 되게 강했는갑따. 참말로 우리나라가 부자 된 나라라. 여기 올때만 해도 저- 산에 가서 나무를, 낫을 가꼬 쳐가꼬 두 단씩 지고 왔어요. 겨우내 나무 하고, 그래가 애끼 때고. 요새는 마 장골들이 나무를 하니까는 어찌 흔하게 때는지 방이 이래 뜨끈뜨끈해. 그때는 육이오 나고 정화운동이 일어나가꼬 대처승 스님네들 쫓아내고 나니까, 절은 많코 절 지킬 사람이 없는기라. 우리 은사시님이 요 절 밑에 동네 사람이그든. 그때 여-(여기)를 배당받아 와가, 땅이라꼬 칠십 평빼끼 없던 기, 인자 이만 평 넘어 사놨지.”

:  불사금을 어떻게 다 충당하셨어요?

“무조건하고 부처님께 기도하면 다- 이롸져요. 지장보살 한번 부르면 한번 부른만큼, 열번 부르면 열번 부른만큼 고만큼씩 이루는 기라. 처음부터 되는 기 아니고 바른 마음 갖꼬 피나는 노력을 해야지. 부산에 재벌 마나님들이 전부 노전암을 와도 절대 한 사람한테 받아서 한 기 아인기라. 한몫에 그 돈을 받아놔면 그 사람 종이 되고 말어요. 여러 사람이 동참해가꼬 하는기지. 그 사람들도 인자 다 세상 베리고, 자식들은 이민가고. 그래도 부처님만 믿꼬 육십년을 살아놔노니 법당에 저래 불이 나도 걱정 안하고 다시 잘 지야지, 이래함니더.”

:  대웅전이 화재로 전소된 게 작년인가요, 저녁에 갑자기 누전이 되어서….

“그기 아이고, 다 때가 돼서 그란기라. 뭔소린가 하면은, 옛날이야기를 좀 하입시더. 제가 법당을 지킨다꼬 밤낮으로 잠을 안잤그든. 법당이 진 지가 이백이십 년, 또 후불탱화, 신중탱화 모신 지가 한 백구십 년, 불상하고 종하고 그기 모두 다 오래되고 좋아서. 어느 날에 밤손님 너이(넷)가 찾아왔는기라. 지렛대 들고 망치 들고 몽딩이 들고. 나혼자 한시간 이십분을 싸웠어, 부처님 법당에 아뭇꺼도 몬 가져간다꼬. 그기 벌써 이십 년 전임니더.”

:  어떤 마음으로 싸우셨어요? 장정이 넷이나 되는데.

“아무 생각도 엄써. 첨에, 문열어, 이라길래 문 못열어, 했지. 이게 간이 배밖으로 나왔나? 죽구싶어 이러나? 허길래 죽는기 겁날꺼 겉으믄 내가 이 심산유곡서 사십 년을 넘어 안 살았다, 그캤지(그리 했지.). 그 사람들도 아뭇꺼 하나 몬 가져갔는데, 고마 저렇게 불이 나서 한나도 안남았어. 때가 된기지, 부처님께서 날 보고 다시 잘 지라꼬, 천장이 다 떨어지고 오래 돼가꼬 볼품이 없으니까 이 늙은 사람을 법당 지을 복을 주셨다아이가. 인제 법당 잘 지놓고 가야 돼요.”


| “우리 아부지 어데 가면 만남니꺼?”
:  스님, 방금 전에 점심공양을 아주 잘 먹었어요. 산중 암자에서 20첩 반상을 다 받아봅니다.

“어려서 아부지가 어데 가시면 이래 네모난 소반에다가 상을 채리노코 가셨어요. 그릇에 반찬이 요래 깔끔하게 놔져가꼬 있고 밥이고 국이고 따듯하게 해가꼬. 그기 항상 몬 잊꼬, 중되가꼬도 꼭 은사시님을 그래 채려디리고, 여 오는 사람들한테도 똑같이 상을 채리내고 그라는 기지.”

:  아버님 사랑이 참 애틋하셨어요.

“그라지. 칠남매에다가 위로 오라버니가 여섯인데 다섯 살에 어머니가 고마 병환이 오셔가꼬 세상을 떠나셨어. 아부지가 항상 굴비, 그걸 요만한 놋새기(놋쇠그릇)에 담아가 밥 위에 알큰하게 쪄가꼬 고건 인제 내만 먹었는 기라. 장에 가시믄 피문어를 사다가 대청마루에 걸어노코 하루에 다리 한나씩 끊어주시고. 인자 어머니라꼬 모리고(모르고) 아부지만 바라보고 자란기지. 중학교 올라가가꼬 서울서 학교를 다니는데 정월 스무사흗날, 아부지가 세상을 떠나버렸어. 그래가꼬 내가 마이 아팠던 모양이라. 천지에 남자라꼬 보이는 사람은 다 우리 아부지 얼굴이야. 아마 그때는 아부지가 계신다고 하는 곳은 불속이라도 들어갔을끼라. 지옥도 갔을끼고. 이듬해 봄에 새밋가(샘)에서 발을 씻고 앉았는데 비구니스님네 둘이가 동냥을 하러왔어. 스님네가 동냥해가 먹고살때라. 시님, 죽었다는 사람을 어찌하면 만나겠슴니꺼, 하니까 중이 되면 만난다꼬 그카는기라.(그리 하는 기라)”

:  인연이 그렇게 이어졌군요.

“새벽차로 여름결제에 범어사 대성암을 갔지. 두서너달을 있는데 어떤 행자님이 내보고, 와- 절에 왔냐꼬. 이만코 저만코 해가꼬 우리 아부지 어데 가면 만나겠나 알라꼬 그람니더, 눈물을 줄줄 흘림서 그캤어. 행자님이 딱 그라는 기라. 아이고- 보소, 머리를 깎아야 만내지. 그란해믄 평생을 몬 만나요. 그래 머리를 일찍 깎고 이래 평생 중노릇하고 있는기지. 여기 와가꼬 경봉 노시님한테 공부하는 길을 가르쳐 주이소, 이카니까 이뭐꼬 해라, 이뭐꼬- 내가 어데 있는고, 찾아보라! 그길로 인자 지금까지도 육십 년을 찾고 있는 길이라. 그라니 우리 아부지 사랑은 이 세상 끝나도 안없어질끼라. 

:  여지껏 법명대로 사신 것 같아요.

“출가해서 제가 제일로 좋은 기, 초발심자경문임니더. 주인공아 청안하라, 이때까지 니가 중생계에서 헤매고 굴러다니고 그래핸 거슨 너의 탓이지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니다, 그런 말이 나오그든. 그걸 읽어보고, 자다가도 이래 좋은 경전이 어디 있겠나, 하는기라. 내 법명이 능할 능 자, 참을 인 자, 경봉 시님한테 받은 긴데. 하루는 사촌사형님이 능인이가 이름이 안좋타꼬, 그래 내가 시님을 척 찾아갔어. 내 이름을 와 능인이라꼬 지줬슴니꺼, 하니까 니가 참을성이 엄써가꼬 능인이라고 지줬다아이가, 능히 참꼬 잘 살으라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이 번쩍 나는 거 같애. 정말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잘 참꼬 살아야겠따… 한기, 이래 세월이 간기라.”

:  스님, 이제 답을 찾으셨어요? 아버님 어디 가면 만나실지.

“답 말이요? 찾았다캐도 애매하고 안 찾았다캐도 애매하고. 그란기지.”

빙그레 웃는 얼굴에 주름이 패인다. 장독대로 나간 스님이 뚜껑을 열고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거무스름하다. 제비새끼처럼 입을 열어 사십년 묵은 콩잎 장아찌를 받아먹는다. 고추장마저 검게 그을려 약이 된 세월이다. 노전암을 지킨 출가생활 육십 년, 찾은 것도 아니요, 찾지 못한 것도 아닌 본래 그 자리. 아버지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은 깨달음의 길을 만나게 한 가피였다. 억겁의 선연이다. 객을 보내는 능인 스님이 선물처럼 마지막 이야기를 던진다. 

“광덕 시님이 여길 왔다갈 때가 1961년도 겨울인가 그럴검니더. 점심 잡숫고 가셨는데, 그 뒤로 다시 못뵈았지. 한 십 년쯤 지내, 부산 어데 판사분네를 가니까 불광이 딱 있는기라요. 광덕 시님이 맨드신 바로 그기. 하도 좋아가지고 군부대에도 보내고 신도들한테도 한 권씩 노나주고 이십 년 넘어 그래 했는기라. 지금도 오믄 얼릉 방에 가꼬 들어와가, 애끼가믄서 봄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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