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를 주인으로 세우는 것, 그것이 화엄의 실천

제16교구본사 고운사 주지 호성 스님

2015-03-31     불광출판사

 

선방 20년, 교구본사 주지 8년. 호성 스님 이력의 전부다. 군더더기가 없다. 첫 교구본사 주지 소임을 맡을 때 교구 대중스님들이 반신반의했던 것도 수좌 경력만 있었기 때문이다. 고운사孤雲寺가 전국 교구본사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그래도 교구본사다. 60여개 말사를 외호하면서 뒷바라지 하는 곳이다. 지역사회에서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해야 한다. 본사 주지는 교계 내외에 다양한 인맥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절집의 기본 인식이었다. 특히 고운사 대중스님들은 다른 교구본사의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지켜보면서 고운사에 새로운 기대를 요구했다. 이런 본사 주지 기준에 보면, 호성 스님의 이력은 멀리 있다. 이런 호성 스님을 고운사 대중스님들이 불렀다. 선방에서 수행했던 원력처럼 고운사를 새롭게 일으켜보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8년이 흘렀고, 다시 새롭게 작년 10월에 세 번째 본사 주지를 맡았다. 투표 없는 만장일치였다.  

| “몸을 바꿔라!” 
1981년 11월 19일. 처음 고운사에 왔다. 젊은 청년 한 명이 절에서 어슬렁거리니 근일 스님(고운사 조실, 원로위원)께서 물었다. “어디서 왔는고?” 아무 답변을 못했다. 의문을 풀려고 그날 바로 출가했다. 행자가 되어 극락전에서 기도를 했다. 많이 아픈 몸이었다. 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처님 전에 납작 몸을 엎드리고 다시 일어나는데 일어날 수가 없다. 한번 절하면 땀이 뚝뚝 흘렀다. 108배를 하는데 5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하다가는 아무래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이런 청년 행자에게 근일 스님이 한 마디 던졌다. “몸을 바꿔라!” 몸을 바꾼다는 것은 두 가지 길이다. 죽어서 바꾸는 것과 살아서 바꾸는 것. 몸을 바꾸기로 했다. 죽든, 살든 문제는 몸을 바꾸는 것. 꾸준하게 절하는 횟수와 시간을 늘려나갔다. 3천배를 대략 60번 정도 하니, 정말 몸이 바뀌었다. 물론 살아있었다. 호성스님은 “업業을 녹였다.”고 표현했다. 그러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근일 스님의 영향이 가장 컸죠. 그때 그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여기에 없었겠죠. 스님 말씀처럼 이후 내 몸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업을 녹였죠. 지금도 업은 녹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뀌면 신심도 절로 생깁니다. 이건 경험해야 알 수 있어요. 그런 경험들이 없으면 선지식을 봐도 믿음이 안 생겨요. 기연奇緣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신심大信心이 생기면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일어나는데, 선방에 다니면서 대분심과 대의정이 생기게 되었어요. 지금도 이것을 수행의 지남指南으로 삼고, 지금도 매일 108배를 거르지 않고 있습니다. 수행자로는 아주 중요한 일정입니다.” 

1986년 봉암사 동안거. 처음으로 참여하는 일주일 용맹정진이다. 밤낮을 눕지 않은 채 정진한다. 처음으로 용맹정진하는 수좌라면 좌선하면서 졸기 일쑤다. 어떤 수좌는 행선하면서 잠잔다. 그만큼 체력의 소모가 크며,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때 이미 스님의 몸과 마음의 근육은 대신심으로 단련되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맑은 정신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상판 수좌스님들이 놀랐다. 첫 용맹정진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수좌는 처음 봤다고. 그렇게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칠불암 선방을 다녔다. 마지막 선방은 고운사 고금당선원 선원장 소임이었다. 

“선禪은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경계, 꽉 막힌 자리, 빠져나올 수 없는 곳, 그곳에 갇혀있는 상태, 그런 것이죠. 밥을 먹어도 맛을 못 느끼죠. 가슴이 폭발할 것 같죠. 그렇게 감당할 수 없을 때를 넘어서면 직관과 통찰이 나오게 됩니다. 책을 읽어도, 사람을 만나도 세상의 흐름이 대략 보입디다. 저는 그랬습니다. 요즘 선방은 그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많이 없어졌어요. 세속적인 가치가 많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 “중흥불사, 본래 자리로 간 것이다”
선방에서 정진했던 에너지를 고운사에 쏟아 부었다. 우선 고운사부터 바꾸는 것이 중요했다. 먼저 경내를 개방했다. 고운사 대표적 건축물인 우화루를 시민들에게 돌려줬다. 자유롭게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역민들이 선禪을 체험할 수 있도록 템플스테이 선 체험관도 건립하고, 고운사 산책로 입구에는 화엄일승법계도를 형상화한 명상 숲길을 조성했다. 지역 노인 복지를 위해 ‘고운노인요양원’을 설립 개관하고, 지역 학생을 위해 장기 장학사업, 문화탐방도 꾸준하게 시행했다. 짧은 시간동안 고운사는 지역민에게 뚜렷하게 지역중심사찰로 자리 잡았다. 고운사 본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고운사高雲寺였으나 최치원(857~?)이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뒤에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따라 절의 이름을 현재와 같이 바꿨다. 그 후 도선 국사(道詵 國師, 827~898)가 크게 중창하여 사찰의 규모가 한 때 14개 군의 사찰을 관장하고, 366칸 전각과 500여 대중이 살았다. 고운사는 지장보살 영험성지라 하여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렸다. 이 때문에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운사는 본래 경북 지역 중심 사찰이었습니다. 사찰의 규모도 컸죠. 대중도 많이 살았어요. 일제시대 이후 쇠락했죠. 교구본사라고 하지만, 그 역할이 미비했습니다. 선 체험관을 만들고, 또 수월영민 선사(1817~1893)가 수행했던 암자를 복원한 것도 고운사를 본래 지역중심 사찰, 수행도량으로 만들려는 것 때문입니다.”

고운사는 지난 8년간 외형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찰의 중창되었다고 할 정도로 도량이 정비되었다. 보존할 것과 보수해야 할 것, 새로 지어야 할 것 등을 나누어 시기별로 불사를 진행했다. 또한 지역중심사찰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선체험관, 요양원, 화엄템플문화관, 사찰음식문화연구소, 안동청소년문화센터 개관, 도청 종교부지 매입 등을 이끌었다. 올해는 최치원 문학관을 완공해 지역내 국제행사 등을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외형뿐 아니라, 그에 맞는 본사 내적 역량을 확대해 나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 인재양성이다. 주지 소임에서 처음으로 한 것이 바로 이 교육, 인재불사다. 교구본사 내 재적스님들의 수행가풍을 잇기 위해 한국불교 최고의 강백인 각성 스님 특강을 마련한 것이다. 매년 안거 후 각성 스님과 함께 100여 명의 비구, 비구니스님들이 참석해 5일간 집중적으로 경전 연찬을 하고 있다.

“고운사는 의상 조사가 창건한 화엄도량입니다. 고운사를 화엄사상에 맞는 도량으로 만들자는 것이 이곳 어른스님들의 뜻이기도 하고, 또 저 역시 그렇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원입니다. 그 중에 핵심은 인적자원입니다. 작년 종단에서 승인받아 화엄승가대학원을 올해 개원해 첫 학인을 모집합니다. 대학원이 개원되고 대중이 많아지면, 고운사는 이제 지역 교구본사로서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다 갖추어진 셈이죠.”


| 불교를 내세우지 말자  
- 주변에서 많이 묻습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변화를 했는지요.    

“다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나 홀로 살 수 없다는 것, 이것을 메시지로 선과 전법, 교육이 진행될 수 있도록 고운사에 적용한 것입니다. 굳이 외형적으로 불교를 드러낼 필요가 없어요. 그저 스님과 불자가 하면 그것이 불교죠. 화엄사상도 그런 것입니다. 나, 우리, 모두 이렇게 함께 가는 것이 화엄사상이죠.  불교를 내세우지 않으면 불교 일을 걸림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자체와 할 일은 함께 협력하면서, 지자체가 잘 할 수 있도록 절에서 지원하죠. 일을 하다보면, 타종교인도 있고, 종교가 없는 분들도 있어요. 이 분들하고 함께 일을 만들려면, 불교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폼내지 말자는 겁니다. 그러면 일이 안돼요.”

고운사 앞 토지 4만 5천여 평을 매입할 때도 그랬다. 개신교 주민도 있고, 천주교, 무종교 주민도 있다. 그들이 모두 고운사 토지 매입에 동의해줬다. 만약 ‘불교 일’로 비췄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 일’이기 때문에 동의했다. 지역사회에서 불교 일과 지역 일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다. 이 경계를 없애는 것 중 하나의 사례가 마을 경로잔치다. 대개 사찰에서 운영하는 경로잔치는 사찰이 주관해서 마을 노인들이 초대받는다. 주객이 분리된다. 마을 노인이 객이다. 

고운사 경로잔치는 반대다. 고운사가 객이다. 주는 마을 노인들이다. 다만 잔치에 소요되는 금액을 고운사가 지원할 뿐이다. 마을 노인들이 주인이 되어, 전을 치고,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마을 노인들은 스스로 잔치를 준비하고 열면, 그 자리에 고운사 주지스님과 대중을 초대한다. 

당연히 삼귀의, 반야심경은 없다. 마을사람들 웃음이 삼귀의고, 노래가 반야심경인 것이다. 마을잔치 한다고 폼내지 말자는 것이다. 폼은 마을 노인분들이 내면 족하다. 그렇게 지역민과 어울렸다. 특히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일들은 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겨나갔다. 지역 청소년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빵과 우유를 매년 주거나, 지역 어르신들 환갑잔치도 빼놓지 않았다. 지역사회에서 점차 ‘고운사’란 단어가 오르내렸다. 이제는 지자체와 지역단체, 언론사 등과 함께 불교 일을 해나가고 있다. 불교를 앞세우지 않지만, 불교 일이다. 그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사람이 필요하다. 꼭 불자가 아니어도 좋다. 불교 일을 하면 된다. 그러면 불자다. 지금 고운사에 사람이 모이고 있다.   

1.png
 


제16교구본사 
고운사 8년의 주요 변화

2007~2008
- 고운사 우화루 시민 지대방으로 개방
- 천년솔향 아동청소년문화예술제 개최. 매년 지역 청소년 500여 명 참가.  
- 안동 의성 지역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시간 매년 방문 전교생 간식 제공, 격려. 
- 고운노인요양원 개원
- 지역민 한마음 경로잔치(매년 5월 개최).  
- 고운사–KBS ‘소년소녀가장 장학금 전달 및 문화탐방’ 매년 시행
- 수월 스님 정진했던 수월암 복원 준공. 
- 템플스테이 선 체험관 건립. 숲 명상로 ‘화엄법계도림’ 조성.  
- 각성 스님 특강(3개월) 매년 개최(참여대중스님 평균 100여 명)
2009~2011
- 매년 국내외 난치병어린이 지원을 위한 3천배 철야정진.(평균 1천여만 원 지원) 
- 고운사 화엄강원 상량식 거행
- 고운청소년재단 방과후 센터 운영
- 고운사 부설 사찰음식문화연구소 개소
- 고운사–MBC 라디엔티어링(라디오 들으며 숲길 걷기)
2012~2014
- 안동청소년문화센터 개관(고운사 직영)
- 고운사–의성고등학교 업무협약.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 도모. 
- 고운사 승가교육도량 화엄강당 상량식
- 고운사 사찰음식지도자과정 개설 운영 수료생 첫 배출(1기 16명)
- 고운사 명부전 10대 시왕 탱화 점안식
- 고운사–산림청 영주국유림관리소 업무협약식. 신림치유・템플스테이 협력 국민치유서비스 제공.
- 고운사 화엄템플문화관 개관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원장 화랑 스님) 개원
- 경북도청 이전지(안동) 종교부지 매입(1,600평)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