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불교가 직면한 현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2015-03-31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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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라고 하면 전통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현실에서 한용운은 근대불교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아가 그는 대중적인 인지도만이 아니라 학계의 지명도까지 대단히 높다. 그러나 불교계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한용운의 이미지가 과연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나아가 그러한 평가에 적합한 내용과 가치가 충분히 존재하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던 적이 별로 없다.


| 민족시인, 불교 근대화론자의 이미지
실제 한용운은 불교교단에서 대처승 경력이나 근대불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줄곧 외면당했다. 오히려 문학계가 ‘민족시인’으로 한용운을 주목하고 부각시켰는데, 특히 1970년대에 「창작과 비평」이 그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문학계가 한용운을 선택한 것은 진보적인 문인이 사라지고 우파가 장악한 문단에서 민족문학의 표상으로 내세울 만한 작가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민족문학 담론이 유행하면서 한용운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됐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인문학 전반으로 한용운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불교계도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근대불교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면서 한용운이 불교 개혁의 상징으로 주목받게 됐다. 

1970, 1980년대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부각됐지,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은 민족시인, 불교 근대화론자라는 이미지가 확대되고 재생산되면서 신화화된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런 고착화된 평가에 대한 의문은 거의 제기되지 못한 채 학계에서는 무비판적으로 민족불교라는 틀이나 근대불교라는 이미지로 한용운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조선불교유신론』(이하 『유신론』)이 어떻게 이해되고 활용되는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유신론』은 한용운이 근대문명의 도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정체된 불교를 어떻게 개혁할 것이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시대적 고민을 담아 1910년에 저술했다. 


| 한용운이 이해한 문명론
『유신론』의 전체 구성은 서론, 본문 15장,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론의 2, 3장에서는 불교가 미신이 아니라 종교적, 철학적 성질을 갖고 있으며, 불교가 표방하는 평등과 구세의 이념은 문명의 시대에 적합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이어 5~15장은 불교계의 구체적인 개혁 방안을 담고 있다.

한용운은 염불당, 소회, 각종 의식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며, 그것이 미신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반대로 그는 승려의 교육, 포교, 사원의 위치 문제 등에 대한 개혁론, 승려 결혼론 등을 주장한다. 문명에 적합한 종교라는 방향에 부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론의 내용은 서구근대의 문명론, 곧 미개(야만)-문명이라는 구도가 반영돼있다. 또한 그의 문명론은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한 문명론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며, 당대의 화두였다. 서양 제국은 자기가 도달한 지평을 문명이라고 총괄하고, 문명을 보편적인 척도로 보고 세계를 인식했다.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에서 문명은 세계의 체계이자 질서였고, 동아시아의 근대사는 그러한 문명에 대한 대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론』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러한 문제는 한용운이 이해한 문명론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상사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신론』에 담겨 있는 문명론은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의 내용과 논리를 받아들였다. 량치차오의 근대지에 대한 정보와 이해는 메이지 시기 일본 근대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더욱이 한용운은 1908년에 6개월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므로 불교의 개혁과 근대화의 방향에 대한 모델로서 일본을 주목했다. 

한용운의 문명 인식이나 불교 근대화 언설은 메이지 일본에서 수용하고 이해한 문명 인식이 량치차오를 통해 한용운에게 이어진 것으로, 동아시아 근대지의 사상연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나아가 메이지 일본이 수용하고 소화한 서구 근대문명의 한계는 제국일본이 걸어온 근대사의 결과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량치차오나 한용운에게도 그러한 한계가 그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한용운의 불교 근대화론에 대해 상투적으로 찬사를 늘어놓거나 민족불교의 틀로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한계가 많은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유신론』에 대한 이해 문제는 불교라는 범주에서만 접근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근대 이후 불교의 문제는 단순히 종교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변화, 시대적 모순, 사회와 국가와의 관계 문제 등이 모두 무관하지 않게 진행된다는 점도 함께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불교가 과거와 같이 안주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 어떠한가를 절감하게 하고 있다.


| 근대불교가 직면한 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여전히 그러한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거리를 둘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불교를 바라보는 낡은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불교라고 하면, 과거에 이미 창조적인 활동이 완결되었고, 불교의 사상이 모두 나왔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의 역사가 얼마나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과정이었는가를 모른 채 전통에 대한 묵수적인 태도와 시각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오늘의 세계는 근대문명이 낳은 구조적인 한계가 가시화되고 있으며, 언제 붕괴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기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작년의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에 놓인 위기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 국가가 무엇인지, 근대문명의 실체가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불교계에는 이러한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이론이 없다. 

그것은 지금의 불교가 지닌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거슬러 올라가 근대 이후 불교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식민지와 분단으로 점철된 20세기의 냉혹한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과연 그러한 현실에서 불교계가 어떻게 시대적인 과제와 격투하면서, 어떠한 방향을 모색하였는가를 냉정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비구・대처분쟁’과 그 이후의 흐름에서 드러나듯이 불교는 전통의 묵수墨守가 지나치다. 반면, 근대불교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사상적인 모색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그러한 점에서 한용운이 1990년대 이후에 불교개혁의 아이콘으로, 나아가 개혁론의 방향과 내용과 관련된 사례로서 제기되는 것이 별로 부자연스럽지 않다. 『유신론』이 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오늘날 한국불교가 직면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라는 여러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고전과의 대화는 새로운 자기 발견과 세계인식의 창조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은 근대불교의 고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불교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지침이 되는, ‘오늘의 고전’으로서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명제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일본학술진흥회의 초청으로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불교학부에서 2년간 박사후과정을 이수했다. 교토대학, 도쿄대학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전공은 한국사상사이며, 근래에는 동아시아 근대지의 수용과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주요 논저로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과 일본의 근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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