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암자에 들다

예산 덕숭산 견성암 – 서산 연암산 천장암

2015-02-27     불광출판사

 


하룻밤짜리 짐을 꾸렸다. 늘 들고 다니던 가방에 휴대용 세면도구와 수면바지 하나를 챙겨 넣었다. ‘이거면 될까, 정말?’ 된다. 충분하다. ‘여벌옷이나 책은?’ 필요치 않다. 옷은 하루쯤 더 입어도 좋고, 남는 시간이 있다면 채우기보다 비우는 데 쓰면 된다. 발걸음 가볍게 현관을 나섰다. 겨울 암자로 떠난다.

| 비구니 선객 일엽과 스승 만공의 발자취를 따라서
겨울 오후의 하늘이 묵직하다. 눈이라도 쏟아질 기세다. 덕숭산 입구에 도착했다. 딱히 짐이랄 것도 없지만 가방은 차에 두기로 한다. 빈손으로 내려 산책하듯 걷는다. 물을 따라 난 길을 천천히 걸어 오른다. 왼쪽으로 흐르던 물은 길이 가로지르고 나면 오른쪽으로 흘렀다. 등산로를 따라 천팔십 개 돌계단을 짚어 오른다. 팔십여 년 전, 삼십대 후반의 한 여인이 걸어서 오른 그 길이다.

일엽一葉. 본명은 김원주. 1896년 평안도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서 수학하고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채우지 못한 사랑의 허기를 안고 젊은 날을 떠돌았다. 덕숭산 자락은 김원주가 ‘선객 일엽’으로 거듭난 길이다. 십여 분을 오르다, 그도 한번쯤 쉬었을 것 같은 바위에 기대본다. 가쁜 숨이 가라앉을 때쯤이었을까. 저만치 벼랑 끝에 얹힌 초가가 보였다. 소림초당이다.

당대의 문필가였던 일엽에게 스승은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 했다. 만공 스님이다. 만공 스님이 주석했던 소림초당은 벼랑 끝에 앉았으나 위태롭지 않았다. 둥근 초가지붕은 태초의 시원인 듯 안온했다. 초당으로 가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담장 너머 들여다보이는 마당은 단정했고 창호에 덧댄 비닐에는 뽀얗게 습기가 어렸다. 누군가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모양이다. 

발길을 돌려 다시 돌계단을 오른다. 어느새 온몸에 열감이 느껴진다.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바위를 깎아 조성한 관세음보살입상이 나타났다. 멈춰 서서 합장 반배를 올린다. 뜨거운 숨을 내고 찬 공기를 거듭 들인다. 차츰 날숨과 들숨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진 숨을 따라 마음자리도 말갛게 깨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제법 높게 올린 두 겹의 기단이 안정적이다. 무심한 표정의 관세음보살이 쓴 투박한 2층의 관은 기단과 짝을 이루듯 닮았다. 1924년 어느 날, 만공 스님이 어둠 속에서 바위가 빛을 내는 것을 보고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옆으로 자리한 향운각 역시 안거 중인지라 ‘외인 출입금지’였다. 샘물을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이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미소 띤 월면月面의 안내판이 나타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혜사 선방 입구다. 묵언정진黙言精進 출입금지出入禁止. 다시 보니, 보름달 얼굴의 미소에는 번뇌마저 들고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결기가 서려 있다. 정혜사 앞마당은 덕숭산 최고의 조망처로 손꼽힌다. “모르는 척 들어가서 둘러보고, 누가 물으면 관음전에 참배 왔노라고 하라.”던 지인의 조언을 배반하기로 한다. 닫힌 문을 향해 합장 반배 하고,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대신 견성암으로 되짚어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 “이것 잡숫고 건강하시고 소원성취 하셔유”
세계의 수많은 명산을 두루 오른 어느 산악인은 나이 오십을 넘기며 수직등정이 아닌 수평산행을 권하기 시작했다. 그는 해발 495m의 덕숭산을 ‘높이 대신 깊이를 음미할 수 있는, 몰입의 겨울산’이라고 했다. 

소림초당을 지나 관세음보살상을 참배하고 정혜사에서 발걸음을 돌렸으니 덕숭산 산자락을 에둘러 걸은 셈이다. 그동안 의식은 내딛는 발과 땅의 만남에 집중해 있었다. 걷기에의 몰입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도 정상을 향한 갈망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즐거움. 뻐근해진 근육들과 근육에 의지한 관절들이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합주한다. 온전히 살아있다는 생명의 증거다. 덕숭산의 높이를 등지고 또 다른 깊이를 만나러 견성암으로 향했다. 내리막길이었다.

본래 작은 초가였던 견성암은 비구니 학인들의 수행처가 되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백여 명의 규모를 갖춘 대중처소다. 커다란 인도식 2층 건물의 아래층은 선방, 위층은 법당이다. 마당 한가운데 큼지막한 나석裸石이 돋아 올라 있다. 뿌리가 제법 깊어보였다. 바위에 마당을 올린 형세다. 

한 스님이 털모자를 쓰고 나오신다. 낯빛이 박꽃처럼 흰 노스님이었다. 절구통 수좌. 굳어버린 걸음걸이만으로도 얼마나 오래 앉았던 세월인지 짐작이 갔다. 휘적휘적 다가온 스님은 주먹만 한 귤을 내밀었다. 

“이것 잡숫고 건강하시고 소원성취 하셔유.”

돌아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는데,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다. 낡아지고 빛바래져 오직 자비만 남은 노구老軀였다. 마당에 서서 한 입에 털어 넣은 귤은 달고 시원했다.

“어서 오세요. 법당은 2층으로 올라가세요.”

계단을 쓸던 사미니스님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2층 복도 천장에는 만공 스님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칠근루七斤樓. 쌀 한 톨에 시주의 은혜가 일곱 근이라는 뜻이다. 준엄한 가르침이다. 일엽 스님은 이곳 선방에서 30년 동안 입승 소임을 살았다. 법당에는 좌복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좌복마다 스님들의 법명이 적혔다. 차마 거기 앉지 못하고 맨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린다. 시주의 은혜가 쌀 한 톨에 일곱 근이면, 그 공양을 받고 정진하는 수행자의 자리는 또 얼마나 엄중한가. 복도에는 한 스님이 포행하는 어깨 위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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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 선사 보림처, 천장암에서의 하룻밤
견성암에서 천장암이 멀지 않다. 덕숭산 입구에서 23km, 차로 40여분 거리다. 천장암天藏庵. 하늘이 품은 암자라는 뜻이다. 일엽의 스승이었던 만공의 스승 경허 선사 보림처다. 2003년부터 염궁선원을 개설해 안거철마다 선객들이 정진한다. 하지만 천장암은 선사의 옛 자취를 기리는 성지나 선객을 위한 수행처에 머물지 않는다. 주말 저녁이면 ‘암자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활짝 연다.

천장암이 가까울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인적 드문 산 아래 마을에는 가로등마저 드문드문했다. 비탈길 아래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는 순간, 먹빛 어둠이 내려앉았다. 올려다보니 하늘이 별천지다. 별들이 이렇게 가까웠던가. 오르막 위로 암자의 불빛이 보였다. 달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긴다. 보름이 지난 지 여러 날인데도 초저녁달이 꽤 밝다.

경허 스님 문하에도 ‘세 달(三月)’이 밝게 빛났다. 수월水月.혜월慧月.만공滿空(법명이 월면月面) 스님이다. 수월 스님은 이곳 천장암에서 삭발 출가했다. 혜월 스님과 만공 스님은 스승의 가르침을 찾아 이곳에 왔다.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고즈넉한 도량이 펼쳐진다. ‘천장암’이라는 현판을 단 인법당因法堂 옆으로 작은 방이 둘 딸려 있다. 경허 스님이 1년간 폐관수행하신 방, 그리고 28세의 수월, 23세의 혜월, 14세의 만공이 함께 수행하며 스승을 시봉했던 방이다. 

어둠이 품어 안은 암자는 적요했다. 공양간 문을 두드려본다. 공양주 보살님을 비롯해 암자에 머물고 있는 몇 분이 반가운 얼굴을 내민다. 저녁에 온다는 손님을 암자에선 오후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선 서너 시면 저녁이지요. 지금은 한밤중이고요!(웃음)”

도시와 암자의 시계는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그제야 안다. 주지스님은 선방 스님들과 함께 입선 중이라고 했다. 3년 전부터 주지 소임을 맡은 이는 허정 스님이다. 경허-만공-벽초-원담-옹산 스님으로 이어진 선맥을 물려받았다. 둘러앉아 차담을 나누다 다음날 아침 포행을 하기로 한다. 방선 중에 들른 허정 스님은 식구와 객을 대함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두런두런 암자 살림살이 의논을 곁에서 들었다. 편안하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씀이었다.

밤이 깊어 하룻밤 묵어갈 방을 안내받았다. 작은 방에 밝은 전등은 눈이 부셨다. 스위치를 끈다. 암자에서의 하루가 닫힌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책 속 한 구절이 스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람들은 자꾸만 어디론가 떠난다. 인도로, 다람살라로, 혹은 부탄으로. 하나같이 가난하고 척박한 곳들이다. 이 화려한 도시의 불꽃을 두고 왜 그토록 삭막한 곳으로 떠나는 것일까? 그건 지극히 당연하다. 빛이 화려하면 내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이 빛의 폭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외부를 향해 쏘아댔던 빛을 자기 내부로 향하기 위해서.” -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中에서

 

| “좋다 싫다 할 것 없이 그저 배우는 거지요.”
아침공양 시간에는 선방 스님 일곱 분이 오셨다. 누룽지 죽에 김과 김치, 냉이된장국이 나왔다. 소박하고 정겨운 밥상이다. 남김없이 그릇을 비운다. 지난밤 숙면으로 충전된 몸은 날아갈듯 가볍다. 포행길에 암자식구 ‘낭만이’가 따라나섰다. 
수덕사까지 가는 10km 길에는 ‘깨달음의 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천장암과 마을을 잇는 길에는 ‘경허로’라는 명예도로명이 지정되었다. 허정 스님 정성이었다. ‘깨달음의 길’은 서산 아라메길, 내포문화숲길과 만나고 포개진다. 수덕사 쪽에서 되짚어 올 때에는 ‘길 없는 길’이라고 부른다. 

‘깨달음의 길’ 첫머리에는 아담한 동굴이 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혜월 스님이 7일 동안 참선한 끝에 깨쳤다는 자리다. 여름이면 이곳을 선방 삼아 정진하는 스님도 있다고 한다. 동굴은 사람이 앉기에 맞춤한 높이였다. 안쪽은 생각보다 깊었다. 닫힌 듯 열린 천연의 수행처다. 

천장암과 수덕사를 오갔을 수많은 선사들, 그들의 발자취를 밟는다. 천장암을 안고 있는 것은 연암산이다. 연암산 둔턱에 오르니 멀리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낭만이와 일행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서산과 예산의 경계에서 되돌아 다시 암자로 향한다. 두 시간 넘게 걷고도 기운은 촘촘하게 차오른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칠층석탑 아래서 소요한다. 저만치 싸락싸락 비질 소리가 들린다. 선방스님이 인법당 뒤편에 딸린 처마 밑을 쓸고 있다. 부엌에선 천장암에 온 지 한 달쯤 되었다는 신 처사가 아궁이를 살핀다. 수월 스님이 불을 때다 방광放光했다던 그 부엌이다. 잿불에 고구마가 잘 익었다.

어느 샌가 허정 스님과 선방 스님 한 분이 부엌으로 들어섰다. 낭만이도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궁이 앞에 둘러 앉아 뜨거운 고구마를 나눈다. 껍질은 낭만이 몫이다. 단란한 공기를 돋우며 허정 스님이 신 처사에게 농을 건넸다.
“알루미늄 호일에서 안 좋은 호르몬 나온다던데. 주지스님 이런 거 먹어도 되겠어?”

“…다들 이렇게 먹던데요.”

무덤덤한 신 처사 대답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스님이 괜히 유난을 부린 셈이 됐다. 신 처사가 자리를 뜬 뒤 스님은 아궁이에 장작개비를 던져 넣으며 말했다.

“신 처사가 좀 어리숙해 보여도 내 보기엔 그렇지가 않아요. 수월 스님도 글을 읽지 못하셨다는데…, 스님이 저렇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그래서 여기 오는 이들은 내치지 못해요. 인연이든 아니든. 내가 이곳을 잠시 지키듯, 그들에게도 이곳에 머물 권리가 있지 않겠어요? 부처님이 만약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스스로 묻곤 해요. 아마 부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지나는 길에 넌지시 신 처사에게 물었다. 

“어떤가요? 암자 생활.”

어려운 질문이라도 받은 듯 고민 끝에 답이 돌아온다.

“좋다 싫다 할 수 있나요, 그저 배우고 있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말이다. 그저 배운다는 것, 분별을 떠난 자리에서 나온 말. 

암자에서 만난 순수純粹는 도시로 돌아온 뒤에도 긴 여운으로 남았다. 수많은 선사들의 무애도 순수, 그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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