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빵 속에 녹아든 명장의 미소

제빵명장 리치몬드 제과점 권상범 회장

2015-02-27     불광출판사

 


세상은 추웠다. 2월의 늦은 겨울 찬바람은 뼛속까지 아리게 파고들었다. 그가 잠을 청할 곳은 청계천변 길 위였다. 이것저것 주워 모아 덮어도 시린 바람을 어쩌지는 못했다. 열차를 탈 돈만 있으면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수없이 갈등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일어서서 걸었다. 첫 월급 2,000원으로 시작한 제빵의 길, 지금 그는 연간 2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한국의 대표 제과점의 회장이 됐다. 대한민국 제과명장 3호, 리치몬드 제과점 권상범 회장의 이야기다.


| 성실함으로 만들어온 제빵 인생
권상범 회장은 해방둥이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양반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서 자란 탓에 집밖으로 5리(약 2km)만 나가도 나가면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집을 향해 절하고, 들어오는 길에도 “다녀왔습니다.”라고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 시절 봉화의 삶은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됐다. 권 회장이 제빵의 길로 들어선 것도 가난을 면키 위한 이유가 컸다.

“외가 어른이 경북 의성에서 다과점을 하셨어요. 몇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시작했는데, 단 걸 먹을 수 있으니 좋기도 하고 해보니까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더 큰 곳에서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대구 광월당에서 1년 정도 일을 배웠죠. 거기서 더 넓고 큰물을 찾아 2,000원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 땅을 밟는 순간부터 그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시작됐다. 여비는 3일 만에 동이 났고, 그 뒤로는 무작정 걸어 다니며 일을 구했다. 그렇게 5일을 돌아다닌 끝에 어렵사리 종로5가 성림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렵게 구한 직장인만큼 무조건 열심히 일했다. 잠은 작업대 연탄 가마 위에서 잤고, 주는 대로 먹으며 일만 했다. 그러나 그곳의 공장장은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는 성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3개월 만에 그는 퇴사를 결심했다. 15일의 말미를 둘 테니 후임자를 찾으시라는 말과 함께. 

문제는 성림당을 그만 둔 이후부터였다. 갈 곳도, 잠을 청할 곳도 없었다. 한 겨울 찬바람 속에 스스로 걸어 나왔던 1965년 2월. 그때가 인생 최고의 시련이었다고 권 회장은 회고한다. 풍찬노숙을 하고 숱하게 걸어 다니며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겨울바람 못지않은 냉대였다. 그러던 중에 광교 풍년제과에 붙은 구인공고를 보게 된다. 그릇을 닦고 청소할 사람을 구하는 공고였다. 

당시의 풍년제과는 당대 최고의 제과점 중 하나였다. 어렵게 자리를 잡은 그곳에서 그의 성실함이 빛을 발했다. 처음에는 풍년제과 직원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때부터 늘 “나는 미움 받을 DNA가 아니다.”라고 되뇌며 스스로를 만들어왔다. 권 회장은 그렇게 자신을 추스르며 몸을 낮췄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윗사람들의 일마저 손에 익힌 그였지만, 어깨 너머로 빵 만드는 법을 다시 익혔다. 그랬더니, 어느 날 사장이 그의 월급에 1,000원을 더 얹어줬다. 성실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늘 인생이 순탄하게 풀렸다면, 제과명장 권상범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하고 배워서 차근차근 윗단계로 올라가던 그는 공장장이 바뀌면 도로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다. 새 공장장이 자기 사람을 데려온 탓이었다. 그래도 보름만 지나면 공장장들은 그를 눈여겨봤다. 그만큼 군소리 없이 주어진 일에 충실했다. 하지만 3년간 쌓아놓은 탑은 공장장이 바뀌면 여지없이 무너졌다.


| ‘부처의 삶’을 가슴에 새기고 살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그렇게 세 차례에 걸쳐 허드렛일부터 제법 책임 있는 자리까지 오르내리는 동안 8년이 흘렀다. 처음 제빵의 길로 들어선 지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그는 제빵의 기본을 탄탄히 다질 수가 있었다. 권 회장은 평소 그를 눈여겨봐왔던 김충복 씨의 도움으로 당시 신생 제과점이었던 나폴레옹 과자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충복 씨는 제빵계의 전설같은 인물. 자리를 옮긴 나폴레옹 과자점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한다.

3년 간 권상범 회장을 눈여겨봤던 나폴레옹 과자점의 사장이 그를 동경제과학교로 유학 보낸 것이다. 거기서 그는 평소 닦아놓았던 영어 공부의 덕을 톡톡히 본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오스트리아 출신 제빵 기술자와 영어로 친분을 쌓으면서 선진기술을 물려받게 됐다. 350명의 학생 중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그가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셈이었다. 그가 귀국한 이후 나폴레옹 과자점은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의 월급도 보통 기술자의 서너 배로 뛰었다. 월급 60만 원.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제빵계에서 가장 많은 월급이었다.

“처음 제빵을 시작한 게 열일곱 살 때였어요. 그 뒤로 고생하면서 기술을 연마한 것이 12년이었고, 나폴레옹에 들어가 공장장으로 배워가며 일한 게 7년이었죠. 얼추 2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 최고로 인정받았어요. 그때까지 하루에 잠은 4~5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었죠. 참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그즈음에 공덕동 마포경찰서 옆에 가게를 냈지요. 나폴레옹 과자점의 이름을 달고 시작했지만, 그게 나의 첫 가게였어요.”

1979년 처음 연 그의 가게는 1983년 ‘리치몬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스위스 국립 리치몬드제과학교로 연수를 다녀온 이후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며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그는 늘 혁신을 꿈꿨고, 새로운 선진기술을 누구보다도 먼저 도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리치몬드’의 명성은 그렇게 권 회장이 평생을 바쳐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듯 만든 것이다. 

그에게는 한결같은 철칙이 있다. 그날 만든 빵은 반드시 그날 다 판다는 것. 빵은 가장 맛있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넘어가면 고객에게 팔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팔고 남은 빵을 마포경찰서 전경들에게 나눠주거나 불우한 이웃들에게 전달해왔다. 여기서 불자로서 그의 마음자세가 드러난다.

“늘 ‘내 가슴속에 부처님이 계시니까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베풀며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덕을 쌓는 것은 사람이 세상을 사는 기본이에요. 내가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덕을 쌓을 수 있잖아요. 내가 곧 부처라고 배웠습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베풀 줄 아는 선행. 그렇게 사는 것이 부처의 삶 아니겠습니까.”

1년 전인 2014년 1월, 권 회장은 평생을 가꿔온 리치몬드 제과점을 아들인 권형준 대표에게 물려줬다. 권형준 대표 역시 예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 동경제과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그 역시 손맛이 남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권상범 회장은 매일 아침 리치몬드에 나온다. 손님들 곁에서 빵과 함께 한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매일 아침 그렇게 리치몬드의 고소한 빵맛으로 녹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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