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한국사회, 고요한 죽음의 지혜가 절실하다

2015-02-27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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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가 그리 멀지 않은 집안 누이의 슬픈 소식을 들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살갑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는 꽤 똑똑하고 맘씨도 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결혼도 잘했다고 한다. 지난 추석 아기만 데리고 불쑥 친정집에 왔다. 아버지와 엄마 옆에서 자고 싶다고 하더란다. “엄마, 아빠 사랑해….” 그랬는데 새벽에 깨어보니 딸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지갑도 휴대전화도 방에 그대로 둔 채였다. 딸은 며칠 후 강물에서 떠올랐다. 유서 한 통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다 마음에 병이 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둔해서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은 줄을 까맣게 몰랐다”는 고향 아저씨의 한숨이 가슴을 찢었다.


| 2014, 코리안 킬링필드
새해 벽두에 서울 서초동에서 또 세 모녀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마흔일곱 살 가장이 부인과 두 딸을 살해한 것이다. 유명 사립대를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면서 10억 원대의 아파트와 외제차까지 소유한 중산층이었다. 운이 나빠 실직을 했지만 자녀들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고 아내에게는 대출받은 돈으로 매달 400만 원씩 생활비를 줬다고 한다. 주식투자 실패 등으로 손해를 봤지만 그에게는 대출금을 갚고도 남을 아파트가 있었다. 아내의 통장엔 3억 원이나 들어 있었다니 가난 때문도 아니다. 하지만 실패를 모르고 달려왔던 인생과 유독 자존심이 강했던 성격은 갑작스런 실직과 실패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중산층 탈락의 상대적 박탈감과 ‘루저’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지난해 2월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의 기억도 생생하다. 60대 초반의 어머니가 30대 초·중반의 두 딸과 함께 반지하 셋방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동반자살하면서 집 주인에게 현금 70만원이 든 봉투를 남겼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홀로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어머니가 팔을 다치면서 수입이 끊겼다. 두 딸은 이미 카드빚으로 신용불량 상태였고 큰딸은 심한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었다. 복지 사각지대의 실상을 보여준 이 사건은 ‘세모녀법’으로 불리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의 계기가 됐다. 10월에는 서울 마포구의 68세 셋방살이 독거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유독 안타깝고, 참담하고, 어두운 죽음의 뉴스들이 뒤덮은 ‘킬링필드’의 나날이었다. 경주 리조트 참사에 이어 진도 앞바다 세월호에서 꽃 같은 아이들의 서러운 주검이 실려 나오는 모습을 볼 때 우리 가슴은 무너졌다. 군부대에서는 후임병 폭행, 총기 난사 사건으로 장병들이 숨졌다. 울산, 대전, 칠곡, 인천의 나쁜 엄마들이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했다. 주민의 폭언과 인격모독을 견디지 못하고 분신한 아파트 경비노동자, 성추행까지 견뎠지만 정규직 전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계약직 여성 등 가슴 아픈 죽음들은 모두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울산의 사촌동생 전기톱 살인 사건, 수원의 비닐봉지 토막살인 사건, 포천 고무통 시신 유기 사건, 김해 여고생 암매장 사건 등도 끔찍했다.


| 깨진 창문을 바로 수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사람 목숨을 깃털처럼 가벼이 여기는 시대다. 이런 죽음들은 한국사회의 ‘파탄’을 일깨워준다. 온 나라가 천박하고 저급한 이기심과 탐욕으로 얼룩진 탓이다. 금력과 권력욕, 부익부 빈익빈의 가파른 격차, 자본이 만들어낸 폭력이 온갖 죽음과 죽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삭막한 전쟁터 같은 이 땅에 행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와 관련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조사 결과가 있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34개 회원국 가운데 33위, 복지 충족지수 31위, 자살률은 변함없는 1위를 기록했다. “빌딩의 깨진 창문을 바로 수리하지 않고 놔두면 나머지 창문들도 곧 깨지게 된다.”는 제임스 윌슨의 ‘깨진 창문’ 이론의 그 창문 깨지는 소리가 지금도 곳곳에서 들린다. 

때로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가 한 시대를 스크랩해 보여주기도 한다. 2014년 막바지에 한국사회를 강타한 드라마 ‘미생’은 비정규직 600만 시대를 투영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 ‘미생’의 나라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청년세대의 취업난, 비정규직 차별, 실세를 향한 줄서기, 직장 내 여성비하, 워킹맘들의 어려움, 퇴직자의 고통 등 한국사회의 그늘들을 속속들이 짚어냈다. 미생은 ‘을乙’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땅콩 회항’으로 국제적 망신을 산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 주차장 아르바이트 직원을 무릎 꿇린 백화점 고객 등은 우리사회 천박한 부자들의 ‘갑질’을 극단까지 보여준 사례다.

영화 ‘국제시장’을 두고는 이념·세대 논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폐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영화 주인공 덕수 같은 노년세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번영을 이뤘다. “이만하면 잘 살았죠? 근데 저 정말 힘들었거든요.” 주인공 덕수의 독백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을 위한 맹목적 밥벌이 때문에 앞만 보고 내달리느라 도덕과 인정을 내팽개친 일도 많았다. 젊은이들이 미생으로 내몰리는 경제·사회적 구조가 그 시절에 싹튼 면도 있다.

얼마 전 어느 지면에 ‘국제시장 세대’, ‘미생 세대’라는 말을 처음 쓴 바 있다. 오늘, “정말 힘들었다.”는 국제시장 세대를 아버지로, “지금 너무 힘들다.”는 미생 세대를 아들로 둔 현재의 가장들을 생각한다. 그들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격동의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 ‘모래시계’의 ‘모래시계 세대’라고 해두자. IMF를 겪으며 치열한 경쟁에 내몰렸고, 정년을 못 채우고 짐을 싸기도 한 세대다. 그러니 그들 역시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세월을 살았고, 또 살고 있다. 때로는 국제시장 세대와 모래시계 세대, 미생 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팽팽하게 격돌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갈등공화국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너무 거칠고 각박하고 극악스럽다.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이념간에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틀어잡고 악을 쓰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불통과 양극화는 사회적 불행감의 근원이다. 정치나 정치인에게도 기대할 게 없다.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 국가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고, 우리 가슴에는 싱크홀 만큼 큰 구멍이 뚫렸다. 군림하는 강자와 멸시받는 약자의 ‘막장극’이 일상으로 벌어진다. 그게 사람 잡는 우리 사회의 병적 에너지라고 본다. 대물림되는 양극화로 자식의 미래에도 희망을 찾을 수 없으니 가족자살, 혹은 가족살해 같은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는 것이다. 2010년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국가별 ‘죽음의 질’을 조사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얼마나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살핀 결과 한국은 OECD 회원국을 포함한 40개국 중 32위에 그쳤다.


| 평화로운 삶, 고요한 죽음이 절실한 시대
이런 때에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사랑’으로 추운 세월을 이겨내는 미덕을 보여준다. 76년을 함께 산 노부부가 그려내는 변치 않는 정과 온기, 배려와 고백은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 영화의 백미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헌옷을 아궁이에 태우며 이별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먼저 가서 좋은 데 자리 잡고 데리러 와요. 그러면 손을 잡고 같이 갑시다.” 노부부가 생각하는 죽음에는 불교적 정서가 녹아 있는 듯하다. 대학생 불교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진모영 감독은 “죽음은 사랑을 이어가는 징검다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모든 죽음은 슬프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야말로 온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영화 ‘님아’의 노부부 이별이 귀하게 가슴 속에 깊이 박힌다. 좋은 인생이 곧 좋은 죽음이라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있다고 가르치는 게 불교 아니던가. 죽음 너머까지 따뜻하게 끌어안는 데서 불교의 향기는 더 깊어진다.

어찌 보면 한국사회가 이렇게 망가지고 삶이 멍든 책임이 종교에도 있다. 불교·개신교·천주교가 교회당과 법당을 크게 짓고 금력·권력에 한 눈 팔면서 세상의 아픔을 외면한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교회당에 예수 없고, 사찰에 부처 없다는 말도 예사로 듣는 판이다. 불교는 스스로 탐진치의 구정물통에 빠져 있다. 본디 세상에 괴롭고, 어렵고, 슬프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에게 지혜의 촛불을 켜주고 마음의 고약을 붙여주는 게 불교라는 말은 언제나 빛나는 가치일 터다.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 주체적인 삶,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는 불교가 최고 아닌가. 불교는 요즘 세상에 절실한 마음공부, 힐링, 웰빙, 그리고 웰다잉의 처방전과 명약을 수두룩하게 쌓아놓고 있다. 

그걸 제대로 써먹을 때가 바로 지금, 바로 여기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려면 상대방이 가난해도 존중해주는 사회, 내가 가난해도 품격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깊은 사랑과 자비심의 연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한국불교가 이제라도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어려운 시대와 이 시대의 삶에 치유와 위로, 관심과 배려, 화해와 해원, 각성과 성찰을 불러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불교는 어디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평화로운 삶, 고요한 죽음의 지혜가 절실한 시대다.



김석종
경향신문 논설위원.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30년 넘게 기자생활을 했다. 주로 문화 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종교 분야를 많이 취재했다. 매거진X 부장, 생활레저부장, 문화부장, 문화에디터, 선임기자를 지냈다. 현재 경향신문에 ‘김석종의 만인보’를 연재한다. 조계종 불교언론문화상 등을 받았다. 한국불교 원로스님들을 인터뷰한 『마음살림』, 중국 선종 사찰 순례기 『그 마음을 가져 오너라』(공저), 그리고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공저), 『오늘 우리는 이곳으로 떠난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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