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틀을 깨라

2015-01-29     문태준

‘고독과 방랑 그리고 장미 또는 모순의 시인’으로 불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에게는 생활의 규칙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오전 시간을 활용해서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릴케는 스스로 “저는 편지가 아직도 인간들 사이의 가장 멋지고 풍요로운 교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구시대풍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릴케는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문학 지망생에게 1903년부터 5년 동안에 걸쳐 10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잘 알려진 대로 그것이 책으로도 출간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릴케는 매번 편지의 앞머리에 “친애하는 카푸스 씨,”라고 정중하게 썼다. 물론, 편지의 끝에는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고 써서 관심과 애정을 각별하게 표현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편지글에서 릴케는 ‘위대한 고독의 내면’을 상당히 강조한다. 가령 다음의 문장들을 읽을 때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발견된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당신의 고독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아름답게 울리는 당신의 비탄으로 견디게 하세요.” “고독은 단 하나 뿐이며, 그것은 위대하지만 견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고독을 버리고 타인과 값싼 유대감이라도 맺고 싶고,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 사귈 가치조차 없는 사람과도 자신의 마음을 헐고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그러나 그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한 개인의 아주 사적인 고독을 중요하게 여긴 릴케는 사랑의 감정이 교환되는 것에 대해서도 남다른 해석을 했다. 사랑의 관계는 ‘두 개의 고독’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라고 그가 말했을 때 릴케의 관점은 보다 선명해진다. 왜 릴케는 ‘두 개의 고독’이라고 말했을까. 보통의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사용할 때 ‘완벽하고 충분한 이해’와 ‘높고 우아한 공감’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말이다. 

나의 이러한 의문은 릴케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은 풀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말이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영역에서 일어나니까요.” 이 문장은 여러 가지로 응용이 가능한 문장이다. 모든 것, 다시 말해 모든 대상의 겉과 사건들이 말로 표현될 수 없듯이 우리는 모든 존재들의 내면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가 ‘발을 들여놓지 못한 영역’으로서 상당한 영역이 미지의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저 노르웨이 니가스브린 빙하의 내부처럼.(누군가의 내면이 거대한 얼음덩어리이며 그 얼음덩어리가 푸른빛을 띠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모든 내면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누군가의 내면에 대해서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아주 획기적인 변화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호두의 단단한 껍질을 맨손으로 깨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넝쿨 강낭콩처럼 한 방향으로 자라나려고 한다. 자라나면서 융통성이 없어지고 성미가 고약해진다. 생각이라는 덩어리의 겉은 딱딱한 물질의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이다.

릴케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단 하나 뿐이며 위대한 고독을 갖고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사용하는 일 또한 누군가의 고독을 보호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내가 지금껏 갖고 있던 생각의 틀은 바뀌게 된다. 모든 내면은 가공하지 않은 원석原石–곧 세공을 거쳐 아홉 개의 보석으로 다듬어지겠지만–의 상태에 있다.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등이 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불교방송 PD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