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에 맞는 불교가 필요하다

21세기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대담 종림 스님, 조성택

2015-01-29     불광출판사

 


지난 100년간 한국불교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제도적 차원의 변화가 특히 눈에 띄게 컸다. 반면 위기설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대중들은 수시로 한국불교가 이대로 괜찮은지를 묻는다. 그만큼 종단 안팎에서 불안 섞인 시선들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21세기의 초입, 한국불교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지성들에게 묻고 싶었다. 이에 답하기 위해 고려대장경 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과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를 한 자리에 모셨다. 한국불교 전반에 대한 그들의 생각들을 들어봤다. 

| 조계종, 너는 누구냐?
사회  바쁜 시기에 어렵게 시간을 허락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최근 불교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2014년 월간 「불광」의 40주년을 끝내고 다시 출발선에 서있는 시점에 거시적인 관점으로 한국불교를 이야기해보고자 이번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현 시점에서 한국불교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점이나 핵심적인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종림 스님  저는 지금까지 선방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이, 선이 좋다고 하는데 왜 좋은지, 선의 교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작금의 한국불교는 하나의 종지로 단일화돼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불교의 모습이 혼합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불교에 들어와 있는 다양한 불교의 모습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만 일관적인 논지를 갖추고 통일된 불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성택  아마도 스님의 말씀과 제 생각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혼합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전통적으로 한국불교는 여러 불교의 모습들이 혼재되어 온 측면이 있죠. 이것을 통불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 상황은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굉장히 다불교多佛敎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종교적인 상황도 있지만 불교 내부만 들여다봐도 매우 다양한 불교들이 들어와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이 시점에서 조계종은 1,700년 한국불교 역사의 적자 혹은 정통임을 자임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면, 이제는 이런 다불교적 상황을 조계종 내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가장 필요한 것이 ‘종학宗學’이라고 봅니다. 대체 왜 선이 좋은 것인가? 이것이 정통이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종학에 대한 개념정립이 필요합니다. 

종림 스님  한국불교에 들어와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틀이 정 없다면, 차라리 종파를 분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정토는 정토대로, 선은 선대로, 티베트는 티베트대로, 남방은 남방대로. 아마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종림 스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불교가 유일했는데, 이제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거대한 라이벌이 생겼어요. 기독교 이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새로 유입됐어요. 시대가 달라진 거죠. 그런 전제 속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고 나아가는 것이 좋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조성택  부처님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때도 굉장히 다종교적 상황이었어요. 다종교적 상황에서 다른 것들을 인정하고 판단해가면서 나온 것이 불교이지 않습니까. 불교 자체는 21세기의 다종교적 상황, 다문화적 상황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태생적인 개방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2,600년의 불교사를 생각해보면, 처음 1,600년간은 불교가 얼마나 다이나믹하게 변화해왔습니까. 그런데 지난 1,0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불교가 거의 정체돼 있습니다. 지눌 스님 이후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종림 스님  1,000년간 잠자고 있다고 하셨는데, 진짜로 그래요.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올 당시 도교와는 친화적인 부분이 많았으니까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유교와의 관계에서는 좀 고전을 했죠. 유교와의 관계에서 적응해가는 가운데 불교의 창조적 특성이 발휘됐다고 봐요. 특히 유교의 이기理氣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화엄학이 나옵니다. 이기론이라는 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이理는 원리, 기氣는 재료로 상정하고 풀어내는 사상 아닙니까. 화엄학은 결국 유교의 이理에 대응시킨 학문이에요. 불가능해 보였던 사상의 대응을 해낸 거죠.

조성택  아,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게 사사무애(事事無碍, 화엄의 4법계法界 중 하나.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나 그 성질이 서로 장애가 되지 않고, 무한한 관계 속에 얽히고설키며 일체화돼있는 연기緣起를 풀어낸다.)까지 발전되는 것 아닙니까? 동아시아의 사유를 보면 아마도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의 하위에 해당하는 법계. 본래의 성질을 의미하는 본체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서로 걸림 없는 관계 속에서 의존하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의 수준까지는 간 것 같아요. 여기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사무애에서 사사무애로 한 발 더 나아간 겁니다.

종림 스님  그렇죠, 창조를 한 거예요. 저는 한국불교가 아쉬운 게,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국 사회의 논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현재는 조금 나아지긴 했다지만,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죠. 철학의 논의 속에 불교가 편입돼야 한다고 봐요. 들어가서 우리가 주류의 사상으로 자리 잡는 일을 해내야 해요. 우리끼리만 백날 좋다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불교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봐야 해요. 지금 우리
가 상대해야 할 것들, 그게 과학일 수도 있고 유태적인 사고, 이원론적 사고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논파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큰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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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20세기에서 욕망을 비우는 21세기로
조성택  그걸 넘어서야만 21세기의 인간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모델을 만들 수 있어요. 한국불교는 수행과 신행을 말하지만, 그것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보살이라는 모델을 갖고 있지만, 그건 너무 오래된 모델이에요. 불교는 참 풍부한 재료를 가지고 있음에도, 필요한 것을 제 때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요. 올드한 패러다임에 갇혀 버린 거죠. 

사회  21세기의 불교가 추구하는 인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현재 우리가 말하는 보살이라는 단어가 오염된 감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 단어로 공감대를 얻기에는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하면서 새로운 모델이 필요한 상황이 온 것 같습니다. 이 지점이 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조성택  제가 생각하기에 20세기 인간의 모델은 욕망을 실체화하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욕망을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죠. 방법만 정당하다면 욕망은 추구돼야 하고 실현돼야 한다. 그게 20세기에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가. 그것이 20세기 인간의 표본이었다고 생각해요. 늘 그래왔죠. 개인도 그래왔고 국가도 그래왔어요. 욕망의 실현, 욕망의 추구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21세기의 새로운 인간형이라면 욕망의 무실체성, 욕망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게 시작일 겁니다. 타인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이해했던 현상에 대한 반성이죠. 그런데 그런 현상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거죠. 내가 욕망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인식이 새로운 인간형의 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종림 스님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 전에 보살이라는 개념부터 짚어야겠어요. 보살이라는 개념은 원願을 가지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건데, 보살의 원도 욕망이지 않습니까. 결국 개인적인 원이고 나의 원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원의 근거를 두면 또 문제가 됩니다. 개인의 정의正義가 생기고 이로 인해 옳고 그름이 생기니까요. 원의 근거는 개인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이념, 국가적 차원의 것이 될 수도 있어요. 불교적으로 볼 때는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기 위한 동기가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하늘에 태양빛이 있죠. 그 빛은 정해진 형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별이나 달에 부딪히면서 반사됩니다. 원래는 형상이 없는 빛이었지만, 이게 별이나 달에 반사되면서 일정한 상을 가지게 되는 거죠. 자, 내가 원이 있다고 칩시다. 그 원이라는 건 결국 구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민족이나 통일 같은 개념은 개인적인 원보다는 상위의 개념이잖아요. 그런 것들은 괜찮은가, 아닙니다. 그것도 구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관념이나 습관,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본래의 태양빛이 아니라 관념이나 습관,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에 반사되어 상을 가진 욕망이 되는 겁니다.

조성택  제가 요즘 관심이 많은 게 체념입니다. 체諦 자가 ‘진리 체’입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도리를 깨닫는 마음, 진리를 깨닫는 마음이 체념이에요. 두 번째 뜻이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제 생각에 여기서 말하는 포기는 나를 포기하는 거예요. 체념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공존하는 거죠. 그렇게 해야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 ‘보살’을 대신할 화엄형 인간을 제시하다
종림 스님  저는 공空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공이 대체 뭘까.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공집합이에요. 공집합은 서로 겹쳐지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을 의미하죠. 이게 재밌는 게 내용이 없어도 집합은 집합이라는 점이예요.
공집합은 다른 집합들과 어떤 접점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그 자체는 비어있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집합들의 부분집합이기도 해요. 무슨 얘기냐, 나 자신이라는 객체를 온전히 비어있는 공집합이라고 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들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군가의 일부가 된다는 건,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공집합이 된다면 어떨까요. 이렇게 설명해 볼께요. 0이 100개가 있다고 칩시다. 0이라는 숫자 100개를 아무리 곱하거나 더해도 결과는 그냥 0이에요. 그러나 0이라는 개체는 100개가 존재하는 거죠.

조성택  그러니까 제가 이해하기로, 근대 이래 우리는 늘 개인이 모인 것이 사회고, 개인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종림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공집합’의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즉 하나하나의 개체가 다 우주라는 게 되네요. 

사회  우리가 욕망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연결되는 거죠?

조성택  아마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제 식으로 설명하자면,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든 삶의 이야기를 하든 우리는 늘 근거라는 것을 중심으로 사유해왔죠. 서양의 형이상학 전통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존재와 세계의 ‘무근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 무아, 연기 등의 가르침이 바로 그렇죠. 선의 근거도 없고, 악의 근거도 없고. 우리 삶의 근거라는 건 없다는 것이에요.

종림 스님  근거를 찾아서도 안 돼요. 근거를 찾는 태도에서부터 틀려지는 겁니다.

조성택  그러면 유가儒家에서 주장하는 걸 볼 때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동심원으로 겹쳐 그려서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에서 시작해 집이라는 게 있고 사회라는 게 있는 식으로 자기를 확장해 가는 그런 구조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런 식의 사유 구조 자체가 잘못된 상을 만들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종림 스님  네, 그렇죠.

조성택  아, 그렇군요. 저는 유가의 수기치인적 사유 구조와 정반대가 불교의 출가수행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두 가지라고 보거든요. 일단 정착의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가죠. 모든 사회 구조의 근본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중심은 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출가수행의 모델에서는 내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죠. 생물학적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건 하나의 관계일 뿐이지 그게 나의 중심일 순 없어요. 
그러나 동아시아로 오면서 스님들이 가족을 버리고 출가해서 또 다른 ‘유사가족’을 만듭니다. 사형, 사제, 문중, 종파 같은. 이런 것들이 한국불교에 나타나고 있는 병폐의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의 출가라고 하는 것은 나를 버리는 건데, 도로 문중을 만들어서 내 중심을 새로 만드는 것 아닌가 합니다.


| 종단 중심에서 벗어나 소수 공동체로 가자
사회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선의 교판을 정립하고 나면 한국불교가 어떻게 바뀌는 겁니까?

종림 스님  내 생각에는 지금 어떤 식으로든 중앙집권 체계에서 분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봅니다. 분화된 작은 그룹들이 곳곳에서 작은 꽃을 피우는 식이 될 거예요. 선이라는 매개로 통합된다고 해도 중앙에서 주도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문제가 되지도 않을 거고요. 작은 그룹들이 꿈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지 않을까 해요.

조성택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종단을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습관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종단이라는 건 불교사에 없던 제도입니다. 근대를 지나면서 생겨난 거예요. 세속 법에서 종단이라는 걸 요구했고. 종단이 불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종단은 승가, 승단과는 다릅니다. 종단은 행정조직에 불과해요. 자꾸 종단에 뭔가를 요구하는 것은 근대적 요구인 것 같아요. 우리는 지금 근대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차라리 바로 탈근대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탈근대로 간다는 건 아까 얘기했던 대로 소그룹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죠. 이것이 불교의 정신에도 맞지 않을까요?

종림 스님  맞아요. 선원도 각각의 가풍에 따라서 운영되다 보면 꽃이 필 수 있을 거예요.

사회  대담 첫머리에 교수님께서 다불교적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제일 큰 과제라고 하셨습니다. 

조성택  그런 상황을 수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혼란과 다불교적 상황을 구분해야 하는데, ‘다多’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만 다불교 다종교 다인종이 살아날 수 있어요. 상황을 이해하는 바른 관점이 생겨야만 다불교적 상황으로 갈 수 있다는 거죠. 지금 다불교적 현상은 벌어졌는데, 관점이 없다보니까 이 전체가 혼란상황이라는 거예요.

종림 스님  그렇죠. 염불이면 염불의 위치를 지워주자는 거예요. 어떻게 다르다 하는 것을 잡아주자는 거죠.

조성택  교판이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양한 가르침에 대한 위치를 지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의 개시개비皆是皆非가 굉장히 중요한 원리라고 하는 거예요. 개시개비는 동시에 옳고 동시에 그르다는 이야기인데, 더 뜯어보면 네가 옳으면 나도 옳고, 네가 그르면 나도 그르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의 일부를 더듬는 것처럼 뭐든 부분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는 코를 만지고 있고 나는 다리를 만지고 있다는 것뿐이에요.

사회  제기하는 언어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두 분의 생각은 같다는 생각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다양성을 수용하고 다원주의에 입각해서 서로의 위치를 지워주자는 말씀이신데, 그 결과는 약한 정부나 협동조합, 소수 공동체의 형식으로 가야한다는 건가요?

조성택  교구는 교구대로 다양성이나 개성들이 살아나고, 교구 안에서도 각 암자나 어느 스님 중심으로 화엄을 공부하는 그룹도 생기고, 유식을 강조하는 그룹도 생기는 식으로 다양성이 살아날 거예요. 개인의 수행도 자기의 근기에 맞춰 찾아가는 문화가 꽃피지 않을까 해요. 이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사회 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왜냐면 세상의 어느 종교 어느 철학도 이렇게 다원주의를 정당화하고 제대로 보여주는 사상이 없어요, 불교 외에는. 서양도 보면 강력한 일원론적 사유가 밑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거든요. 

| 달라이라마를 연구하는 불교학은 왜 없을까?
사회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학을 정립하거나 교판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현실적으로 뭐가 필요한가요?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성택  저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동양철학의 내용을 보면 유・불・도가 있습니다. 이런 분류는 굉장히 잘못된 거예요. 유교와 도교는 과거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과거의 전통이자 현실에 살아 있는 현재의 종교예요. 그러면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유교・도교 등과 같이 과거의 전통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요. 전부 과거의 텍스트를 놓고 이걸 해석함으로써 자기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유교와 도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과거의 텍스트도 있지만 현재도 계속 변하는 현실의 종교예요. 그렇다면 뭐가 달라져야 하느냐면, 용수의 텍스트 뿐 아니라 종림 스님, 틱 낫한, 달라이라마의 텍스트도 보고 주석서를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운동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학자들은 중론을 쳐다보듯 이것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용수, 세친, 중론, 빨리어만 가지고 얘기하고 있어요. 스스로 불교를 박제화 시키고 있는 거죠. 종림학도 나오고 도법학도 나와야 해요.

종림 스님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조성택  그건 우리 불교학자들이 잘못 하고 있는 거예요. 현재 전국에 불교학자가 100명이 안됩니다. 분석철학 학자 수보다도 적어요. 그 이유는 동국대 불교학 관련 학과들의 폐쇄성과 다른 대학 불교학자들의 소극적 활동 때문이라고 봅니다. 전국에 동양철학, 한국철학 교수자리는 꽤 많은데 불교학은 거의 없어요. 그러니 아무리 공부해봐야 활동할 곳이 없는 거예요. 

종림 스님  저는 종단이 유지하고 사는 것에 급급한데, 내면적인 것을 정리하는 여유의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집단이 꿈을 가지고 여럿이 일하는 것에 이제 별로 관심이 없어요.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더 많죠. ‘공’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해석해내는 일, 그런 것들을 정리해보고 싶어요.

조성택  저는 불교지식의 인문화를 추구해보려 합니다. 불교 교리의 무아라든지 오온이라든지, 세계관, 인간관 같은 것들이 풍부한데 전통적인 교학의 틀 안에서만 논의되고 있어요. 무상, 고, 무아라는 개념이 일반철학의 담론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고, 접목될 수 있는지를 시도하는 게 불교지식의 인문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자들이 많이 분발해야죠. 

사회  오늘 두 분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 자리가 한국불교의 근본을 생각하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두 분 하시는 일에서도 진전이 있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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