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동희 스님(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전수조교) 수륙재

2014-12-30     불광출판사

범패梵唄와 작법作法은 잘 알려진 듯하지만, 지금의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불교의 문화다. 범패는 곧 불교의 음악이다. 범음梵音, 인도印度 소리, 어산魚山이라고도 하는데, 가곡·판소리와 함께 한국의 전통 3대 성악곡 중 하나로 분류된다. 작법은 불교의 의식무儀式舞다. 예로부터 절에서는 사찰에서 행해지는 의식무를 춤이나 무舞라고 부르지 않고 작법 혹은 착복着服이라고 불렀다. 법을 짓는 몸짓이라는 의미로 작법이라 했으며, 지나가는 손길에 장삼자락이 스치기만 해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환희심을 일으킨다고 해서 착복이라 불렀다. 범패와 작법으로 이뤄지는 재의식 중 중생 제도를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수륙재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고 범패와 작법으로 그 의미와 환희로움을 전해 인간부터 짐승, 미생물, 유주무주 고혼孤魂들까지 모두 고해苦海를 건너가길 기원하는 의식. 그래서 수륙재는 보살의 마음이 담긴 의식이다. 



동희 스님(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의 전수조교)은 최초의 비구니 범패승으로, 모든 범패와 작법에 능하다. 얼마 전 재현된 진관사 국행수륙재의 집전을 동희 스님이 맡은 것은 그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소리와 몸짓에는 조지훈의 ‘승무’에 묘사된 성스러운 간절함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가슴 한쪽에서 올라오는 절절한 감동에 이내 온몸을 전율하게 된다. 진심을 담아낸 소리가 가슴을 울리고, 마음을 다해 뻗어내는 손짓 하나에 눈시울이 젖어드는 경험, 그 감동을 제대로 경험한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방도가 없다.



 

염불은 곧 범패다. 염불의 기본이 돼야 범패도 할 수 있다. 염불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간곡함이 실려야 한다. 기능적으로 외우거나 다른 사람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스님은 힘주어 강조한다. 결국 하는 이와 보는 이의 공감이 포인트다. 공감이 이뤄져야 자비심이 올라온다. 자비심은 보살의 마음이다. 거기에 전통적인 호흡법과 소리법 등이 덧붙어 듣는 이의 가슴은 더욱 간절해진다.



 

수륙재는 최소 7일 이상 행해져야 온전히 재현됐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9일이 걸리기도 한다는 게 동희 스님의 설명이다. 그 기간 동안 행해지는 여러 의식 중 수륙재 본 의식만 3일이 소요된다. 재를 지내는 동안 25청을 올리기 때문에 상상단, 상단, 중단, 하단, 사자단, 마고단, 용왕단 등 25개의 단을 겹겹이 차려서 재장을 꾸민다. 상상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규모일 뿐 아니라, 보통의 정성과 자본으로는 재현이 어렵다. 


 



고해苦海를 건너 도솔천으로 인도하는 대장엄의 야단법석

동희 스님(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의 전수조교이자 최초의 비구니 범패승)은 청주 한 씨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대한민국 초대정부 수립 이후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에서 근무한 아버지를 둔 덕분이다. 그러나 1950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그 탓에 가장 먼저 부모를 잃어야 했다. 6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 청량사로 들어온 연유에는 그런 사연들이 숨어 있었다. 
인연 따라 흘러온 절집 생활 중에 염불을 따라하고 의례의식을 몸에 익히는 건 위에서 떨어진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범패와 작법은 당연한 절집 문화였다. 누구나 익혀야 할 불전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염불과 의례의식에 상당히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 홀로 전통 의례를 지킨  최초의 비구니 범패승
절집에서 재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정화운동이후다. 비구와 대처승의 싸움에 엄하게 희생된 건 ‘무당질’로 폄하된 범패와 작법이었다. 그 뒤로 수십 년, 유일하게 태고종만이 그 전통을 어렵사리 이었을 뿐, 타고난 범패승들은 입을 닫았고 고매하고 선 고운 몸짓을 보여주던 이들도 가부좌만 틀었다. 지금 같으면 문화재급으로 주목받았을 법한 절집 악기들 역시 이 당시에 모두 부서지고 깨져서 사라져 버렸다.

각종 의례의식들과 함께 전통 복식과 색채, 각종 문화들이 함께 자취를 감추자 동희 스님은 1995년 쉽지 않은 결심을 한다. 불교의 전통의례를 무대 위로 올린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은사스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은 난리가 났다. 그러나 동희 스님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 공연은 큰 화제를 낳았고, 맥이 끊겨가는 의례의식을 복원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끈질기게 버티고 이겨내며 전통을 지켜온 동희 스님은 그래서 소중한 존재다. 스님은 정화 이전까지 절집에서 행해지던 전통 재의식들을 기억하고 있다. 수륙재에서 행해지는 나비무, 바라무, 법고무가 모두 가능하고 안채비, 겉채비를 기본으로 그 속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소리들을 모두 뽑아낸다. 성조가 가파른 서울 범패와 비교적 완곡한 경남 범패를 기억하고 이를 구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진관사에서 국행수륙재를 재현할 때 동희 스님은 전체 재의식의 집전을 맡았다. 스님은 예전의 수륙재를 직접 보았고, 참여도 해봤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인물이 없었다. 중생 제도를 기원하는 재의식인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본래 입재를 시작으로 초재에서 칠재까지 49일에 걸쳐 진행된다. 수륙재의 정점은 마지막 칠재다. 칠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눠 이틀간 지낸다. 낮재에서는 시련·대령·관욕·신중작법·괘불이운·영산작법·법문 순으로 온 우주 법계의 존재들에게 부처님의 법문을 전하고 깨달음을 얻어 제도되기를 기원한다. 영산재가 열리는 셈이다. 이어서 열리는 밤재에서는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중・하단 소청, 상・중단 권공, 하단시식, 봉송회향 등이 이어진다. 모든 공덕을 다시 우주 법계의 존재들에게 회향하는 순서다.

예전에는 수륙재가 최소 일주일에서 열흘에 걸쳐 열렸다. 그래서 수륙재에는 인근 지역의 절들이 모두 모여 함께 재를 지냈다. 동희 스님의 구술에 따르면 수륙재에 참가하기 위해 수많은 절에서 온 범패승들이 일주문부터 악기를 연주하고 짓소리를 하며 줄줄이 입장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이 재에 참여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렇게 모인 스님들은 수륙재를 통해 모든 중생들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 도솔천에 이르기를 기원했다. 무한한 자비심의 표현. 가히 대승불교 의식의 극치였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전통을 이어가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다.

범패와 작법, 수륙재를 설명하던 스님은 간간히 말을 멈췄다. 말이 빈 그 자리에는 아쉬움이 눌러 앉았다.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다. 스님의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낭랑한 서울 사투리 저편에 새겨진 생채기가 무척이나 아리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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