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반에 대한 그리움

남지심 연작소설

2007-06-22     관리자

 "너도 왔구나."

 강 여사가 절 마당으로 들어서자 탑 밑에 서 있던 숙희가 강 여사 앞으로 다가오며 손을 잡았다.

 "응. 일찍 왔니?"

 "아니. 나도 지금 방금 왔어."

 "진옥이는 어디 있니?"

 강 여사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스님 방에 있나봐."

 숙희도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미영이도 같이?"

 "그렇겠지 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 요사채 마루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그들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너희들 왔구나. 언제 왔어?"

 "좀 됐어."

 그들은 눈으로 인사들을 나누며 시간을 내서 와준 것을 서로들 고마워 하고 있었다.

 "그럼 진옥이 봤니?"

 강 여사가 조심스럽게 묻자,

 "응 안에 있어."

 한 친구가 예상했던대로 스님 방을 가리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모인 사람들은 다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였다.

 그들은 모두 여학교 동창들이었다. 여학교를 졸업한지도 30년 가까이 되니 다들 50고개를 바라보는 중년여인들인데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는 일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서 꿈도 있고 희망도 있었는데, 또 그런 꿈과 희망을 어느 정도는 성취시키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런 것은 기쁨이 되지 못했고 나이를 먹을수록 알 수 없는 불안 속으로 자꾸 빠져들면서 사는 것이 조금씩 두려워졌다. 그것은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몸져눕거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면서부터였다.

 진옥이 남편만 해도 그랬다. 그는 일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를 데리고 유럽여행을 시켜줄 만큼 활기에 차고 건강했는데 암이라는 선고를 받더니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영이가 더 괴로워 하는 것 같더라."

 "얘는. 아무려면 본인만 하겠어?"

 "미영이 경우는 그렇기도 할거야."

 강 여사는 친구들 얘기를 들으며 아득하다고 느껴지는 여학교때의 일을 떠올렸다.

 강 여사가 여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시험을 치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였으므로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 특수한 경우를 빼면 대개는 고등학교까지를 같은 학교에서 마쳤다.진옥이 하고 미영이도 그런 경우였다.

 미영이와 진옥이는 여학교때 흔히 볼 수 있는 단짝친구였는데 신학기가 되면 같은 반이 되지 못할까봐 안달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같은 반이 되지 못하면, 종례를 먼저 한 친구가 종례를 늦게 한 친구반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종례가 끝나면 함께 학교를 나가곤 했다.

 그들은 늘 그림자처럼 같이 다니면서 빵집도 가고, 극장도 가고, 가끔씩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 갈대가 우거진 잠실벌을 걷기도 하면서 꿈과 우정을 다져갔다.

 그뿐 아니라 시험때가 되면 공부를 해야한다는 구실을 서로의 집을 옮겨 다니면서 함께 밤을 새웠는데 그럴 때도 공부보다는 얘기하는 재미를 더 즐겼고, 밤늦도록 소곤대다가 몰래 부엌으로 나가 수제비를 해 먹으려다 밀가루를 부엌바닥에 쏟아 어머니한테 혼이 날 때도 있었다.

 이렇게 어울려 다니다 보니 양가에서도 서로를 다 알게 되었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미영이가 적극적으로 다리를 놓아서 진옥이는 미영이 오빠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흔히들 아무리 친한 친구도 시누이 올케 사이가 되면 우정이 깨진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도 이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아서 두 사람은 시누이 올케 사이가 된 후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있었다. 하기때문에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미영의 심정도 진옥이 못지 않게 슬프고 괴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 여사가 잠시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이제 식을 시작하려나 봐."

 숙희가 법당쪽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법당 층계에는 가사장삼을 입은 스님 세 분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한 계단 한 계단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얘 우리도 들어 가자."

 누군가가 이렇게 제안을 하자 탑 앞에 모여있던 친구들은 법당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법당 안에는 이미 많은 공양구가 진설되어 있었고 화환도 여러 개 불단 밑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진옥이 아들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가족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법당 안으로 들어간 강여사는 부처님께 3배를 드리고 한쪽 구석에 정좌하고 앉았다. 그러자 곧이어 흰 상복을 입은 진옥이를 미영이가 부축해 들어왔다. 그들을 본 친구들은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가리며 조용히 고개들을 숙였다.

봉청시방 제현성

(시방의 여러 성현과)

범왕제석사천왕

(범왕 제석 사천왕과)

가람필부 신기중

(가람신 팔부신들을 모두 청하오니)

불사자비 임법회

(자비를 베푸시와 이 법회에 강림하여 주옵소서)

 맑고 청아한 요령 소리와 함께 시방세계에 가득하신 불보살님을 청하는 옹호게(擁護偈)가 법당 안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강 여사는 스님들의 염불 소리를 들으며 영가단에 모셔져 있는 진옥이 남편 사진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노란 금테 안경을 쓰고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중후한 중년 신사의 풍모를 얼굴 가득 지니고 있었다.

 "저분은 지금 어디 계실까?"

 강 여사는 영가 사진을 보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그 분이 어디 계신지 강 여사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천도제를 지내는 이 법당에 계신지, 아니면 허공 어딘가에서 이 의식을 지켜보고 계신지.

 생사의 길이 어두우매 부처님의 광명을 의지하여야 밝힐 수 있고, 고해의 파도가 험난하매 법보의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생육도의 중생이 진리에 미혹하여 생사의 고해 속을 헤어나지 못하고 삼도팔난의 생명이 망정에 끄달리므로써 누에가 고치 속에 갇힌듯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 생사의 되풀이는 아득한 옛적부터 이어져 오고 있사오나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찌 면 할 수 있사오리까.

 오늘 이 자리에는 서울 강남구 청담아파트에 거주했던 권오기의 영가 사후 49일을 맞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왕생극락을 발원고자 법석을 마련하였사오니······

 스님의 대령소가 법당 안을 메우자 여기저기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1시간 이상 진행되던 천도제는 변식전언을 마지막으로 모두 끝났다.

 모든 의식을 끝내고 법당 밖으로 나왔을 때 미영이가 진옥이를 대신해 친구들 앞으로 다가와서

 "와 줘서 고마워" 하며 일일이 손을 잡았다.

 "우린 그냥 갈께. 니가 진옥이를 위로해 줘."

 친구들은 이런 말을 남기고 점심 공양을 들고 가라는 미영이의 권유를 뿌리치고 절을 나왔다. 비통해하는 진옥이의 얼굴을 더 볼 수 없어서였다.

 모두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산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

 "얘, 우리 어디가서 점심먹고 헤어지자."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그래, 그러자."

 모두들 친구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 점심 때가 되었으니 시장하기도 했지만 그대로 헤어지기에는 마음이 너무나도 착잡해서였다.

 점심을 먹고 옆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면서 친구들은 사는 것의 허무함과 사는 것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생노병사가 피할 수 없는 사고(四苦)임이 비로소 알 것 같다고도 했다.

 친구들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있던 강 여사는

 "얘 우리도 서로서로 의지해서 공부를 하자. 비록 출가는 못했지만 출가 수행자 같은 마음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조금은 덜 허무해질거야"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친구들은 한결같이

 "조금더 있다가"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사는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하니 그 일에 전념하다가 좀더 늙어져서 한가로워지면 그 때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강 여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려져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지금 진옥이 남편 49재를 지내고 와서도 자신만은 70·80을 당연히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70·80은 20년 30년 후의 일이 아니라 200년 300년 후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강 여사는 그런 친구들을 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수행을 다시 한번 속으로 생각해 봤다. 싯달타 왕자는 아내를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는 일 이외에 국민을 버리는 일도 감행했다. 왕자의 위치에서 국민을 버리는 일은 아내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는 일보다 더 괴롭과 힘들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강 여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왜 왕자의 몸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는가도 어렴풋이 알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구도의 길에 들어서서 도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모든 것에 우선할 만큼 화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차례로 보여 주시기 위한 배려였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 배려는 팽개쳐 놓고 그림자의 그림자만 붙들고 자신의 생을 다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강 여사는 자신의 뜻을 긍정해주고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주는 도반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내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적인 갈망이었는지도 모른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