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됨을 부숴 올바름을 드러내다

대담-적명 스님(문경 봉암사 수좌), 류지호(월간 「불광」 편집주간)

2014-12-30     불광출판사

「불광」 창간 40주년을 맞아 지난 10월 9일, 이 시대의 대표적 선지식 적명寂明 스님을 문경 봉암사에서 만나 뵈었다. 따뜻하지만 서슬 퍼런 스님의 가르침. 그 살아있는 죽비소리를 창간 40주년 기념호인 11월호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스님의 출가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수행자의 삶. 그것은 그대로 오롯한 가르침이 되어 가슴에 새겨졌다. 적명 스님과의 만남 그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1980년 10・27 법난 후 정화중흥회의’, ‘1994년 종단개혁’, ‘2013년 총무원장 선거’ 등 현대 한국불교 역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스님의 역할 그리고 앞으로 한국불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들어본다. - 편집자 주

 


부처님 오신 날을 제외하고는 개방되지 않는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가 창간 40주년을 맞이한 「불광」 편집부에게 입장을 허락했다. ‘수좌 중의 수좌’라고 불리는 적명 스님과 류지호 편집주간이 보림당寶林堂에 마주앉아 파란곡절 했던 현대 한국불교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긴 세월을 훑어가며 나눈 대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스님이 겪었던 이야기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제언을 들으며 문득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 떠올랐다.


| 천칭天秤과 분동分銅을 들다


류지호 스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부처님 오신 날 이외에는 일반인들에게 열리지 않는 봉암사인데 이렇게 특별하게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명 스님 반갑습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불광」 참 잘 보고 있습니다. 기획도 잘 하고 표지도 매우 세련됐어요. 항상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잡지입니다.


류지호 감사합니다. 스님, 올해로 조계종 종단개혁불사가 20주년이 되었습니다. 1994년 개혁회의가 7개월 동안 진행 됐었을 당시, 종헌 전문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때 스님께서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 대화를 이끌어내고 성사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적명 스님 벌써 20년이나 됐습니까? 참 시간이 빠르네요. 1994년 당시에는 비로토굴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토굴에 있는데 내원사 비구니 스님이 찾아와서 성우 스님한테 전화가 왔다고 하더군요. 스님이 제게 전화할 일이 없는데 말이지요. ‘이상하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고 전화를 받으니 스님께서 그러시는 겁니다. “스님, 큰일 났어. 스님이 좀 와봐야겠어! 지금 종단을 교종敎宗을 만들라코 해야! 지금 옆에 진제 스님도 있어!” 상황을 알아보니 종단의 종헌 전문에 종조설과 관련해 스님들 간에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보조 스님이 종조인지, 태고 스님이 종조인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 의견충돌 때문에 수좌스님들이 내일모레 종헌 전문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해인사에서 결의대회를 하기로 했다는 상황이었습니다.


류지호 종헌 전문과 관련해 서로 의견차가 큰 상황에서 서로의 의견을 좁혀 조율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스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셨는지요?


적명 스님 누구라도 나서서 함께 이야기해보면 사전에 조율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번 해보자 싶어 총무원에 있는 도법 스님에게 연락을 했지요. 도법 스님이 “저희들은 언제든 대화의 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라고 의사를 전달해주기에, 개혁회의 측 대표로 몇 사람과 나를 포함한 수좌 대표 몇 사람이 만나 사전에 이야기를 나눠보자 결정했습니다. 개혁회의 대표로 열댓 명, 수좌들은 서너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지요.


수좌회의를 통해 수좌 측 대표를 열 명 정도 선임하겠다. 개혁회의 쪽도 종헌을 실제로 다루는 학담 스님을 위시해 몇 사람 선임해 수좌 대표들과 함께 합숙시키자. 종헌전문 개정에 있어 서로 합의가 될 때까지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리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쉽게, 한 시간이 채 안돼서 의견 일치를 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해인사 수좌대회가 열렸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대표 몇 명을 선임해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해 개혁회의 대표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종헌 전문 개정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지요.


류지호 종헌 전문 개정은 어떤 점이 쟁점이었습니까?


적명 스님 종조 논란에 대해 맞춤법이나 적절치 못한 언구들 정도만 수정하고 원래 종헌 전문을 그대로 사용하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섣불리 종조가 ‘태고 스님이다’, ‘보조 스님이다’라고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단에 연구위원회를 둔다던지,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검토해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류지호 스님께서는 1980년 10・27 법난 직후에도 종단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힘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적명 스님 10・27 법난 직후에는 수좌스님들이 전부 다 서울에 올라가서 총무원에서 한 철, 그러니까 3개월 정도를 살았었지요. 저도 마하사에 있다가 부랴부랴 서울에 가게 됐습니다. 고우 스님, 활성 스님, 휴암 스님도 같이 계셨고, 무여 스님도 조금 뒤에 합류했습니다. 그렇게 급히 서울에 가서 보니까 전두환이 불교계를 정화한답시고 스님들을 가둬버리고 총무원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창열 육군 중령을 교단 안정의 책임자로 앉혀 놓았더군요. 전 중령이 우리를 보자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같다고, 어떻게 일을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이제야 숨이 놓인다고 하더군요.


수좌스님들이 모여 정화중흥회의를 결성했습니다. 원로스님을 비롯해서 중진스님, 교계와 학계 인물들까지 전부 망라해 약 200명이 모였고 그 중 20명으로 상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때 기획실장을 법정 스님이 역임하셨어요. 당시 법정 스님께 찾아가서 기획실장을 맡아달라 부탁드렸더니 완곡하게 거절하셔서 스님께 ‘이름만 띠게 해주십시오. 실무는 저희가 보겠습니다.’라 재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법정 스님께서 기획실장이 되시고 실무는 제가 봤었습니다.


류지호 일각에서는 정화중흥회의를 이끌던 상임위원회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진행되었고, 성과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적명 스님 교구본사와 주요 수말사 20여개 사찰 주지를 교체해야 했습니다. ‘수좌들이 종권을 장악하려고 포석을 깐다.’라는 의혹들도 많았지요. ‘비상체제는 짧을수록 좋다.’,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는 요구들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정화중흥회의를 연장할 수도 있고, 종권을 잡을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일을 해보니 4년 정도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종단의 기틀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 적지 않은 스님들이 정부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그 중에 항상 꿋꿋한 소리를 하시던 분이 법정 스님이셨지요.


저희는 그 한 철이 지루하기만 하고 빨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헌데 밖에서는 ‘저 사람들이 오래 머무르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혹들을 계속 이야기하던 상황이었지요. 상임위원회 모두가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체 종헌 제도는 다루지 못했습니다. 종단 쇄신을 해보려 해도 여러 가지 것들이 부딪히더군요. 잘 해보려고 해도 제도만 가지곤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의식이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의도만 가지고는 종단을 쇄신하겠다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종회의원 선거법만 만들고 종회를 구성해서 차분히 모든 문제를 해나가라고 자료를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래도 지금 보면 그때 성과라고 할 것이 수계의식을 하나로 통일시켜 조계종 단일계단을 만든 것입니다.



| 공심公心으로 나선 길

류지호 10・27 법난 이후 총무원에서 활동하셨던 시절도 그렇고 1994년 종단개혁으로 종헌전문 개정을 둘러싸고 스님께서 하신 역할도 그렇고 공심公心으로 일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 총무원장선거 당시에도 스님께서 공심으로 나서셨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적명 스님 작년에도 무척 욕을 많이 먹었지요. 작년 총무원장 선거 입후보가 시작됐을 때, 자승 총무원장이 새벽 일찍부터 출발해서 봉암사로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와서는 삼배를 올린다고 하더군요. 수좌스님들께 드려야 할 참회를 스님께 대신 드린다고 말입니다. “스님은 할 만큼 다 했지 않냐.”고 물었더니 “총무원장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결국 다시 출마하게 됐습니다. 약속을 어겼으니 참회하겠습니다.” 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 해봐서 안 되면 봉암사로 내려와서 스님 모시고 여기서 지내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표정에 비장함이 있었어요. 그 사람도 명예퇴진 할 기회를 만들어주면 물러날 의사가 있었다는 것, 저는 지금도 작년 그 발언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류지호 작년 총무원장선거 당시 스님께서는 종단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후보추대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하셨습니다. 특별한 뜻이 있으셨던 것인지요.


적명 스님 순수한 집행부를 구성해보자는 생각은 작년 총무원장 선거 이전부터 해왔었습니다. 제가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 자문위원으로 있는데, 백양사 도박사건 이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종회에서 계파를 장악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다 내려오게 하고, 종회나 총무원에 관여하지 않고 있던 제 3의 인물들을 데려다 순수한 집행부를 구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종단을 개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선거 출마와 관련해서 종단이 어지러워짐을 봤습니다. 그래서 저와 도법 스님이 처음 논의를 시작하고, 8월 31일 대전 유성에서 자승 스님, 법등 스님, 도법 스님, 수경 스님과 함께 만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가자, 새로 후보추대위원회를 구성해 차기 총무원장을 추대하자, 종단 발전을 위해서 그렇게 해보자, 순수한 집행부를 구성해보자’ 하고 결의를 하게 됐습니다. 그것을 보고 5자회담이라고 하더군요. 아주 극적으로 잘 합의가 됐어요.


류지호 5자회담에서 결의된 후보추대위원회의 배경이 오랜 고민에서부터 시작됐던 것이었군요. 그런데 왜 후보추대위원회가 무산된 것인가요?


적명 스님 그 다음날 서울에 올라가서 숙소로 가는 길에 길 건너편에서 보선 스님을 딱 마주쳤습니다. 보선 스님은 옛날 선방에서도 같이 지내서 잘 알던 분입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5자회담에서 있었던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보선 스님이 말하기를 그 일로 법등 스님이 곤욕을 치루고 있다고 하더군요. 상의도 없이 혼자 뜻으로 마치 전체의 뜻인 양 합의까지 했다고 “무례가 아니냐.”, “월권행위가 아니냐.” 하며 상당히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 안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는가?”라고 물으니 보선 스님이 전혀 받아들일 기세가 아니라고 대답을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럼 합의사항은 폐기처분 된 셈이네?” 했지요. 나중에 법등 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체적으로 모여 사전에 설득을 다했고 동의를 얻어 결의를 하려고 할 때 보선 스님이 늦게 들어왔다고 합니다. 모여 있는 장소에 와서는 ‘적명 스님을 만났는데, 그 회담을 수좌들이 다 폐기처분 한다고 했다.’고 전했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법등 스님과 함께 있던 스님들이 ‘그럼 선거를 해야지’ 하고 국면이 바뀌었지요. 합의사항은 폐기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류지호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겠습니다. 그 다음 상황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적명 스님 보선 스님 측의 의견으로 법등 스님이 후보 사퇴와 관련한 인터뷰를 했대요.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승 스님 측의 의견으로 도법 스님이 반박 성명을 냈고요. “총무원장 사퇴를 전제로 한 이야기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 날 다 같이 앉아서 전부 물러나고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으니, 당연히 사퇴를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총무원에 들어가 자승 스님을 만났습니다. 유성에서 만나고 4, 5일 만에 처음이었지요. 총무원장은 같이 퇴진한다는 조건이라면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바로 퇴진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양측에 기자회견을 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보선 스님 측이 ‘자승 스님이 먼저 기자회견을 하고 나면 자기들 입장을 결정하겠다.’고 하기에, 자승 스님이 먼저 기자회견을 진행했지요. 이후, 응답의 기자회견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틀렸구나.’, ‘의견일치가 되지 않는구나.’ 싶어 다시 봉암사로 내려왔습니다.


류지호 종단의 미래에 청정한 새 출발을 기대하셨을 텐데 실망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적명 스님 종단에 운이 없으려니까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싶더군요. 아직은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자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비난을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종단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 시작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사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까. 그런 기대들을 알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에 끼어들어 오해를 사고 욕을 먹었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진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개의치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류지호 종단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스님께 중재의 역할, 해결사의 역할을 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앞으로도 그런 요구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명 스님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큰일들을 여러 번 겪었지요. 많은 이야기들에는 그 사실 뒤에 오해로 부풀려지는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모르지요, 어떤 문제가 생겨서 내가 나서야 문제해결이 될 것 같다면 또 나서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 불교가 추구하는 본질을 되새겨라

류지호 한국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단이 변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단이 성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명 스님 원로회의 할 때에도 종단발전을 위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간단한 것은 한가지뿐입니다. 스님을 돈에게서 떨어지게 하면 됩니다. 모든 문제는 거기서 생깁니다. 당나라에 측천무후라는 여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심이 아주 강해서 스님들을 잘 위하고 불사도 많이 했지요. 헌데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큰스님이 오시면 목욕탕에서 궁녀들을 옷 벗고 들어가게 해 직접 목욕을 시켜드리게 하고는 몰래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혜안慧晏 대사가 그 시험대에 올랐어요. 궁녀들이 옷을 벗고 들어와 손으로 때를 미는데 목석같이 의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측천무후가 참으로 감탄하고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벽암록에는 이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경계를 당하면 철불鐵佛이라도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빗대어 말하자면, 돈을 앞에 가져다 놓으면 철불이라도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道도 못 닦고, 깨닫지도 못한 햇중들에게 돈을 가져다 놓으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이 돈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스님들에게서 물질적인 것, 특히 돈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돼야 합니다. 주지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떠들어 봐야 개혁되기 어렵지요. 그런 근본적인 문제는 지난 1994년 종단개혁 때도 전혀 이뤄지지 못했고, 지금도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대책을 마련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류지호 지금은 사회, 경제 등 여러 면에서 힘든 사회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스님께서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적명 스님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시절도 있었지요. 저는 앞으로 불교가 기존 5천 년사에 있었던 다른 어떤 사상들보다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바탕에는 자비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바탕에는 불이성不二性이 있어요. 불이성이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남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는 순간 미워할 수도, 다툴 수도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본질입니다. 그래서 불교적 수행이 필요합니다.


류지호 불교 수행은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적명 스님 수행이라고 하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데 결코 멀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의 시작과 끝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수행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선방에서 후학스님들이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스님, 화두가 안 들립니다. 어떻게 화두를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렇게 말해요. “스님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스님 혼자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부처인데 자기 부처한테 경책 받지 않고 누구한테 경책 받으려 합니까. 스님 자신을 향해서 법문하세요.”라고 합니다. 자기가 곧 부처님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법문하십시오.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은 내 부처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 됩니다.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통지승여래가 성불하기 위해 보리수나무 앞에 앉아 부처님처럼 최후를 뚫고자 정진을 하는데, 십겁이 지나도 불도佛道가 나타나지 않아 성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 십겁을 더 지내서야 비로소 불도가 나타나 부처를 이뤘다고 되어있어요. 이 경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십겁이 지나도 불도가 안 나타났으면 어땠을까요? 이 사람은 이십겁, 삼십겁이라도 기다렸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일어나서 가버리려 해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왜 갈 곳이 없느냐, 법화경에 화택火宅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아갈 곳이 화택이기 때문에 어디도 쉴 곳이 없어요. 집이 불타고 있는데 ‘이왕이면 안방에 앉아있어야겠어’, ‘침대가 좋겠어’ 이렇게 자리 잡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가야지요. 불붙은 집, 무상하고 괴로움에 차있고 어떤 것에도 위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감했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 없고 마음 붙일 곳이 하나 없다는 것, 위안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경책하고 일으켜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은 내 부처님밖에 없다는 것만 확실하게 알고 수행하면 어떤 방법이든 괜찮습니다.


류지호 오랜 시간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불광」에 바라는 점이나 「불광」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적명 스님 좋은 책을 만들어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데 힘써 주십시오. 그리고 불자로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경전도 많이 읽고, 바른 수행을 하도록 노력하세요. 조금만 마음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노력한다면 자기의식을 바라볼 수 있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기쁨을 느껴서 나도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수행하게 됩니다. 점차 화두를 들게 되고 깊이 있는 체험을 하게 되면 삶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화두가 우리 삶의 전체적인 면을 바꿔주거나 낫게 해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부분부터 희열이나 만족감,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른 가르침을 공부해 한 걸음 더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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