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대담] 원택 스님과 지홍 스님이 만나던 날

그때 그 시절 큰스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2014-12-03     정하중

| 오래 전 두 스님들에 대한 기억

사회 오늘 자리를 함께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자리는 성철 스님과 광덕 스님, 두 큰스님들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고 두 스님들께서 남긴 유산과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다시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됐습니다. 우선 큰스님들에 대한 예전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원택 스님께서는 광덕 스님을 처음 뵌 게 언젠가요? 그리고 두 분은 언제부터 가깝게 지내셨는지요?

원택 스님 1972년 1월에 백련암에 행자로 있었어요. 그때는 누가 다녀가셔도 행자에게 얘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잘 몰랐죠. 광덕 스님도 종종 다녀가셨을 테지요. 그런데도 잘 몰랐어요. 한참 후에 광덕 스님께서 학생들 200여 명을 데리고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광덕 스님을 처음 뵀어요. 큰스님 심부름으로 종종 광덕 스님을 찾아뵐 기회도 많았는데, 그때 스님 곁에서 젊은 스님 하나가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참 인상 깊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스님이 지홍 스님 아니었을까 싶어요.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홍 스님과 서로 가까워진 건 한참 후예요. 스님이 조계사 주지 소임을 맡던 시절이죠. 그때는 내가 총무원 총무부장을 하던 때였고요. 그때 비로소 우리가 동산 스님에게서 뻗어 나온 사촌지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 당시 지홍 스님은 이미 종회의원으로 종단 대소사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총무부장 소임을 하면서 지홍 스님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지홍 스님 난 스님 훼방 놓고 괴롭힌 기억밖에 없는데.(웃음) 그때가 1999년일 거예요. 스님과 친분을 맺기 전부터 난 성철 스님 상좌 원택 스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까요. 성철 스님에 대해서는, 아마도 1970년대 중반쯤이었을 거예요. 광덕 스님을 모시고 백련암에 간 적이 있었어요. 당시는 제가 초상화를 한창 그릴 때였는데, 광덕 스님이 생전에 잘한다고 저를 인정해주신 게 딱 그거 한 가지였어요. 아마 성철 스님께서도 그 얘기를 들으셨는지 “내 초상화도 하나 그려주라. 너희 스님이 잘한다고 할 정도면 나를 그려도 되겠다.”고 하셨죠. 그때 뵀던 성철 스님은 어린이들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여담인데, 원택 스님 1972년에 행자를 하셨다고요? 그럼 나한테는 후배네요. 내가 1970년에 출가했는데.

원택 스님 내가 뭐라고 했답니까?(일동 웃음) 두 큰스님을 돌이켜 떠올려보면, 참 막역한 사이였던 것 같아요. 성철 스님께서 큰일을 구상하시면 늘 광덕 스님께서 마스터플랜을 짜고 도장을 찍는 그런 역할을 하셨죠. 정말 큰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지홍 스님 광덕 스님이 어른스님들의 참모역할을 참 많이 하셨어요. 특히 석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이 하시는 일은 항상 참모가 되어 도와주셨어요. 1970년대 초반 이후에 하셨던 일은 늘 그랬어요. 조계종의 총무부장 직함이 있든 없든 늘 종단의 중심으로 실무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봉한다고 스님 곁에 올라와 있었죠. 종단의 종헌종법 체계도 거의 당신께서 초안을 잡으셨어요.

원택 스님 언젠가 광덕 스님이 그러셨어요. “내가 종단 일에 너무 오래 힘을 쏟았다. 잠실에 불광사를 하나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더 일찍 세간에 나와서 전법을 했어야 했다. 서울의 모든 구마다 불광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아직도 이거 하나밖에 못 했다.”고 하셨죠. 당시 이미 세납이 60세 중반이 넘으셨을 때예요. 항상 스님의 눈은 불광 밖의 세상까지 향해 있었어요.

지홍 스님 우리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하신 얘기가 있어요. “깨를 한 줌 쥐어서 확 뿌리면 곳곳에 퍼지듯이 전국에 전법의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동서남북을 나눠서 전법을 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었어요. 예를 들어 지금의 잠실 법당은 동쪽, 남쪽은 동작구, 북쪽은 종로구 인근에 ‘불광’의 거점을 두고 전법을 해야 한다는 구상이셨죠. 그때 마음을 다잡으셨으면 아마 강서구 쪽에 ‘불광사’가 하나 더 생겼을 거예요.

| 피보다 진한 정을 나눴던 사형과 사제

사회 성철 스님께서 광덕 스님의 『지송보현행원품』 서문도 써주셨지요?

원택 스님 광덕 스님이 책을 쓰시면 꼭 스님께 가져오셨어요. 『지송보현행원품』에 대해서는 아마도 두 스님의 생각이 통했던 모양이에요. 성철 스님께서도 서문에 써놓으셨지만 『화엄경』 「보현행원품」은 불교의 정수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그런데 마침 광덕 스님이 그 책을 들고 와서 보여주셨어요. 성철 스님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서문을 써주셨지요. 그 뒤로 한 동안 백련암 신도들에게 늘 『지송보현행원품』을 나눠주곤 했어요.

현재의 한국불교가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광덕 스님 공이 매우 커요. 그전에는 학자들도 비로자나불만 얘기했지, 보현보살은 언급하지 않았어요. 행원을 강조한 것도 모두 광덕 스님의 공입니다. 제가 광덕 스님께 감동받았던 일화가 있어요. 불광사 법당에 처음 왔을 때인데, 법당 입구 동판에 시주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더라고요. 성철 스님께서 “이걸 왜 이렇게 한 건지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어요. 광덕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원을 세우길, 불광사를 지으며 한 사람이 많은 시주를 하는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작은 시주가 모여서 대중들의 힘으로 절이 세워지기를 바랐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지홍 스님 이번에 불광사 중창불사를 하면서도 그런 방식으로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108만 원씩 약정해서 분납하는 형식을 고수했어요. 대중 불교라는 광덕 스님의 뜻이 불사 속에서 그렇게 구현된 거죠. 스님은 승가가 불교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불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불광을 창립시킨 이후에 드러난 것들을 살펴봐도 모든 것이 불교의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불사의 대중화부터 「보현행원품」을 ‘보현행원송’으로 만들어내고 『보현행자의 서원』으로 다시 각색을 해서 매 법회 때마다 읽도록 하셨고요. 그래서 보살행으로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과 사회 속에서 불교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지요. 이 모든 것이 「보현행원품」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사회 불광은 최근 창립 40주년을 맞아서 언론들을 통해 향후 구상과 여러 가지 계획들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불광의 계획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원택 스님 불광사에서 구상하고 있는 사업들은 하나같이 참 대단합니다.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도 있고요. 복지사업이 선진화된 가톨릭이나 외부의 복지사업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절이 어디 있습니까? 유치원부터 노인 복지까지, 불광의 사람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광과 함께하다 눈 감을 수 있도록 책임지겠다는 건데, 그 사업들의 면면을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성공한 도심포교당이라는 곳들도 이렇게는 못합니다.

지홍 스님 많이 도와주세요. 예전에 우리 스님이 계실 때는 이런 복지사업들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못 하신 것뿐이에요. 이제는 승가 복지까지 보장을 해줘야만 합니다. 각 사찰이 사찰과 관계된 스님의 복지를 책임질 수 있어야죠. 앞으로도 지금처럼 교육, 의료, 노후에 대한 보장이 되지 않으면 앞으로 승가의 미래는 암울할 겁니다.

이건 종무원들이나 재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을 때 열심히 일하고 신행을 열심히 해도 나이 들어 거동을 못하게 되면 절이고 도반들이고 다 연락을 끊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요. 말년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이런 상황에 개종을 하니 마니 따지는 건 공허할 뿐입니다.

원택 스님 불광은 이만큼 성공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성공할 겁니다. 불광이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은 종단에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아요. 뒤따라오는 사찰 주지들에게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불광 식구들에게서 나를 지켜줄 곳은 우리 절밖에 없다는 소리가 나와야 해요. 그래야 불교가 살아요. 불광처럼 이렇게 우리 식구를 챙겨주면 누가 절에 안 오겠습니까? 마주앉았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스님만큼 목표를 뚜렷하게 정해서 이루고 실천할 사람이 없어요.

지홍 스님 이거 시작한다고 할 때는 이게 될까 고민하면서 했는데 언젠가 “이렇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원택 스님 그런 날이 올 겁니다. 지금 불광에서 가장 잘 하고 있는 사업이 불광출판사라고 생각해요. 불광출판사에 과감히 투자를 해서 지금처럼 양질의 불서를 만들어내는 건 지홍 스님의 크나큰 공덕이에요. 요즘 보면 대부분의 출판사들도 다들 어려운 모양이에요. 내가 운영하는 ‘장경각’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러다가 100년 후에 불서 내는 출판사는 불광을 비롯해 몇 개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출판사야 투자를 하면 돌아오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전법학연구소(불광연구원)라는 곳은 투자만 해야지 거기서 무언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라, 그곳이야말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지요. 또 광덕 스님의 사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지홍 스님 불광출판사는 자수성가해서 자력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 출판업계가 힘들잖아요. 우리 출판사도 다르지 않고요. 불광연구원은 지금까지 학문적인 성과 위주로 운영해왔지만 앞으로는 제2의 불광운동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 제시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려 해요.

원택 스님 「전법학연구」의 내용들이 순수 학문은 아니잖아요. 책을 보니까 응용불교적인 성격도 강하더라고요. 현재 응용불교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소는 없잖아요? 스님이 잘 가꾸고 사람을 잘 쓰면 불교계 최고의 싱크탱크Think-Tank가 될 겁니다. 연구소에 인연을 둔 사람들이 현안에 따라 발빠르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내놓는 시스템을 갖출 수도 있고 관련 논문들을 발표해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런 현대적인 싱크탱크의 역할을 해야 돼요. 스님은 손해를 보시더라도 남들이 못가는 길을 가시길 바랍니다.

 

| 반드시 이어가야 할 불광의 꿈

사회 최근 성철 스님의 생가 터인 겁외사에 정부 보조 없이 신도들이 낸 시주만으로 성철 스님 기념관을 개관하셨습니다. 앞으로 원택 스님께서는 어떤 계획과 구상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원택 스님 성철 스님 ‘백일법문’ 테이프들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우선은 스님의 『백일법문』 개정판을 발간할 생각이고, 번역해서 내야 할 책도 있습니다. 『오등회원五燈會元』이라고, 벌써 했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많이 늦어졌습니다. 아마 내년쯤에는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번역이 끝났을 때 이걸 과연 책으로 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요즘 출판계가 이러니까. 중국이나 다른 나라를 가보면 선학 관련 책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요. 한국불교는 완전히 잠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우리가 중국보다도 선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하는데, 지키고 있으면 뭐해. 속이 비어버리는데. 그래서 불서사업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광출판사도 어지간히 고민이 될 것 같아요.

지홍 스님 지금 법인 소속 사찰이 몇 개 정도 돼요?

원택 스님 한 8~9개 정도 돼요. 다 사형, 사제들이 맡고 있어요.

지홍 스님 다 자기가 지은 게 아니잖아요?

원택 스님 예를 들어 정심사 같은 곳은 서울에 성철 스님 신도들이 있지 않습니까. 신도들이 “스님, 우리도 어디 갈 곳이 없으니 절을 만듭시다.”라고 해서 자발적으로 절을 만든 거예요. 그런 식으로 절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절을 그냥 놔두면 창건주 문제가 이상하게 되니까 법인을 만들어 등록시킨 것이고요.

사회 마지막으로 저희 잡지 「불광」이 창간 40주년인데, 「불광」을 위한 평가나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원택 스님 사실 예전부터 일부에서 「불광」을 두고 절멸할 운명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해요. 그런데 정작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판형이 커지고 올 컬러에 내용도 다양해졌어요. 이건 불교계에 처음 있는 일이에요. 그런 「불광」의 창창한 역사를 옆에서 볼 때는 부럽고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 기운을 그대로 이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잡지로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많이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지홍 스님 「불광」은 1970년대에 무속적, 기복적인 불교계 분위기에서 순수 불교를 창간이념으로 삼아 만든 잡지예요. 불교의 본래 모습을 찾자는 거죠. 잡지 「불광」에서부터 불광 운동이 시작됐어요. 처음에는 조그만 골방에 상 하나 놓고 시작한 거죠. 지금까지의 내용만 놓고 보면 불광출판사가 불교계 출판과 불서시장을 넓혔고, 다른 출판사들에게 많은 자극을 줬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어요. 이런 부분은 불광출판사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불광출판사는 가장 고급스러운 책을 낼 수 있고, 다른 출판사가 하지 않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이런 능력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건 여타의 출판사들과 다른 차별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최근에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고비를 잘 넘기면 불광출판사는 앞으로도 교계 출판시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원택 스님 비록 어려운 시기라고 하더라도 40년의 저력이 있으니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광덕 스님을 위한 불사나 불광법회, 출판사, 싱크탱크로서 불광연구원 같은 것들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큰스님의 이름으로 꼭 이어가야 돼요. 거듭 불광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사회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스님들의 원력을 되돌아보고 두 스님께서 해주신 당부를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잡지를 만들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택 스님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친구를 따라 찾아간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처음 만났다. 성철 스님의 “니 고마 중 되라.”’는 말 한 마디에 1972년에 출가를 결심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불교출판문화협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지홍 스님
월간 「불광」 발행인 및 불광사 회주. 1970년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석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1991년 광명 금강정사를 창건했다. 조계종 포교부장, 조계사 주지, 파라미타 청소년협회 회장, 제11·12·13·14·1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현재 제16대 중앙종회의원,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 불교출판문화협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