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을의 부끄러운 고백

2014-12-03     원영스님

낙엽이 진다. 바람이 분다.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욕망도 있고 갈등도 있다. 이중성도 있고 윤리성도 있다. 어느 것을 택하여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은 변화한다. 나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불리는 출가를 택하여 여기까지 왔다. 끝이 어딘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길은 이어져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주시하는 눈을 갖고 싶다.

 

| 고백 하나,

낯선 사람을 대할 줄 몰랐다

머리 깎은 지 얼마 안 되어 절에서 신도들과 함께 장애우가 모여살고 있는 소쩍새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이상한 스님의 후원금 횡령사건으로 인해 공연히 소쩍새마을 장애우에 대한 후원만 끊어져서 그곳 삶이 더 힘들어졌을 때다. 이럴 때일수록 더 찾아가봐야 한다는 은사스님의 자비심 어린 주장에 모두가 수긍하고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소쩍새마을의 첫인상은 글쎄 뭐랄까? 약간 휑한 느낌도 들고, 불어오는 바람도 비릿하게 느껴지는 게 깔끔하지 못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편견이었다. 나는 경직된 태도로 서먹하게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월동준비에 무엇을 도와드려야할지 몰라 일거리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그때였다. 여럿이 모여 있던 무리 속에서 웬 남자가 무작정 돌진하여 달려와 나를 덥석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그 당혹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사람을 떼어내려고 서둘러 밀쳐냈다. 하지만 그 친구 힘이 어찌나 세던지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밀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내 몸을 더 꼭 죄고 놓지 않았다.

그때 옆쪽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던 은사스님 말씀이 “가만히 있으면 된다. 네가 좋은가보다. 자비심을 갖고 어른처럼 행동해라.” 하시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나 죽었소’하고 눈을 감았다. 다행히 그곳 선생님들이 그를 달래며 억지로 떼어주셨다. 얼음장처럼 굳어있는 내게 선생님들은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스님이 좋은가 봐요. 여기 친구들은 좋으면 무조건 달려들거든요.” 하는 거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 나이가 43살이라는 것. 내 나이가 머리 막 깎은 23살이니 어리기도 어렸지만, 제아무리 출가한 스님이라 해도 무조건 좋다고 달려드는 지체장애자를 감당하기에는 도력道力이 딸렸다.

청소를 도와주고, 음식도 날라주며 하루의 봉사활동이 끝날 때까지 그는 뒤통수가 찌릿할 정도로 나를 따라다녔다. 머릿속에선 빨리 마치고 절로 돌아갈 생각만 가득했다. 일을 마치고 청소를 마무리하자, 나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번엔 버스에 올라타는 나를 보며 그가 엉엉 우는 게 아닌가. 난감백배였다. 하는 수 없이 버스에서 도로 내렸다. 연민도 자비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아무튼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울지 말아요.” 그랬더니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전마(정말)? 전마 또 와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느낌으로 알고 있었으리라. 낯선 사람을 대할 줄 모르는 못난 내 마음을.

 

| 고백 둘,

어느새 이중성에 물들어갔다

이렇게 낯선 세계의 사람들에게조차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고 살던 햇중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다양한 고민들을 접하고 그의 마음에 다가가 조언까지 해주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편견을 물리치는 방법은 직접 많이 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누구든 균형 있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변화를 갖게 하니까 말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인생의 변화가 꼭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법랍이 쌓여갈수록 나는 점차 남을 훈계하고 가르치려드는 잔소리꾼이 되어갔다. 흔히 말하는 ‘지적질’도 버릇처럼 굳어졌다. 남 앞에서는 정의로운 듯이 보이고자 했고, 헛된 욕망을 품고서도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미소 지었다. 얼굴이 일그러질 만한 일에도 태연한 척 하는 일도 많아졌고, 보시와 공양을 베푸는 이들에게는 더욱 신경을 썼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그런 경험이다. 출가한 우리끼리만 아는 바로 그 이중성, 양면성의 태도 말이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사람을 마음에 담아야 하는데, 물질이나 체면을 위해 나는 우리끼리만 아는 그 이중성을 몸에 익혔다.

몇 년 전, 뮤지컬 ‘지킬 박사와 하이드’란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선과 악이라는 양면을 가진 동일인물,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다.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지킬 박사에게는 신실한 낮의 얼굴과 유혹에 따라 휘청대는 밤의 얼굴이 있다. 자신의 양면성이 수치스러웠던 지킬 박사는 초월적인 과학연구로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약물을 개발하고, 자기마음대로 선악으로 분리된 모습을 취하면서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점차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걸핏하면 하이드가 되어버리는 지킬 박사는 결국 괴로워하며 자살을 선택한다는 내용이다.

지킬 박사에 비유를 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인간에게는 양면이 있고, 특히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 양면이 더욱 잘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킬 박사는 나쁜 마음을 품었을 때의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악행에 도취한 하이드를 만들어내지만, 종교인들은 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었다가 자신을 우러러보는 대상을 만날 때마다 희노애락을 초월한 듯 포즈를 취하곤 한다. 그 양면의 변화를 두고 비난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늘 여여如如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알고 보면 우리도 위험한 인간이기에….

 

| 고백 셋,

나를 찾는 여행은 내게로 돌아오는 길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젊은 날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선물이고, 늙은 날의 아름다움은 삶이 빚어낸 작품이다.” 이런 얘기를 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미소가 지어졌다. 젊은 날의 아름다움보다는 삶이 빚어낸 노년의 아름다움을 더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철부지 어린 스님이었던 내가 이제는 수많은 딜레마 앞에서 대처하는 능력을 조금씩 키워가고, 집착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고자 노력한다. 이 모든 노력이 삶을 안온하게 빚어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살아오면서 내 삶이 안전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다. 그만큼 변화무쌍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불안정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아프게 사춘기를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나면서 욕망과 이기심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은 결국 내게로 돌아오는 평온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간의 삶을 뒤돌아보며 사람을 말하고, 또 인생을 논하기엔 조금 이른 감도 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가을이지 않은가. 내 안으로 향하는 길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사람과 인생을 충분히 생각할 만하다. 이슬람 시인 ‘루미’는 인간에 대해 이런 시를 썼다.

 

인간이란 존재는 여관과 같습니다.
매일 아침 새 손님이 찾아옵니다.
기쁨, 우울, 비열,
때로 순간의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
모두들 환영하고 접대하십시오.
비탄의 무리가 당신의 집을 거칠게 휩쓸고,
가구를 부수더라도, 모든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십시오.

그러면 그 손님들이
당신을 새로운 기쁨으로 깨끗하게 씻어줄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 수치, 원한을 웃음으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집에 초대하십시오.
누가 오더라도 감사하십시오.
그들 모두는 저 너머로 당신을 안내하고자 찾아왔습니다.

- 잘랄루딘 루미 ‘여관’

루미의 시처럼 모든 걸 포용한 사랑의 삶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 비탄의 무리가 내 집을 헤집어도 웃음으로 맞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내 안에는 욕망과 분노와 슬픔이 많음을 고백한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들이 이성과 윤리를 만나 지금은 순조롭게 조절되고 조화를 이루려한다는 점이다.

‘조화로운 삶’, 그것은 어느덧 내 삶의 목표가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조급해하는 소냐에게 일러준 말씀처럼, 생활전반의 일이나 인간관계를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하지 않게 한다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감정에 치우쳐 도중에 내팽개쳐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로 향하는 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저 오늘처럼만 묵묵히 돌아가고프다.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는 따뜻한 눈을 가지고서. 아! 가을이 아름답다.

 

원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계율과 불교윤리 분야).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원 안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2008년 「대승계와 남산율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계율, 꽃과 가시』, 『인생아, 웃어라』 등이 있다. 현재 BBS불교방송 ‘아침풍경’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앙승가대학교 외래교수로서 강의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