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몸소 나투시다!

정릉 경국사 <아미타 목각탱>

2014-11-04     불광출판사
인간이란, 이 세상 애욕의 바다에서 홀로 태어나 홀로 죽어 가는 것. 세상일이란, 부질없이 바쁘고 어지럽기만 한 것. 서로 믿고 의지할 아무 것도 없다. 가난한 이나 부자나, 지위가 있건 없건,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로 애쓰며 싸우다가, 서로 이해가 맞지 않으면 원수같이 미워하다가, 사납고 표독한 마음으로 마침내 재앙을 일으키는구나. 하지만 끝내 덧없고 너절한 세상일 단념하지 못하고, 한 세상 허둥지둥 헤매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나니. 이 목숨 다하면, 진리의 길 닦고 싶어도 닦을 수 없을 텐데, 어찌하여 젊고 건강할 때 온 힘 다해 정진하지 않는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그 어떠한 즐거움을 바라고 있는가? 어찌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진리의 큰 도를 구하지 않는가? 
 - 『무량수경』 중에서 (필자 편집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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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사(서울 정릉) 극락보전 <아미타 목각탱>
조선후기 18세기 추정, 목각, 168x161cm, 보물 제748호  
경국사에는 후불탱화로 비단 바탕에 물감으로 그려진 불화가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조각한 목각탱이 세워져 있다. 진여의 바탕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상서로운 기운이, 연꽃처럼 피어나기도 하고 수미산처럼 돌출하기도 하고, 빛처럼 뿜어져 나오기도 하듯 표현되었다.  

정릉천을 끼고 울창한 숲 속에 자리한 경국사. 고려시대 자정국존이 창건한 이래 근현대의 대표적 불모 보경 스님과 학승 지관 스님께서 주석하셨던 곳으로 유명한 고승대덕의 수행처. 조선후기에 태조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 묘소인 정릉이 복원되면서 근처에 있던 봉국사, 흥천사와 함께 능묘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온 몸에 기쁨이 넘쳐 기운이 흐려지는 법이 없다·기색이 청정하며 얼굴이 빛난다·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다·삶의 뜻이 뚜렷해지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새롭다·기가 용솟음치고 약동하는 삶을 살게 된다·매사에 자유자재롭다… ”
많은 경전과 선사들의 책들에 언급된 깨달음의 공통된 징표들이다. ‘아- 도대체 언제나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오늘도 방석에 앉는다. 무엇에도 걸림 없이 자유롭다는데, 생사까지도 초월해 버린다는데… . 갈망해 마지않는 그 경지, 그래서인지 청정한 기운이 영롱하게 살아있는 노老스님의 얼굴이 어느새 나의 롤-모델이 되어버렸다. 욕심과 불안과 짜증의 자국들이 덕지덕지 새겨진 얼굴이 아니라, 맑은 기운으로 온화하게 빛나는 눈빛. 나도 과연 저렇게 늙을 수 있을까. 아미타신앙에서는 깨달음의 세계 속에서 아예 영원히 사는, 다시는 속세로 떨어지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자리인 ‘극락極樂’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원토록 계속되는 ‘진정한 평화와 즐거움의 세계’인 극락정토. 옛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아미타’는 ‘무량광無量光’ 또는 ‘무량수無量壽’를 의미하는데, 끝도 한도 없이 무궁무진하게 영속되는 빛과 생명의 세계를 말한다. 


 
구품연대 닫집과 불단.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을 모신 불단 위로는, 극락의 전각 모양의 닫집이 있다.
닫집의 화려한 공포 한 가운데에는 ‘九品蓮臺구품연대’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바로 이 법당 공간이 다름 아닌 극락임을 말해주고 있다.



| 부처님의 눈에 비친, 우리가 사는 모습
부단히 노력하고 정진하여 스스로 구한다면, 극락에 태어나 다시는 생사의 고통 속에서 윤회하지 않고 영원히 평화롭고 즐겁게 노닐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상을 두고, 중생들아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부처님은 삿된 길로만 자꾸 빠지는 아들 채근하듯 어리석은 중생들을 독촉한다.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참으로 쉽건만, 가고자하는 사람이 없구나!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영원불멸의 한량없는 수명을 얻고 지극한 즐거움을 끝없이 누린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얕고 저속하여 한시바삐 닦아야 할 깨달음의 길은 미루고, 하잘 것 없는 세상사에만 골몰하여 서로 다툰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생활에 허덕인다. 돈 많은 이나 없는 이나 시름겹기는 마찬가지. 한 가지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부족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어 항상 이것저것 탐내 애쓰다가, 얻을 수 없으면 부질없이 마음만 태우고 몸도 마음도 지치고 피곤하여 안절부절못한다. 괴롭고 분한 마음에 답답함 풀 길 없고, 졸아들고 닫힌 마음 헤어날 길이 없다. 매양 그러던 어느 결에 세월은 다 간다. 
한 생각 돌이키면 극락이라는데, 왜 우리는 그 한 생각 돌이키지 못 하는가. 극락에 가는 것은 쉽고도 쉽다는데, 우리는 왜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가. 주장자 한 번 내리치는 소리로도 바로 깨닫는다는데, 왜 깨달은 사람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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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 부처님과 팔대보살. 바탕자리(性品)에서→상서로운 기운(性起)이 일어나→불보살님이 화신化身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 있다. 소용돌이와도 같은 기운 덩어리가 피어오르고 거기서 화불化佛이 탄생한다.




| 어떻게 하면 항상 깨어있을 수 있을까 
이미 우리에게는 제각기 ‘나’라는 에고가 형성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선지식들은 말한다.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과거의 경험과 기억과 습관적 반응의 축적으로, 너무나도 견고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이 나라고 너무나 철석같이 믿고 필사적으로 살아왔기에 이제 이것을 떼려야 떼어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나’라고 생각하는 몸과 의식 속에는, 이미 수년간 습관적으로 반응해온 인식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닦여 있다. 그래서 육근(우리가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매체가 되는 안이비설신의)이 대상을 인식하게 될 때는 정말 번개같이 순식간에,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무의식적인 반응들이 일어나버린다. 그렇게 일어난 반응들은 그 전개과정이 너무나 빨라 우리는 이 생각·이 행동·이 번뇌가 도대체 어디에서 온지 모를 정도이며, 결국 영문 모르듯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깨어있으라’고 부처님은 누누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깨어있을 수 있을까. 
항상 깨어있다면, 자신에게 올라오는 생각과 반응들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하는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자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는 힘’을 불교에서는 ‘지혜’라고 한다. 이를 ‘알아차림’ ‘마음챙김’이라고도 한다. 이 ‘아는 마음’ ‘깨어있는 마음’의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참선의 수행 목적이자 또한 결과이기도 하다. 깨달음으로 가는 다양한 수행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통사적으로 볼 때, 신라시대의 원효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역대 선사들이 적극 권유한 방법이 염불念佛수행이었다. 
사리불이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이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오롯한 마음(一心)으로 ‘아미타불’을 부르거나 염念하되, 조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면 그가 임종할 때 아미타불이 여러 거룩한 대중들과 함께 그 앞에 나타날 것이니,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생각이 뒤바뀌지 않고 곧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이다.
- ‘바른 수행’ 『아미타경』 중에서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 동안 오롯하게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일심으로 부르거나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생각하면, 바로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 수행의 요지이다. 마음의 구심점을 ‘아미타불’ 염불에 집중하면, 생각이 전도되지 않고 오만가지 경계의 중심에 ‘아미타불’이 있게 된다. 더 이상 보고 듣고 말하고 판단하는 중심에 ‘내’가 있지 않게 된다.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꾸 연습하다보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 번 듣기만 해도, 바로 확 트인 것 같은 맑고 밝은 커다란 바탕의 관점이 드러나게 된다. 경전에서 강조한 대로 마음을 모아 ‘오로지 일념一念으로’ 간절하게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게 되고, 극락세계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입체적인 목각탱의 표현. 목각탱의 존상들은 부조浮彫이지만, 거의 환조丸彫에 가깝게 조각되었다. 불보살 몸의 전체가 거의 돌출하듯 표현되어 바로 눈앞에 아미타불 성중이 실제로 내려온 듯한 환영을 보게 된다.   
▶  9품 왕생을 상징하는 9개의 여의주. 목각탱의 중심부 하단 가운데에는 둥근 여의주 9개가 마치 연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근원적인 불성佛性 그 자체를 표현한 일원상의 보주가, 왕생의 상징으로 목각탱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 그들이 나를 부를 때, 내가 반드시 가겠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원하옵나니 저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세계와 거기 계신 모든 보살들과 성문 대중들을 뵈옵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때 아미타 부처님께서 큰 광명을 나투시어 두루 모든 불국토를 비추셨다. 그러니 금강철위산을 비롯하여 수미산과 다른 크고 작은 모든 산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한결같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종말에 오는 수재겁 때 홍수처럼, 세상만물이 모두 잠기고 다만 망망한 바다의 물만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에 성문과 보살들의 일체 광명이 다 가리워 스러지고, 다만 부처님의 광명만 청정하게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제자 아난이 아미타불이 나투신 것을 목격하는 장면, 『무량수경』
아미타 부처님을 부르자마자, 아미타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광경이다. 아미타 부처님이 몸을 나투시자 온갖 것들이 모두 그 찬란한 빛 속에 묻혀 버리는 모습이다. 마치 거대한 홍수가 지구 전체를 휩쓸어 삼켜버리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은 어떠한 서원의 결과로 이러한 어마어마한 몸을 받게 되셨을까. 아미타불은 전생에 법장法藏 비구였는데, 수많은 부처님들이 정토를 만들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하였는지 듣고 본인도 그같이 수행하여 불국토를 장엄하겠다고 ‘48대원大願’을 발원하게 된다. 그 중 제19원을 보면, ‘시방 세계의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닦고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해서, 임종 시에 저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원할 때, 만약 제가 군중들과 함께 그 중생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면, 저는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라는 서원이 나온다. 
염불하는 중생이라면 한 명이라도 남김없이 모두 맞이하겠다는 서원을 성취한 아미타 부처님이신지라, 아미타불과 협시 군중들의 조형적 묘사는 항상 ‘내영(來迎, 몸소 몸을 나투시어 중생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핵심적 의미를 십분 살려 완성한 예술품이 경국사 <아미타 목각탱>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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