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병장수, 칠성님께 빌다

통도사 비로암 <칠성탱>

2014-11-04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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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명命’을 타고 난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버리는, 자신은 모르는 자신의 수명. 엄마 뱃속에서부터 뛰기 시작한 심장이 일평생 열심히 뛰고 멈추기까지의 기간이다. 물론 중간에 급작스런 사고 또는 병환으로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자기 ‘명命’대로 온건히 다 살다 가는 경우는, ‘호상好喪’이라 하여 오히려 축하의 대상이었다. 과학적으로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할 때의 미세한 온도차로 수명의 기간이 결정된다고 한다.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다. 육근(六根: 눈・귀・코・혀・몸・생각)이 가지는 한계는 자명하다. 같이 사는 바로 옆 사람의 상태도 까마득히 모를 정도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 잣대로 자신의 온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산다. 중생의 많은 한계 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수명의 한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모두 도둑이다!
통도사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약 700미터 정도 올라가면 극락암이 나온다. 극락암은 근현대를 대표하는 선승 경봉 스님(1892~1982)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쇠퇴일로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본거지이다. 필자가 약 20여 년 전, 부친과 함께 이곳 극락암을 방문했을 때, 경봉 스님이 주석하시고 또 입적하신 삼소굴에 하룻밤 머물렀었다. 아담한 삼소굴 방 안 벽에는 미닫이로 된 작은 벽장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여니 스님 친필의 원고 다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빨간 줄칸 200자 원고지에는 홀가분한 듯 경쾌한 듯, 스님 특유의 활달한 글씨가 흘렀다.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경봉 스님의 저서를 선물 받았는데, 책 표지에는 여명을 바라보는 기골 장대한 스님 뒷머리 실루엣이 크게 실렸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이 모두 도둑이다! 눈・귀・코・혀・몸・생각을 가리켜 육근이라고 하는 긴데, 알고 보면 이 여섯 가지 감각이 사람 망치는 도둑놈들인기라. 그래서 부처님이 이 여섯 가지 도둑놈들에게 끌려 다니지 말고 제대로 잘 단속하라고 이르신 게야.” 그것에 빠져들어 자꾸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그 무상함을 보라, 순간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이 도둑을 보라. 스님께서는 ‘쉬운 비유’로 중생들에게 설법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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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적성성, 적멸 속에 반짝이는 오롯한 앎
극락암을 지나면 그 좌측 위편으로 비로암이 있다. 비로암은 경봉 스님의 시좌였던, 현재 영축총림 방장이신 원명 스님께서 50여 년 가깝도록 계셨던 곳이라 한다.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하는 불화 명작은 비로암 북극전에 모셔진 아주 특별한 칠성탱화이다. 새벽 3시, 예불 가다가 발을 멈춘다. 밤하늘 올려다보니 무수한 별들이 내게로 쏟아진다. 순간,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별들이 있는 아득한 천공 속으로 빠져든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이란 화두가 떠오른다. 고요한 적멸 속에 오롯하게 깨어있는 상태. 항상 그런 상태일 수는 없을까. 적멸의 공간 속에 마음이 저렇게 별처럼 깨어있어서, ‘마음 심心 + 별 성星’으로 이루어진 한자 ‘성성惺惺’이구나. 새벽예불을 주관하신 현덕 스님께서, 본당 예불이 끝난 후 특별히 북극전으로 가셔서 칠성불공을 올려주셨다. 
‘별과 생명’, 밤하늘을 수놓은 총총 별들과 우리의 수명을 주제로 하는 불화가 바로 칠성탱화이다. 칠성탱화에는 천공의 온갖 별들이 부처님과 보살님의 모습으로 화신하여 나타나 있다. 산사마다 항상 가장 꼭대기 하늘과 맞닿는 곳에 칠성각이 있다. 칠성각이 따로 없는 경우에는, 삼성각의 형태로 그 안에 칠성님과 산신님과 독성님의 3성을 함께 모신다. 칠성각은 보통 작은 크기의 아담한 전각이지만, 언제 가든 문은 열려있고 향불은 켜져 있다. 그리고 하얀 실타래 묶음이 공양물로 올려져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의 안녕과 무사함을,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밤하늘 칠성님께 빌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칠성각으로, 구부러진 허리 이끌고 계단 계단을 올라가 향 피우고 촛불 켜고 수천 번 수만 번 절하며 소원을 빌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이 칠성각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빌고 또 빌었을까.

| 칠성님께 ‘자손번창’과 ‘무병장수’를 빌다 
칠성탱화 앞에서 가장 많이 빌었던 염원은 예로부터 ‘출산出産’과 ‘장수長壽’이다. 특히 ‘남자 아이 점지’라든가 또는  ‘병약한 아기의 명命’을 늘일 수 있도록 빌었다. 칠성여래님은 어떠한 이유로 ‘생명의 탄생’과 인간의 ‘수명 연장’을 관장하게 되었을까. 조선후기부터 크게 유행하여 지금까지 신앙되어지는 『북두칠성연명경北斗七星延命經』, 칠성신앙의 중심에 있는 이 경전의 제목(북두칠성이 수명을 연장해 준다)만 보더라도 그 기능을 쉽게 알 수 있다. 칠성각에서 염송되는 칠성청七星請의 유치(由致, 불공을 드리는 취지)를 살펴보면, 재난소멸·자손번창·무병장수·부귀영화 등 다양한 소원이 열거되어 총합적인 신력의 부처님으로 숭배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주로 ‘자손번창’과 ‘무병장수’에 중점이 가 있다. 
칠성불공七星佛供의 내용을 보면, ‘능히 천 가지 재앙을 없애주고 만 가지 덕을 성취케 하시는 금륜보계 치성광여래는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북두대성 칠원성군과 보성·필성, 삼태육성, 그리고 28수가 보좌한다. 천상을 주행하여 인간의 ‘수명’을 늘여주기에 일심으로 머리 조아려 예를 올린다.’라고 쓰여 있다.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었나/ 불보살님 은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타고/ 어머님전 살을 타고/ 칠성님께 명命을 빌어/ 제석님께 복을 타고/ 석가여래 제도하사/ 생일신 탄생하니’ 서산 대사가 지어 널리 불러졌던 ‘회심곡回心曲’의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는 우리 선조들의 가치관처럼, 우리의 ‘명’은 칠성님께 달려있다. 칠성님이 저 멀리 밤하늘 심연 속에서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다 내팽개치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의 ‘북두칠성’과 지상의 ‘인간수명’과는 무슨 관계인가? 어떻게 해서 북두칠성이 인간세상의 액난을 막아주고 수명을 늘여주는 막강한 신력을 갖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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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문화 속 ‘시간의 신’ 북두칠성 
동양의 문화는 음력陰曆을 바탕으로 한다. 음력은 밤하늘 별자리의 변화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유래는 뿌리 깊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의하면, 북두칠성은 하늘의 제왕인 북극성 천제天帝가 타는 수레라고 한다. ‘천공의 황제 북극성은 이 수레에 타고 천공을 돌며 사방을 통일하고 음양을 나누고 사계절을 정하고 오행을 조절하고 24절기를 가름한다’는 것이다. 국자 모양의 별자리 북두칠성에서 운두가 되는 두 별을 직선으로 이으면 만나는 밝은 별, 북극성은 지구의 자전축과 같아 위치변화가 없어 보인다. 모든 별이 움직이지만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별 북극성. 그래서 옛사람들은 북극성을 기점으로 하늘을 빙그르르 도는 북두칠성의 위치를 보면서 시간과 계절을 가늠하고 농사시기를 정했다. 이것이 농사·제사·예절·풍속 등을 포괄하는 생활과 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지표가 되었다.  
북두칠성의 운행에 따라 봄·여름·가을·겨울이 오고, 그 바뀌는 절기에 따라 지상의 인간은 농사를 짓고 제사지낼 시기를 정한다. 그 위치 변화에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했다. 이에 풍속이 생겨나고 예악이 번창했다. 인간세상, 지상의 시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돌면서 시작된다. 하늘과 함께 돌아가는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 역시 그 속의 미물로서 반복되는 생멸의 순환을 함께 하는 것이다.  

| 돋보이는 독창성, 근대의 마지막 창작불화 
천공의 황제인 ‘북극성北極星’은 화폭 가장 중심의 치성광여래로 화신하였다. 치성광여래는 천공의 모든 별들을 거느린다. 심지어 해와 달도 조복하여 일광日光보살 및 월광月光보살로 좌우 협시를 한다. 삼존의 주변에는 칠원성군, 보성과 필성, 삼태육성, 수성노인 등이 자리한다. 이들 주위로 신비스러운 기운이 피어오르고 천공이 열리며 가장 바깥 둘레에는 28수가 둥글게 자리잡았다. 
북두칠성은, 불교에서는 칠성여래의 부처님 모습으로 나타나고, 도교에서는 칠원성군으로 관료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 우리나라 칠성탱화에서는 이 양자가 습합되어 같이 묘사되는 현상을 보인다. 본 작품이 특이한 이유는 도상의 형식과 구도에 있다. 보통 칠성탱화에 등장하는 별자리 신들은 불보살이나 성군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28수를 과감하게 별자리 모습 그대로 그려 넣었다. 또 칠성탱화의 존상 배치구도는 통상 상·하단 좌우 병렬의 정면구도인데 비해, 본 작품은 존상들을 둥글게 배치하였다. 이로 인해 실제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듯한 효과가 난다. 그리고 바탕색을 진한 청색을 사용하여 창공의 느낌을 십분 살렸다. 작품을 그린 화사畵師가 얼마나 칠성탱화의 본질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기존 작품의 단순한 모사가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한 화사의 창작성이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그 독창성을 높이 살 만하다. 이에 본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로 추정되는 1920년대 까지는 적어도 불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작품 제작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분업화되어 불상 및 불화의 조성 역시 형식만 모방한 공산품이 되었다. 깨달음과 이를 조형화한 불교미술품은 더 이상 내적 연계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의 창조적 재현은 정말 보기 힘들게 되고 말았다. 끊임없이 창작 불사佛事에 도전해온 우리 선조들의 옛 작품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부활을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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